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특별 섹션

예술을 통해 교감했던 아름다운 부부,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는 60년대 소비에트 영화계의 해빙기(1957~67년 사이를 말하며 소비에트 예술계에 자유가 꽃핀 시기)에 뉴웨이브를 주도하던 매우 주목받는 부부 영화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거장 감독인 알렉산더 도브첸코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라리사 셰피트코는 장편 데뷔작 <날개>(1966)로 단숨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풍경과 인간의 얼굴을 담아내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러나 4편의 장편영화만을 남긴 채, 그녀는 1979년에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 클리모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며, 러시아 영화계에 있어서도 더 없이 큰 손실이었다. 이후 엘렘 클리모프는 아내를 추모하는 단편 <라리사>(1980)를 만들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기획했던 영화를 이어받아 <안녕>(1983)을 완성한다. 그의 대표작 <컴 앤 씨>(1985)는 분명 아내의 영화 <고양>(1977)의 세계와 공유하는 지점, 그녀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사별 후에도 그들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모프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혼재되어 있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시적리얼리즘의 거장이라 불렸다. 1980년대 중반 클리모프는 67년 이후로 강한 검열로 억압받던 영화계의 개방을 주도했고, 그동안의 금지작들이 공개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황제에 대한 동정적 묘사 때문에 금지되었던 클리모프의 <아고니>(1981)도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뒤늦게 대중에게 공개된 사례다. 이 영화는 198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기억을 승화시키고 다시 날아오르는 그녀의 비행, <날개>


라리사 셰피트코의 <날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 여성(학교 교장)인 나쟈가 느끼는 삶의 무상감과 고독을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포커스 아웃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곧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면 그것이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숏은 사실은 여주인공 나쟈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외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부에 갇혀있듯이, 그녀의 삶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갇혀있는 것이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박물관 원장도, 딸과의 소통 불능도, 학교의 문제아 소년과의 충돌도 그녀의 삶에 커다란 파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녀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갑자기 확 비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시점으로 구성된 숏은 보도바닥을 비추다가 서서히 상승해 하늘로 향하고, 전쟁 당시 영웅적인 파일럿이었던 나쟈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챠와의 추억의 단편들을 담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녀의 모든 슬픔은 그 남자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움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프로펠러를 작동시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에의 기억과 그 사람을 상실했던 슬픔과 온전히 조우하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행. 분출하는 삶의 열망. 영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 열망을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 <고양>과 <컴 앤 씨>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과 엘렘 클리모프의 <컴 앤 씨>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러시아의 작은 마을의 저항군과 민중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극한의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는가, 어디까지 버티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해 사고한다.

<고양>의 세계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속의 저항군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신체로 다가오는 즉각적인 고통, 먹을 것이 없는 사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계는 또한 경계가 무화된 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특정 지역 벨로루시라는 장소는 하얀 눈과 함께 비워지고, ‘어떤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성찰로 확장된다. 또한 눈 덮인 대지는 무언가 영적인 것이 깃든,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일컬었던 말을 빌리자면, ‘백색의 형이상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형을 이룬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밀고자가 되는 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독협력자인 러시아 고문기술자.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여준다. 모든 감정은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이 처한 극한적 상황은 순교가 더 인간적인지 밀고가 더 인간적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얀 대지는 신음한다. 이 고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컴 앤 씨>는 <고양>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어받아, 거기에 역사적 리얼리티를 가미한다. 이 영화는 ‘비엘로 러시아’ 마을의 민간인 628명이 독일군에 의해 불에 타 죽은 실제 역사를 재현한다. 저항군에 가입하려다가 쫓겨난 어린 소년은 마을 주변을 떠돌며 이 모든 사건들을 본다. 카메라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들을 탐사하고 바라보는 증인의 눈처럼 움직여간다. 영화의 배경은 리얼리티에 입각해 있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인 기묘한 느낌이 배어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을 사람 전체를 밀폐된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동안 보여준다. 카메라는 창고 내부에서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창고를 둘러싸고 하나의 축제처럼 즐기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어쩌면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과 눈동자를 본다. 소년이 겪는 극도의 공포감과 충격은 얼굴의 손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 학살의 축제가 끝날 때쯤이면 소년의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어낼 수 없을 법한 극한의 고통의 흔적이 소년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 인간의 얼굴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정을 놀랍게 묘사하는 면에서 셰피트코의 <고양>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소년은 물가에 잠긴 히틀러의 포스터에 총을 쏘기 시작한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거꾸로 돌아가는 뉴스릴의 영상이 몽타주 된다. 마치 역사를 되돌리고 싶다는 듯이. 역행하던 독일의 역사는 종국에는 히틀러라고 생각되는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자 소년은 아이의 얼굴을 향해서는 더 이상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앞서 독일의 파시스트는 “아이들이 있으면 다시 되살아난다. 너희들은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고, 소년은 이 말을 들었다. 아이를 향해서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 소년의 내면이 선택한 최후의 인간성일까. 이는 소년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역사를 홀로 마주했던 순간이다. 소년은 군대의 행렬에 합류하면서 다시 집단의 일원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그 행렬에서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행렬을 비추고 멈춰 선다. 그렇게 그 고통의 기억을, 오욕의 역사를 떠나보낸다.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재현하는 <아고니>

엘렘 클리모프의 <아고니>는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면서 제정정치가 끝나는, 20세기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일촉즉발 위기의 임계점에 처한 러시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릴 필름을 활용하며,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자막을 통해 이름과 직책을 소개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매우 정밀하게 표현한다. 황실의 무너짐의 중심에는 로마노프 왕족의 최후의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유약함과 황실 깊숙이 침투해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남자 라스퓨틴의 광기가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각료들로부터 혁명의 경과에 대해 보고받던 황제가 현실에서 도피하듯 회의실을 벗어나 비밀 통로로 보이는 복도를 지나 황후의 내실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라스퓨틴은 종교적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고 황후는 그를 숭배하듯 떠받든다. 황제는 거기서도 도피하여 사진현상실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라스퓨틴은 성자이자 예언자로서의 모습, 광인으로서의 모습, 현명한 책략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성은 점점 그가 성인인가 광인인가에서,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사회가 벌이는 행동과 인간성의 문제로 옮겨간다.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은 도저히 매워질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클리모프는 이 거대한 틈새를 흑백의 기록용 뉴스릴 영상과 컬러로 재현된 영상(픽션)의 몽타주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의 비극적 역사(전쟁, 폭동, 기아로 비롯된 고통)가 기록된 영상과 황실 내부의 동화적 공간에서 라스퓨틴이 이상한 향락의 쇼들을 벌이는 장면이 충돌하면서, 러시아 황실이 왜 무너졌으며, 왜 무너져야만 했는지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라스퓨틴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포한 영적인 면모에 대한 흥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황실과 라스퓨틴이 무너져 내릴수록, 흑백으로 표현되는 초현실적인 재현된 이미지가 다수 등장하면서, 컬러와 흑백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기록된 영상과 재현된 영상이 혼재되면서,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의 틈새도 좁혀진다. 즉 황실이 무너지고, 나라는 민중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변혁을 표상하는 영화적인 방식의 하나의 훌륭한 사례로 남아있다. (박영석)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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