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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최근 한국영화의 풍경 + 김수현 감독 특별전

[리뷰] 서울역,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음성

<서울역>,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음성

- 연상호 <서울역 (2016)>





연상호 애니메이션들은 모순적이다. 사회비판적인, 현실적인 고민들을 중심축으로 하면서 막상 그 속의 인물들은 실제 인간을 모사하는데 사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형상은 갖췄다. 말도 하고, 잠도 자고, 밥도 먹는다.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 난 것까지 똑 닮았다. 그런데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형식적인 정밀 묘사에선 부자연스러운 점들이 있다. 진작 진단된 일례로는 허문영 평론가나 곽영빈 평론가가 짚어낸 가면으로서의 얼굴이 있다(<씨네21> 933신전영객잔’, <만화애니메이션연구>, "연대는 ()가능하다!"). 연상호 애니메이션 속 얼굴은 인간의 세밀한 안면 근육을 굳이 흉내 내지 않으며 비현실적으로 급격한표정 변화를 보인다. 살아 숨 쉬는 인간과 2D 애니메이션 인물 사이의 가시적인 간극이다. 이와 같은 괴리는 여태 조명되지 않았지만 무시해선 안 되는 특성들이다. 연상호의 말마따나 실사영화에서는 숨소리와 떨림만으로도 평가받는 가치들이 애니메이션에 부재하는”, “일반 사람도 구분할 수 있는데 평단이나 저널에서 하나로 퉁치는지점들이기 때문이다. (<씨네 21> 1068호 이성강, 연상호 감독 대담)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음성


                                             (<돼지의 왕트레일러)

 

이 지점들 중 주목받지 못한 한 부분이 인물들이 내뱉는 음성과 입술 움직임의 어긋남이다. 초기작부터 <사이비>,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말소리와 입술은 계속해 미묘하게 불일치하며 입술과 음성의 주인이 다름을 가리켰다. 인간이 창조한, 인간을 닮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평면적 피조물에 실제 인간의 육성을 덧입힌 혼종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전면화된 혼종성은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실체 없음을 상기시킨다. 여느 실사영화보다도 현실 반영적인 연상호 애니메이션에서 정작 인물들은 피와 살로 이뤄진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청각과 시각 사이의 불일치는 그다지 타개되려 하지도 않는 듯하다. 단순히 애니메이션의 태생적 난점이라고 하기엔 <인랑>이나 <바쉬르와 왈츠를>와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에선 보이지 않는 특성이기도 하다.




                                                     <인랑>



                                                (<바쉬르와 왈츠를>)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입술과 목소리 사이의 싱크가 아주 미묘하게 안 맞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들의 목소리가 본체로부터 온전히 독립적인 <인디아 송 (마르그리뜨 뒤라스, 1975)>처럼 청각과 시각 간의 괴리 자체에 매달리도록 하지도 않는다. 분명히 저 인물의 목소리임은 분별할 수 있지만 완전히 단정 지어버리긴 찜찜할 정도의 싱크인 것이다. 결국 모른 척 적응해버릴 수 있는, 그러나 문득 눈에 띄면 섬뜩섬뜩한 지점이다.


그래서인지 연상호의 인물들은 분명 인간을 본떴지만 최종 단계에서 진짜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거부하는 것도 같다. 왜일까.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이런 디테일의 교정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지옥>에서 <사이비>까지, 갈수록 스토리상의 환상적인 요소를 제거해온 연상호인데 어째서 인물들은 더 진짜(인간)처럼 바꿔나가지 않는 걸까.

 

 

<서울역><부산행>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부산행><서울역> 연작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부산행>은 실사로, <서울역>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와중에 <부산행>은 무던하게, <서울역>은 날카롭게 연상호 특유의 메시지를 담은 적절한 비교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따르면 사회고발적 영화는 실재하는 세계를 그대로찍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이런 편견에 따라 연상호는 애니메이션 대신 실사영화를 찍길 수없이 권유받았다. 그런데 막상 연상호는 자신의 첫 번째 실사영화를 한없이 가볍게 풀어나갔다. 세간에서 말하듯 <부산행>통쾌한 좀비스릴러, 연상호의 독기가 순화된 영화다. 도대체 왜, 드디어 진짜 인간 배우를 고용하게 되었을 때 연상호는 되려 피상적으로 변했을까. 여기서 연상호가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대하는 태도를 짚어볼 수 있다.


입술과 음성, 얼굴로 돌아가 보자. <서울역>의 결말 즈음, 석규(류승룡)는 대답 없는 혜선에게 소리친다 야 이년아. 뭐야, 혜선아, !”. 류승룡의 목소리는 묘하게 석규의 입술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석규의 가면으로서의 얼굴은 다소 평면적으로 목소리뿐인 절규를 전달한다. 아무리 봐도 이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실사영화의 연기를 쫓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되려 각 인물을 어느 구체적인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로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한 거리감 속에 온갖 추악함과 뒤틀림을 채워 넣었다. 반면에 <부산행>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상화(마동석)는 외친다 기차 빼 이 새끼야”. 과연 이것은 온전한 상화의 목소리일까? <베테랑>의 아트박스 사장 5, 마요미(마동석 + 귀요미) 2, 상화 3할쯤 될 것 같다. 실제 인간은 배역에 고유의 자신을 덧입힌다. 그런데도 진짜 자기 목소리인 것처럼 자연스레 말한다. 명백한 가짜 상화다. 차라리 제대로 가짜임을 보여주려는 듯이 <부산행> 속 공유는 카누 광고모델로, 소희는 만두소희로, 마동석은 마요미로 반쯤 등장한다. 따라서 괜찮다, 거리 같은 것 안 둬도. 어차피 이대로는 기존 연상호의 주제를 기존 연상호의 방식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런데 <부산행>에 여태껏의 주제를 고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별 속에 놓인 애니메이션, 연상호라는 투사


실사와 CG 사이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는 와중에, 그리고 영화가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되면서 타 매체와의 물질적인 구분이 어려워진 와중에,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차별 속에 놓여 있다. 애니메이션은 모름지기 환상성과 감각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한 것이다. 나아가 애니메이션에 관한 비평적 논의의 다양성마저 부재한 실정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연상호의 작품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무수한 글들이 주제적인 측면만을 부각하며 작품들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물론 연상호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편견들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 존재함으로써 유의미할지도 모른다. 차별 없는 곳에서 투사는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의 작품속에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기에 연상호 작품은 더욱 동시대에, 이런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저항할 차별이 소멸된 이후의 투쟁은 차가운 유물로 남아버리기에. 부디 하루빨리 연상호 작품들을 읽을 새로운 시각들이 나타나길 바란다.

 

이호정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