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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나의 경험, 생각, 취향들을 가득 채워나간 영화다”

[작가를 만나다]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

지난 12월 18일 열린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이재용 감독을 만나보고 개봉 10주년을 맞는 <순애보>(2000)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2010년의 마지막에 만난 작가 이재용 감독은 데뷔작 <정사>(1998)를 통해 성공적으로 충무로에 안착했고, 두 번째 연출작 <순애보> 역시 이재용 감독 특유의 절제된 연출과 깔끔한 묘사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순애보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12월의 작가를 만나다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로 <순애보>가 개봉한지 10주년이 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다시 보니, 부분 부분 기억나는 장면들도 있고, 이런 장면이 있었나 싶은 장면들, 새롭게 느껴지는 장면이 많았다. 데뷔작인 <정사>를 만든 후에 이 영화를 만드시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영화의 원안자는 구본환 씨로 되어 있고, 시나리오는 감독님이 쓰셨는데, 영화의 원안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이재용(영화감독):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서, 다음 영화를 구상하던 중에 사실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예산이나 준비 면에 있어서 <스캔들>을 두 번째 작품으로 하기에는 버거운 면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구본환 프로듀서가 제안을 했었다. 그 때는 아주 간단한 몇 줄짜리의 시놉시스였다. 동사무소 직원인 한 남자와 재수생인 한 여학생이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알다가 어느 곳에서 우연히 스쳐간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간단한 줄거리 정도를 그 분이 제안을 했었고, 그 때부터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김성욱: 주인공의 이름이 각각 ‘우인’과 ‘아야’이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보았을 때 ‘우인’이라는 이름에서 어리석은 인간 혹은 우연한 인연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아야’라는 이름은 지하철 장면에서 ‘아야’하는 고통소리와 함께 환기되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름을 그런 점에서 특별하게 설정하신건지 궁금하다.
이재용: 사실 <정사>의 남자주인공의 이름이 ‘우인’이었다. 이정재시가 다시 ‘우인’을 맡게 된 셈이다. 그 이름이 주는 어감이나 말씀하신 우연과 인연에 대해 연상 작용을 하는 단어여서 좋아했다. ‘아야’라는 이름은 귀여우면서 일본적인 이름을 제안했던 원안자의 의견이 반영된 것 같다. 말씀하신 장면은 이름을 가지고 말장난처럼 만든 건데, 인물의 이름이 달랐다면 그런 장면은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김성욱: 설명이 많이 절제되어 있는 영화란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은 그 이유가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는다. 숨을 참고 자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집안의 문제나 하는 것들을 연상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그러한 설정들은 어디에서 떠올렸는지.
이재용: 모든 행동들의 이유에 대해서는 영화적으로 얘기하자면 어떤 상징적인 혹은 시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숨을 참고 죽는 다는 것이 정말 엉뚱한 행동이지만 그녀의 의지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한 설정이 재미있다고 생각되었다. 현실적인 논리로 생각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처한 상황,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그 나이의 어떤 심리에서 숨을 참고 죽으려는 시도가 하나의 의식이나 제의처럼 여기는 행위라고 설정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마비됐다는 것에서 일상의 무뎌진 부분, 성적인 억압같은 것들을 상징적인 연상 작용으로 떠올렸다.

김성욱: 영화의 음악 선곡이 재밌게 느껴졌다. 그리고 영화 안에 굉장히 다국적인 성격이 많다. 차이나타운 추진위원회라는 설정이나, 이란인 친구, 텔레비전에서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를 보는 장면, 마지막에 두 남녀가 도착하는 알래스카 등 다국적이고, 다문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재용: 20대에 배낭여행을 길게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아직 여행자율화가 되기 전이었고, 처음 느낀 세계적인 것들에 대한 충격이 있었다. 동시에 아시아적인 아이덴티티, 혹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생겼던 것 같다. 특히 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경도가 있었다. 그래서 <순애보>라는 영화에 아시아적인 것들, 나의 관심사들을 많이 넣고 싶었다. 처음의 세 줄짜리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하기로 마음 먹었던 데에는 짜여진 이야기나 장르적인 것보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열린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성욱:
영화의 구성 자체도 미래로 열려있고, 음악들은 과거의 어떤 시점을 떠올리게 하는 식의 시간상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이재용: 대개 시나리오를 쓸 때 음악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정사>를 쓸 때는 브라질 풍의 음악을 쓰고 싶었고, <순애보>를 하면서는 원래 중동풍의 음악을 쓰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던 부분이 있었다. <정사>나 <순애보>의 선곡들은 개인적인 취향대로 관심있고 한 번 쯤 쓰고 싶었던 음악들을 많이 쓴 편이었다.

김성욱:
영화에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많이 배치되어 있다. 오줌을 누거나 토하거나, 화장실에 숨기도 하고, 그곳에서 무언가 엿보기도 한다. <다세포 소녀>를 보고 나서 다시 이 영화를 보다보니 그런 느낌들이 좀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이재용: 운안의 첫 번째 제목이 ‘유린네이션’이었다. 원안자가 본 인터넷사이트 이름이기도 했고 오줌을 말하기도 한다. 처음 그 제목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화장실이나 포르노사이트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갔고, 무의식 중에 관련된 설정들이 많이 들어갔다.

김성욱: 화장실, 변기, 물, 땀, 오줌, 어항, 알래스카의 얼음과 같이 물의 이미지들이 영화 곳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최종 제목은 <순애보>가 되었는데, 영화 중간에 순애라는 사람을 찾는 남자도 잠깐 나오고, 순애라고 적힌 낙서도 얼핏 등장한다.
이재용: 그런 일종의 말장난들은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재미처럼 만들었다.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사람들이 발견해내게 되는 수수께끼랄까 숨은그림찾기 같은.

관객1: 영화에서 감독님이 특별히 맘에 드시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인지 궁금하다.
이재용: <다세포 소녀>에서 뮤지컬을 시도해봤는데, 개인적으로 뮤지컬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측면이 있다. 뮤지컬이 주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한편 관습적인 면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세포 소녀>의 효시 중의 하나가 이 영화에도 있는 것 같다. 클럽에서 여자들이 춤을 추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 물을 마시는 장면들인데, 그 장면에 쓰인 ‘sky high'라는 노래를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기도 했고, 찍으면서도 신이 나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세 줄짜리의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장면 하나하나들이 좀 더 나다운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관객2:
<순애보>는 오늘 처음 봤다. 일본에서 12년 정도 살다가 얼마전 한국에 들어왔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일본 영화들에서 봐왔거나 살면서 느낀 일본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아 마음에 와 닿았다. 아름답기도 하면서, 현실적이기도 하고, 스타일리시한 부분들이 인상 깊었는데, 당시 감독님이 그리고 싶었던 일본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재용: 일본 문화에 많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기도 했고,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일본에 대해서 그다지 알지 못했고 문화도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한 달 정도 일본에 살아봤고, 두 달 정도 일본어를 배운 게 전부였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촉수가 있다고 느꼈다. 특별히 어떤 리서치를 하지도 않았고, 일본에 오래 살아보거나, 많이 아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곳의 공기를 맛보고, 거리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 느낀 것들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의 일본 가족은 결국 한국인인 제가 본 일본 사람일 텐데, 특별히 일본 가정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부여했다기보다, 한국의 중산층 가정 중에 외향적이지 않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 일본 가정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막연하게 느끼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운 좋게도 그것이 잘 맞아 들어갔던 데에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낯선 땅에서 스태프들도 모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일본어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연기자의 대사를 듣고서 판단을 할 때 말 이전에 통하는 어떤 것들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을 느꼈다. 어떤 면에서는 신비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영화 작업 자체도 굉장히 즐기면서 즐겁게 했던 기억이 난다.



관객3: 영화가 설명이 적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두 인물들과 친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했다. 포르노사이트가 소재가 되었지만 성적인 부분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같다. 조카가 나오는 장면들에 대한 설정도 궁금하다. 옛날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음악들에서 느끼는 옛스런 부분, 북촌의 풍경과 인터넷과 같은 것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 좋았다.
이재용: 영화에 전반적으로 인터넷이나 포르노사이트, 한국과 일본, 알래스카를 오가는 설정에서 현대적이고 모던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저변에 흐르는 일상적이고 복고적인 것들이 주는 대비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고 싶고,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골목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나오는 노래는 50년대 노래이고, 비 오는 장면에서 나왔던 노래는 70년대 노래이다. 그런 정서들이 충돌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뭘까 궁금해했다. 장면의 설정에 대해서 하나하나 의미에 대해선 물론 모두 나름의 의도는 있지만, 그것을 설명을 하기 위해선 내 무의식을 끄집어내어야 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개인적인 느낌에서 많은 것들을 배치했던 것 같다. 그런 장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관객4: 10년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다세포 소녀>를 본 이후에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니 다른 느낌이었다. <다세포 소녀>는 키치적인 이미지들이 많은데 이 영화에서도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 이미지들을 원래 선호하시는 편이신지.
이재용: 영화를 만들 때 두 가지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고전적이고 클래식한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취향과 키치적이고 악취미적인 것을 즐기는 취향 이 두 가지가 항상 함께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생각과 반하는, 이런 것도 영화다라고 하고 싶은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다세포 소녀>와 <순애보>가 일견 만나는 부분이 있다. 나는 홍상수나 허진호 감독처럼 한 길을 가는 느낌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닐 것 같다는 얘길 하곤 한다. 다양한 관심사나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어떤 기회와 당시의 몰두해 있던 것들이 만났을 때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결국은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담긴 영화들을 해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아직 안한 것 같다. 그동안 만든 다섯 편의 영화 모두에 나의 성향이 녹아있다. 그래서 내 영화를 보는 게 스스로 부끄럽다. 나의 유치하거나 속물스러운 부분같은 것들까지도 영화를 통해서 다 보이기 때문이다.


관객5: 다른 공간에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차이를 좁혀가는 점이 인상깊었다. 아야가 수양장에 떠있는 장면과 우인 조카가 욕조에 띄운 인형, 우인이 보는 발리우드 영화와 아야가 만나는 이란사람, 그리고 지하철에서의 비슷한 경험처럼 두 사람은 어떤 공통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좀 다른 면도 존재하는데, 예컨대 아야는 자살을 시도하긴 하지만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이 있다. 우인은 감각이 무뎌져 있는 듯 하고, 관음증적이고 자극적인 감각을 추구하면서도 인터넷과 같은 틈을 통해 자꾸 밖으로 나가려는 면이 있다. 무의식의 방에서 아야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가 하면 우인은 방의 쇼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그친다.
김성욱: 두 인물이 만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교감이 존재하는데, 이 때 장면의 리듬과 연결이 굉장히 힘든 일일 것 같다. 예전에 찍은 사진이라든지 지하철장면처럼 좀 더 인위적이고 설명적인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런 장면이 아니라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감정전이가 굉장히 잘 되어있고 굉장히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쉽지 않은 부분이었을 텐데.
이재용: 이 영화는 탄탄한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저의 경험과 생각들을 취향들을 가득 채워나간 영화였다. 당시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전체를 관통하는 얘기로 담고 싶었던 것은 영화 안에서는 모든 것에 기승전결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감정을 쌓아가게 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런 식의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분절된 삶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엔딩에서야 비로소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면서 마치 그 때 영화가 시작되는 것처럼 끝난다. 누구나 이렇게 분절적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어디선가 서로 스쳐갔을 거라는 어떤 걸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두 인물이 그랬듯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도 언제 어디선과 저와 스쳐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당시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인터넷이 생겨나면서 어디서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어딘가 연결되어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영화였다. 우연과 인연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연결고리들은 일부러 대구를 이루려고 설정한 부분들도 몇몇 있지만 내 안에서 떠올랐던 것들이 나열되어 자연스럽게 어떤 법칙을 가지고 정리가 되었던 영화이다.

김성욱: 감독님의 영화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감독님의 여러 가지 취향이 잘 조절된 영화가 <순애보>인 것 같다고 느꼈다. 지난 10년 간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이 어떠신지, 그리고 최근에 준비하고 계신 작업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이재용: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러브스토리이다. 사실 <정사>를 만들 당시에는 멜로드라마가 나의 취향일 거란 생각을 못했었다. 뮤지컬을 좋아하면서 싫어하기도 한 것 처럼 멜로드라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나 신파적인 멜로드라마는 취향에 맞지 않지만 첨예하고 극단적인 상황 혹은 치명적인 사랑과 같은 이야기를 관심 있어서 치정이 있는 멜로드라마를 한편 준비하고 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하는 우려도 있다. (정리: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