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4. 15:40ㆍ회고전/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특별 섹션
예술을 통해 교감했던 아름다운 부부,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는 60년대 소비에트 영화계의 해빙기(1957~67년 사이를 말하며 소비에트 예술계에 자유가 꽃핀 시기)에 뉴웨이브를 주도하던 매우 주목받는 부부 영화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거장 감독인 알렉산더 도브첸코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라리사 셰피트코는 장편 데뷔작 <날개>(1966)로 단숨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풍경과 인간의 얼굴을 담아내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러나 4편의 장편영화만을 남긴 채, 그녀는 1979년에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 클리모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며, 러시아 영화계에 있어서도 더 없이 큰 손실이었다. 이후 엘렘 클리모프는 아내를 추모하는 단편 <라리사>(1980)를 만들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기획했던 영화를 이어받아 <안녕>(1983)을 완성한다. 그의 대표작 <컴 앤 씨>(1985)는 분명 아내의 영화 <고양>(1977)의 세계와 공유하는 지점, 그녀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사별 후에도 그들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모프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혼재되어 있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시적리얼리즘의 거장이라 불렸다. 1980년대 중반 클리모프는 67년 이후로 강한 검열로 억압받던 영화계의 개방을 주도했고, 그동안의 금지작들이 공개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황제에 대한 동정적 묘사 때문에 금지되었던 클리모프의 <아고니>(1981)도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뒤늦게 대중에게 공개된 사례다. 이 영화는 198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기억을 승화시키고 다시 날아오르는 그녀의 비행, <날개>
라리사 셰피트코의 <날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 여성(학교 교장)인 나쟈가 느끼는 삶의 무상감과 고독을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포커스 아웃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곧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면 그것이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숏은 사실은 여주인공 나쟈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외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부에 갇혀있듯이, 그녀의 삶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갇혀있는 것이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박물관 원장도, 딸과의 소통 불능도, 학교의 문제아 소년과의 충돌도 그녀의 삶에 커다란 파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녀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갑자기 확 비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시점으로 구성된 숏은 보도바닥을 비추다가 서서히 상승해 하늘로 향하고, 전쟁 당시 영웅적인 파일럿이었던 나쟈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챠와의 추억의 단편들을 담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녀의 모든 슬픔은 그 남자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움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프로펠러를 작동시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에의 기억과 그 사람을 상실했던 슬픔과 온전히 조우하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행. 분출하는 삶의 열망. 영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 열망을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 <고양>과 <컴 앤 씨>
<고양>의 세계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속의 저항군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신체로 다가오는 즉각적인 고통, 먹을 것이 없는 사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계는 또한 경계가 무화된 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특정 지역 벨로루시라는 장소는 하얀 눈과 함께 비워지고, ‘어떤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성찰로 확장된다. 또한 눈 덮인 대지는 무언가 영적인 것이 깃든,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일컬었던 말을 빌리자면, ‘백색의 형이상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형을 이룬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밀고자가 되는 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독협력자인 러시아 고문기술자.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여준다. 모든 감정은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이 처한 극한적 상황은 순교가 더 인간적인지 밀고가 더 인간적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얀 대지는 신음한다. 이 고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재현하는 <아고니>
'회고전 >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짐과 저항: 인간의 삶과 기억에 관한 물음 (0) | 2010.05.12 |
---|---|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 (0) | 2010.05.07 |
러시아 전쟁영화의 서정성 (0) | 2010.05.07 |
해빙기 러시아 전쟁영화의 걸작이 찾아온다! (0) | 2010.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