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간의 성격을 결정하는 사운드 연출 - 박재평, 박종빈 감독의 <긴 밤>

2015. 7. 2. 14:15특별전/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공간의 성격을 결정하는 사운드 연출 - 박재평, 박종빈 감독의 <긴 밤>




드보작 DVOXAC 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박재평, 박종민 감독의 첫 장편 영화 <긴 밤>은 1부 “EVE”와 2부 “긴 밤”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태풍이 상륙한 어느 날, 작은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자와 여자를 흑백의 화면으로 그린다. 두 남녀는 함께 식사와 목욕을 하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잠깐 싸운 뒤 짧은 꿈을 꾼다. 카메라는 이들을 바라보다가 정해진 규칙 없이 창 밖의 풍경을 종종 비춘다. 2부는 지하실에서 시작한다. 젊은 남녀들은 술을 마시며 싱거운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 사이 한 남자는 지하실을 나와 청계천, 남산 타워 등 서울 도심을 헤맨다. 그리고 해가 지자 1부에 등장했던(것으로 보이는) 집으로 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거칠게 정리한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긴 밤>에는 뚜렷한 서사가 없다. 1부는 두 남녀의 일상, 2부는 남자가 거니는 서울의 풍경을 그릴 뿐이다. 대사도 거의 없으며 특별한 사건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사운드를 통해 인물들이 차지한 공간의 분위기를 그리려 한다. 그리고 그 사운드 연출이 ‘청각 매체’로서 영화가 갖는 특징을 부각시키며 흥미로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런 연출이 특히 도드라지는 건 1부이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방 안의 작은 소리들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린다는 걸 알 수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앰비언트 사운드 ambient sound를 증폭시켰고, 관객은 인물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들이 비닐을 만지면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로 날아들고, 침대에 앉으면 매트리스의 스프링 소리가 대사보다 더 크게 들리는 식이다. 그 결과 시각적으로는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화면에서 풍부한 청각 정보가 발생하여 관객들이 영화 속 공간을 생생하고 가깝게 느끼도록 만든다.





나아가 감독은 단지 배경 소음을 증폭시키는 것 뿐 아니라 소리의 ‘채널’을 겹치게 한다. 화면 안에 여러 개의 청점 point of listening 을 배치하는 것이다. 여자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남자는 음악 작업을 하는 장면을 보자. 이때 카메라는 방 안에 있지만 관객은 바깥의 비와 바람 소리를 뚜렷이 들을 수 있다. 또한 남자의 헤드폰에서 들리는 음악과 여자가 보는 영화의 대사 소리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실제로는 다른 층위의 세 가지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긴 밤>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시각 공간에 세 개의 청각 공간이 공존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작은 방은 과잉의 청각적 기호로 가득 차고, 일상의 평범한 공간은 비디제시스적 공간으로 바뀌고 만다.


그런 맥락에서 <긴 밤>의 1부를 ‘듣는 영화’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비록 2부가 1부의 독특함을 이어나가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지만 <긴 밤>은 영화가 시각 매체일 뿐 아니라 청각 매체이기도 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새삼스레 알려준다. 그리고 그 특성을 이용해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던 일상의 공간을 조금은 낯설게 감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