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가를 만나다

“승철이가 봤을 때 부끄럽지 않게 찍고 싶었다”

[작가를 만나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

지난 5월 21일 ‘작가를 만나다’ 프로그램으로 <무산일기>이 상영된 후, 영화를 만든 박정범 감독과 강은진, 진용욱 배우, 그리고 신동일 감독이 함께 하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새롭게 개편된 '작가를 만나다' 행사의 일환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만큼이나 묵직하면서도 뜨겁게 진행된 이야기들을 여기에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 '작가를 만나다'는 최대 규모의 패널이 참여하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만큼 <무산일기>가 올해 큰 화제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가 인간 간의 관계들을 굉장히 날카롭게 다루고 있어서 먹먹한 느낌이 들고 보기에 힘겨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박정범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만든 계기를 듣고 싶다.
박정범(영화감독): 전승철이라는 친구는 대학교 후배다. 2006년에서 2008년까지 위암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이창동 감독의 <시> 조감독을 하다가 그 친구의 유언과 같은 글을 보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감독님이 시나리오 쓰실 때 4개월 정도 휴가를 주셔서 그 때 이 영화를 촬영하게 됐고, <시> 개봉 후에 이 영화의 후반 작업을 했다.

김성욱:
강은진 씨의 경우 여러 목소리의 다채로운 면모를 들려줬다. 일상적인 소재는 아닌 거 같은데 영화에 참여하면서 어떠셨는지?
강은진(영화배우): 처음에 프로필을 보내서 시놉시스를 받아봤는데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꼭 하고 싶었다. 1, 2차에 걸쳐 오디션을 봤다. 나중에 후일담으로 감독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왠지 교회에 다닐 것 같고 평범하면서 이웃집 교회 누나 같은 면을 보셨다고 한다. (웃음) 개봉도 하고 관객 분들도 만나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 모호한 인물이고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감독님이 던져주신 것들에 대해 많이 고민하며 찍었다.

김성욱: 진용욱 씨가 연기한 경철은 승철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갈등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처음 캐스팅 제의를 받으면서, 어떤 행동들을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진용욱(영화배우): 처음 오디션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아 경철이가 왔구나' 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영화라기보다는 연극을 하나 출연한 듯한 느낌이었다. 사투리 연습, 경철이 연습을 많이 했다. 좀 더 자본주의를 좋아하고 만끽하는 인물이다.

신동일(영화감독):
영화의 첫 장면부터 너무 마음에 와 닿았고, 마지막 끝날 때까지 동지를 만난 느낌에 반가웠다. 한국사회를 내밀하고 사실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근래에 본 적이 없어서 너무 반가웠다. 보면 볼수록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여러 층위를 가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장면의 미장센을 정교하게 담으려는 노력이 있다. 나랑 비슷하면서 다르다고 느낀 점은, 내가 인간의 낙천적인 에너지, 유대의 힘에 주목한다면 박 감독님은 악한 면이나 집요한 면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김성욱:
탈북자 이야기라는 설정 자체가 예외적이지만, 영화에서 어떤 정도의 보편성을 보여준 것 같다. 하층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보편성을 보여줬고, 어느 정도는 극적인 작법과 서사적인 특징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박정범: 어떤 목적의식보다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무조건 찍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승철이가 봤을 때 부끄럽지 않게 찍자는 게 목표였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며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서, 내가 이 영화를 찍을 때 상당히 분노에 차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스스로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느꼈던 부분들, 승철이를 돌봐주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는 거다. 액션 장면도 정말로 맞았다. 좀 더 균형감 있는 상태였다면 조금은 다른 캐릭터들도 있었을 것이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탈북자 캐릭터도 들어오고. 지금처럼 여러 인물들을 너무 한 쪽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부분은 반성하고 있다. (웃음)

신동일:
애정을 가지는 후배라서 작품에 대해 쓴 소리를 좀 하고 싶었는데 쓴 소리 할 부분을 찾기 힘든 영화다. 인상적인 것은 승철에게 핀잔을 주던 형사를 목사님이 이끌고 가는 장면이다. 감독이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는 시선이 매우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컷에서 수경이가 "우리 교회친구 하자"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감동도 받고 인물을 잘 다뤘다는 생각을 했다. 수경이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진심을 갖고 다가왔다는 느낌이 있었다. 또한 영화에 의외로 코미디 적 감각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씁쓸한 웃음을 동반한, 드라마적 흐름상 낙관적 기운이 흐르다가 다시 부정적으로 흐르는, 그런 흐름을 타는 유머들이 있더라. 노래방 도우미들과 신나게 성가를 합창하는 장면이라든지, 수경을 집에 바래다주려고 하는데 퇴짜를 받는 부분에서. 오늘 보면서 느낀 건, 성가대에서 승철을 환영하고 승철이 노래를 부르고 카메라가 다가서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린 상상을 부여하는 힘 있는 숏의 종결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박정범: 도빌 영화제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개를 왜 죽였냐고 묻더라. 그래서 역시 프랑스는 애견국가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영화적 내러티브를 볼 때 성가대에서 끝나는 것이 가장 절묘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했다는 말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의도적 연출이자 관객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성가대에서 끝내려고 하기도 했다. 영화적이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찍은 장면이 바로 엔딩이다. 그 개를 바라보는 롱테이크를 찍음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반성문의 종결을 찍은 것이다.

김성욱: 어떤 점에서 저런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거처가 교회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박정범: 중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 학교 다닐 때 도둑질도 하고 싸움도 하는 나쁜 학생이었는데, 주말에 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잘했다고 칭찬하더라. '나는 이렇게 가면을 쓰는데 왜 사람들은 모르지?'라며 이상해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수경 같은 인물들이 이중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종교가 가지는 변하지 않는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난 속에서 자신을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캐릭터의 통일성에 대한 첫 번째 원칙은 전적으로 악하거나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매 순간 선함과 악함이 충돌하는 것. 승철도 그렇게 생각된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와서 남한에서 인생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순수하게 소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자꾸 구석으로 몰림으로써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김성욱:
수경이라는 캐릭터가 종교성을 가장 많이 내포하는데, 이 인물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면모들이 있다. 특히 노래방에서 승철에게 잠깐 나오라고 해서 이야기를 할 때가 그러하다.
강은진: 감독님이 수경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진 않았지만, 이중적이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될까?' 라는 지점도 많았다. 사람이 이중적이라도 해도, 내가 이중적이라고 의식하고 살진 않지 않나.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세상을 밝게 살아가고 싶은 믿음을 가진 여자다. 현실에서는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이유로 도우미가 있는 노래방에서 일을 하는데, 수경이라는 여자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뇌를 했을까 싶었다. 탈북자라는 상황을 모르는 수경의 입장에서는 승철이 너무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승철을 봤을 때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스물 스물 다가와서 놀란 거다. 수경이 신성시하는 성가를 도우미들하고 노래를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 거다. 그 순간에 수경은 자기 현실에 대한 연민이 커졌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 사람을 교회친구로 받아들임으로써 내 죄의식을 덜고 조금 가볍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다. 현실을 사는 수경의 입장에서는 그게 진심이었고 솔직한 모습이었다.

김성욱: 연기를 하실 때 굉장히 몰입도가 높았을 것 같다.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 주연을 할 때,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경우는 자기의 인형을 세워놓고 카메라 내부와 외부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영화에는 승철이 대부분 등장하지만, 등장하지 않는 몇 장면이 있다. 허슬러 잡지를 보며 티비를 보는 탈북자들의 장면 같은 경우. 전체적인 밸런스가 안 맞는, 빗겨나가서 찍은 듯한 느낌이 든다.
박정범: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개인적인 시점을 따라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몇 번 깨지는 순간들이 있다. 극에서 정보 전달이 필요하거나, 그들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의 이야기를 빌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장면들이다. 연기를 직접 한 것 때문에 스텝이나 배우 분들에게 매우 죄송하다. 찍고 나서 다시 모니터링을 해야 해서 시간이 두 배로 소요됐다. 직접 연기하면서 장점이 있었다면, 내 외모가 상대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것 같더라. 저 사람도 배우를 하느냐며. 실제 탈북자인지 알았다는 사람도 있고 촬영 중에 졸거나 코를 고는 분도 있었다. 사천교 다리에서 싸우는 장면 찍을 때도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더라. 길거리 장면을 찍을 때 언제나 존재감이 없었다.


김성욱: 올해 굉장히 화제가 많이 됐던 중요한 작품이다. 마지막 말씀들을 듣고 싶다.
진용욱: 많이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린다. 좋은 작품 만든 것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작품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강은진: 연기자로서 아직 가야될 길이 많은 것 같다. 또 다른 자리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뵙게 된다면 참 감사할 것 같다. 많은 대중들이 사랑할 만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관객 분들이 다른 무언가를 느끼거나 같이 공감했으면 좋겠다.
신동일: 소중한 신인 작가가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정당한 평가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무산일기>이지만, 나는 이 감독의 차기작이 진심으로 궁금하다. 앞으로 날카로운 시선과 묵직함은 유지하되, 좀 더 유머러스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지닌 작품을 만드시면 좋겠고 기대하고 응원하겠다.
박정범: 이렇게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외국도 나가고 할 줄 몰랐다. 이런 과정이 있는 것은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같이하는 분들이게 보답이 되면 좋겠다.

정리: 박영석(관객 에디터) | 사진: 임유정(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