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영화 특별전 상영작 리뷰]




<크림슨 피크>가 성취한 야심

- 길예르모 델 토로의 <크림슨 피크>



영화의 표제로 등장한 ‘크림슨 피크’는 영화의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저택의 이름이다. 이 저택은 웅장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관객의 눈을 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거의 ‘폐가’라 불러도 좋을 만큼 방치된 채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며 불길한 기운을 뿜어낸다. 오프닝에 귀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앞부분은 주인공인 이디스가 어딘가 수상쩍고 불길한 기운을 가진 남자 토마스를 만나 피워내는 로맨스였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크림슨 피크가 화면에 등장한 이후, 영화의 후반부는 말하자면 일종의 ‘모험담’에 가깝다. 구석구석마다 비밀의 사연과 미스테리, 광기를 품고 있는 저택 안에서 이디스는 연달아 이상하고 공포스러운 일들을 겪는다. 결국 그녀는 집안 곳곳을 ‘탐험’하고 탐색하면서 비밀을 밝혀 나간다.


어릴 적 어머니의 유령과 만난 적 있던 이디스는 크림슨 피크에서 더 많은 유령들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공포스러운 존재였던 그 유령들이 실은 말을 하고자 하지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이미 한참 시간이 지나서다. 육체를 입지 못한 - 정확히 말하자면 빼앗긴 - 그들의 말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며, 그들의 존재는 쉬이 목격되지도, 감지되지도 못한다. 이디스가 이들을 보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어릴 적 어머니의 유령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디스가 ‘작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말들을 언어로 풀어내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작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저 지망생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성 작가를 대하는 당시 시대의 한계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한계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존재의 메시지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수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령을 만났던 경험을 그저 공포스러운 트라우마로, 해독할 수 없는 비밀로 삼는 데에 그친다. 어머니의 유령을 만났던 것만 기억할 뿐 그 유령이 전하고자 한 경고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녀가 그 경고의 내용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은 그녀가 이미 크림슨 피크에 도착한 후 어머니의 유령이 다시 나타나 같은 경고를 반복해주고 난 다음이다. 그녀는 그제야 유령의 메시지를 수신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해독할 수 없다.





그녀는 토마스와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주아의 계급을 탈출하지만, 근친상간을 통해 배타적으로 유지되는 귀족 계급으로는 편입되지 못한다. 계급 바깥의 존재가 되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말을 하고자 하나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 즉 유령들의 메시지를 수신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유령은 더 이상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위험을 미리 경고한 고마운 대상으로 해석된다. 그녀가 공포를 극복한 순간, 집안 곳곳에서 맞추쳤던 유령들은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 그녀에게 제대로 된 방향과 정보를, 진실을 알려주는 조력자들이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서의 귀족을 모두 처단한 후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소설을 완성시킨다.


화려한 세트와 의상, 소품은 물론 이야기의 기본 플롯을 통해 19세기 고딕 호러소설의 분위기와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크림슨 피크>는, 이디스라는 주인공을 통해 결국 한 여성이 진정한 고딕 호러 작가가 되는 여정을 그려냈다고도 볼 수 있다. 애초 이디스 워튼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가진 이디스는 영화 “제인 오스틴이 되기보다 메리 셸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그녀의 결혼을 보채며 그녀의 글쓰기를 비웃는 주변인들에 우아한 방어로 던진 말이었지만, 이디스의 문학적 관심 역시 로맨스 소설보다 유령 이야기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는 메리 셸리가 창조해낸 존재가 다름 아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으며, 그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고딕 호러의 튼튼한 기반이 된 작품임을 알고 있다. 그런 그녀는 영화의 후반, 마치 ‘푸른 수염’ 민담 속 여주인공처럼 금지된 저택의 방들을 누비고 다닌다. 그녀는 샬롯 퍼킨스 길먼의 『노란 벽지』 속 여주인공들처럼 보이는 유령들을 만나 그들의 메시지를 듣는다. 그리고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속 로체스터 부인이 드러내는 것 같은 섬뜩한 광기와 싸운다.


<크림슨 피크>는 또 한 편의 화려한 호러 영화를 추가하거나 고딕 호러에 헌사를 바치는 소박한 소망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고딕 호러와 여성 작가들 및 페미니즘이 맺어온 상관관계에 대한 그간의 비평적 해석과 연구를 총화하여 다시 서사화하고, 이를 통해 메타적, 혹은 비평적 창작물로서 경지를 획득하고자 거대한 야심을 가진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는 쉽지 않은 이 야심의 실현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김숙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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