자화상, 혹은 행복의 기억

 

<아녜스의 해변>은 바르다가 유년기를 보낸 브뤼셀 근처의 해변에서 시작한다. 해변에 설치된 거울은 세계를 비추는 영화의 비유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일종의 설치작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바르다가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의뢰로 2006년에 했던 ‘섬과 그녀’라는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왜 해변인가? 바르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심상의 풍경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해변’이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해변에서 시작해 그녀의 삶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기억들을 더듬어가는 자화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징 뤽 고다르가 <JLG/JLG>에서 말하듯이 자화상은 회화에서는 비교적 많이 있는 장르이지만, 문학에서는 자전, 회상, 회고록과 같은 형태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는 영화에서 자화상이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장르라 말했다. 하지만 영화가 일종의 거울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영화작업은 작가의 자전을 반영할 것이다. 바르다는 이미 그의 경력에서 수다한 여인들의 초상화 작업을 해왔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샹송 여가수에서 시작해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의 여성운동가, <방랑자>의 모나,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의 유명한 무명인 제인 버킨, 그리고 <이삭 줍는 여인>에서의 그녀 자신까지. <아녜스의 해변>에서 자화상 작업은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이중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작업의 대상이 자신이며, 스스로 자신을 촬영해야만 한다. 바르다는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에서 이미 카메라를 거울로 취급하며 화가나 감독의 초상화 작업이 일그러진 변형의 형상이라는 점을 말했었다. <이삭 줍는 여인>에서는 자신을 이삭 줍는 여인을 뒤쫓는 영상의 이삭 줍는 여인이라 칭한다. 그녀는 주름진 손과, 얇아진 머리카락 등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감자가 썩어가는 장면들과 연결하며 예술적 작업을 죽음과의 싸움으로도 묘사했다.

<아녜스의 해변>은 그런 자화상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첫 장면은 바르다가 해변에서 뒷걸음질을 하며 “나는 작은 늙은 여인의 역할을 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녀의 많은 역할중의 몇 가지 상들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가족사진들, 영화의 클립들, 인터뷰들, 만남들, 풍경들, 그리고 설치작업 등, 다양한 질료들의 콜라주가 그녀 삶의 연대기를 불연속적인 시네마틱한 자서전으로 구조화한다.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에서처럼 여기서 자화상이란 내부로 지향된 시선을 외부로 향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상태에 질문을 던지고, 자아의 거울을 활용해 타자를 촬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다의 내적인 풍경은 바다를 포함한 지리학적 공간들로 정의되어 기억들이 그 각각의 장소에 자리를 잡는다. 거울은 프레임 바깥의 타자를 내부화하는데 활용되어 그녀의 삶에서의 만남들과 경험들을 시각화한다. 바르다의 자화상이란 그러므로 거울에 반사되어 끊임없이 변형을 거듭하는 외면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녀의 작업실 '시네 타마리스'에거 동료들과 함께하는 80회 생일의 축하연이다. 바로 전에 그녀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방의 내부에 앉아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빛 속에서, 어떤 흑백과 칼라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 그것이 그녀에게 영화의 정의이다. 바르다는 영화가 자기의 집이었고 늘, 그 속에서 살아왔다 말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작품과 더불어 과거의 이미지로 남았다. 유목적인 생을 살았던 그녀 또한 뒷걸음질 치며 집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럼에도 기억이 존속하는 한 느낌은 살아 남아있을 것이라 말한다. 고다르의 독존과 달리 바르다의 자화상은 타인과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