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렘 클리모프의 <안녕>

영화가 시작되면, 시커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들이 하나 둘 드러나다가 이어 카메라가 수직으로 빠르게 상승하면서 반짝임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 어둠 속에 잠긴 강물에서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안개 속에서 다섯 명의 이방인들이 마쪼라섬으로 들어오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 빛은 마치 마쪼라섬의 영혼인 듯 느껴진다. 영화는 사라져버린 마쪼라섬의 영혼이 스러져가고 저항해 온 과정을 느리고 긴 장송곡처럼 그린다. 영화 <안녕>은 그렇게 사실적이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이미지들 하나하나가 풍부한 감성과 삶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 이미지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 마쪼라섬의 장엄하고 신비로운 자연풍광은 인간의 말이나 행동보다도 더 강렬하게 삶과 죽음에 대해 보여준다. 극한적이고 힘든 상황에서도 인간성의 고양을 끈질기게 추구하려는 인물들의 태도는 얼굴과 눈동자의 클로즈업을 통해 끊임없이 부각된다.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은 섬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아름다운 초록 풍경들과 그 풍경 속에 어우러진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마치 축제와도 같이 그린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다



브레즈네프 시대 때 대표적인 농촌문학가인 발렌찐 라스푸찐의 <마쪼라의 이별>(1976)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라리사 셰피트코 감독이 각본을 쓰고 기획했던 영화다. 그녀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자 남편인 엘렘 클리모프 감독이 이어받아 완성했다. 영화는 두 감독의 미학적 스타일이 녹아들어가 인간에 대한 물음을 보다 끈질기고 강력하게 제기한다. 1부에서 마을 사람들 일상의 모습과 생동적인 순간들을, 2부에서는 생동하는 삶이 결국 서서히 스러져가는 모습, 그리고 끝까지 섬에 남아 죽음을 맞이하려는 듯한 태도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가장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는 다르야의 섬과 삶에 대한 태도를 주목할 만하다. 마을의 흔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묘지를 청소하려고 파헤쳤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다르야가 섬의 수몰을 걱정할 때는 항상 묘지를 걱정하고 돌본다. 그녀는 삶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 섬의 역사를 기억하려 한다. 다르야는 묘지가 파헤쳐진 후에 숲을 돌아본다.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르야는 ‘대자연의 어머니’를 계속 중얼거리며 숲속을 걸어 다닌다. 그리고 숲과 땅, 샘과 풀을 만지면서 기도한다. 태양을 향해서는 낯선 자들을 쫓아달라고 기도한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대지와 가장 가까이 호흡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르야가 묘지를 옮겨가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TV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들인 파벨에게 이야기할 때 나오는 TV장면은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그 우주선에서 비춘 지구의 모습이다. 또한 손자에게 말할 때는 춤을 추며 노래하는 여자가수가 오랫동안 비춰진다.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마을 모습의 생경함만큼이나 지구 밖의 우주와 지구상의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한 마쪼라섬의 대지에 묻힌 영혼과의 거리가 느껴진다. 또한, 기술의 발전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다르야 노인의 삶이 대비된다. 이러한 거리감과 간극은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다르야는 섬이 수몰되기 전까지 결국 끝까지 섬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묘지를 찾아간다. 거기서 그녀는 부모님이나 신의 목소리가 빙의된 듯,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다. 기억 없는 사람에겐 인생이 없다.” 그리고 지켜보는 일꾼들을 향해 “너희들은 너무 많은 걸 원한다. 너의 길을 끝까지 가거라. 살게 될 것이다”라고.

섬이 사라짐에 대한 저항

영화에서 섬의 수몰을 둘러싸고 보여지는 것은 인물들 간의 갈등이 아니라 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저항들이다. 섬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대왕나무)의 끈질긴 저항이 우리를 압도한다. 섬을 상징하는 이 나무는 영화에서 끝까지 섬의 파괴에 대해 저항하며,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과 섬이 안개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며 영화가 끝나갈 때 파란 가지를 드러낸다. 한편, 작은 저항의 모습은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제스처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맨 처음에 마을을 떠나는 여인은 집에서 나오는 걸 주저하면서 기르던 고양이를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돌보던 소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이 떠나자 갑자기 집밖에 쌓아둔 장작이 떨어지며 사람들이 이를 쳐다본다. 또한 마을의 집이 불태워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마을을 떠나는 또 다른 마을 주민은 집을 불태우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는 결국 엉뚱하게 장화에 불이 붙어서 집을 불태우고는 절뚝거리며 한 개의 장화를 신은 채로 걸어 나간다. 페트르카는 마을의 주정뱅이로 사람들이 있는 곳엔 언제나 나타나서 아코디언을 켠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는 기이한 행동들을 하고, 그가 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쪼라의 사라짐에 대해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한다. 섬의 수몰을 둘러싼 두 인물의 대비되는 태도는 인생에 대한 서로 다른 두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마을의 수몰문제를 총 관리하고 있는 보론조프는 다르야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저항할 때마다 인간답게 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중간에 마을을 불태우는 일을 그만두려는 다르야의 아들 파벨에게도 인간의 특권을 믿으라고,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마쪼라섬이 수몰되어 수력발전소가 세워지고 있는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 믿는다. 섬이 사라진다는 것은 섬에서의 삶(과 그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섬에서의 삶의 기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마쪼라섬이 안개 속에서 드러난 이후에 가장 먼저 보여지는 이미지는 아름답고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차 주전자인 사모바 주전자다. 사모바 주전자는 마쪼라 섬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물건이다. 그들은 고단한 삶에서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삶의 애환과 기쁨을 함께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모바 주전자는 여러 차례 클로즈업된다. 집을 떠날 때 한 여인은 이 주전자를 소중히 챙겨서 가며, 집이 불태워졌을 때 또 다른 여인은 폐허더미 속에서 이 찌그러진 이 주전자만큼은 고이 챙겨 나온다. 영화초반의 이 장면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말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차 주전자와 찻잔, 식탁위의 물건들이 번갈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물들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동등하게 마쪼라섬의 삶의 기억에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소극적인 저항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을 구성했던 집안의 일부인 이런 가재도구들마저도 섬의 사라짐에 저항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
섬의 파괴와 대비

이러한 저항의 모습 외에 영화 속에서 가장 평화롭고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두 장면도 인상 깊다. 하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건초를 베는 농촌의 공동체 문화를 보여줄 때고, 다른 하나는 라디오 소리에 맞춰 온 마을 사람들이 흥겹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출 때다. 이 장면을 보면 과연 이 섬이 정말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고 흥겨운 일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이어지게 될 섬의 파괴와 대비되면서 슬프고 아픈 느낌을 더 강조하게 되는 듯하다. 수몰이 예정되어 있고, 이제 곧 떠나야 하지만, 건초작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온다. 이 섬의 가장 아름다운 초록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아리따운 여인의 구성지고 신비로운 노랫소리가 한 동안 울려 퍼진다. 특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영화에서 카메라의 역동성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장면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춤추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밀착하여 보여준다. 춤의 속도와 리듬이 점점 더 빨라짐에 따라 카메라도 동시에 더 빠르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이들과 함께 즐기고 호흡하면서 집단적 문화와 그 문화의 흥겨움을 더 잘 보여주는 듯하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은 바닷가로 뛰쳐 가서 수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페트르카의 집이 불타고 마을은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지면서 불꽃같던 축제도 이제 끝나게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을의 백발영감의 슬픈 눈길이 클로즈업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축제를 즐길 수 없고, 집은 불태워질 것이며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론조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수몰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통보한다. 소년을 제외한 아이들은 “마쪼라 잘있어”를 외치면서 떠난다. 작별 인사가 화면 가득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배는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신음 소리 같고 장송곡 같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섬과 섬에 남은 사람들의 끈질기고 조용한 저항이 보여진다. 사람들은 거의 다 마을을 떠나고 대부분의 집들은 불태워진다. 지게차와 사투를 벌이던 대왕나무는 급기야 밧줄을 끊어버리며, 지게차가 돌진해 와도 끄떡하지 않는다. 결국 다른 집들처럼 불에 태워지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벨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보론조프와 페트르카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을에서는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면서 삶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다르야는 “누가 말거는 느낌을 느낀 적이 있느냐”며 “바로 여기서 누가 물어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노인은 자신이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말에 다르야는 “지금 사는 사람은 자네가 아닐지도 몰라. 나도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들이 하는 말은 과연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삶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이제, 결국 마을을 떠나야 하는(혹은 남아서 죽게 되는) 다르야는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어 왔던 자신이 살던 집을 깨끗이 청소한다. 카메라는 다르야가 의식을 치루듯 집안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커튼을 달고 마지막에 꽃으로 장식하는 장면까지를 길고도 상세하게 보여준다. 청소하는 다르야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리고 물을 퍼다주고 나중에 꽃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 모두 죽음 직전의 이 성스럽고 신비로운 의식에 함께 참여한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햇살과 창문이 닫히면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실내공간은 이 의식의 그러한 느낌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특히, 마지막에 비쳐지는 식탁에 놓인 꽃병은 영화초반의 사모바 주전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다르야는 불태워지는 집을 슬프게 응시하고 혼자서 풀숲을 걸어간다. 마지막 남은 이 집이 불태워지는 것은 마을의 소멸이자 섬의 소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르야가 풀숲을 걸어갈 때 순간적으로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은 영화의 시작에서 어둠속에서 반짝이던 빛을 연상시킨다. 여기서부터 이미 마쪼라는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후에 전개되는 영화 속 장면들은 그야말로 죽음 이후의 마쪼라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수륙양용차의 기이한 등장은 마쪼라 섬이 유령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파벨과 일행이 타고 온 배가 안개로 인해 강에서 길을 잃는 것은 마쪼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조용하고 느리게 전개되던 영화는 마치 장송곡의 클라이막스인듯 수륙양용차의 경보음과 바지선의 경보음, 그리고 마쪼라를 찾으며 울부짖는 페트르카의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바지선에 걸린 기이한 잠수복은 유령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마쪼라섬을 수평으로 길게 보여준 후 안개 속에 떠 있는 듯한 대왕나무의 가지 끝을 비춘다. 자신이 살던 터가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결국 떠나지 않고 남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죽음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삶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고 강력하게 질문하는 듯하다. (김수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