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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오즈의 이면’

[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첫 번째로 지난 9월 18일 오후 <동경의 황혼> 상영 후 시네마테크부산 관장을 맡고 있는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오즈의 이면’이란 주제로 펼쳐진 열띤 강연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부산 관장): <동경의 황혼>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유성영화 중에는 유일하게 겨울이 배경이고, 눈이 내린다. 오즈는 포커스 잡는 게 어려워지거나 하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들 때문에, 영화에서 비나 눈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즈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봄, 여름, 가을에 찍혀졌고 굉장히 밝다. 분위기나 주제에 있어서 밝다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인물의 표정은 그늘이 없도록 가능한 밝게 처리한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촬영 방식의 특징을 가리켜서 ‘백주의 작가’, ‘한낮의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무성 영화시절에 겨울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이 간혹 있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에서 눈이 나오는 장면은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긴 했지만, 비애감을 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동경의 황혼>과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밤 장면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이렇게 밤 장면이 많은 것은 이례적이다. 전후의 오즈의 영화에서 화면이 이만큼 어두운 느낌을 주는 영화도 없는데, 밤 장면이 많을 뿐 아니라 실내 장면에서도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우도록 광원의 개수를 제한하고 있다. 마지막에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가 얘기를 나눌 때는 얼굴에 반쯤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동경의 황혼>은 1957년에 만들어진,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이다. 오즈는 이 영화를 끝으로 1958년의 <피안화>부터 그의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여섯 편의 영화를 모두 칼라로 찍었다. 이 영화가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라는 점과 밤을 찍었고, 겨울이 무대고, 눈이 내린다는 사실들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뿐 아니라 일본영화사에서 이 영화가 놓인 시점이라는 것은 약간 미묘한 점이 있다. 아시다시피 50년대는 일본영화의 황금기였다.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최고의 작품들을 이 시기에 쏟아낸다. 거의 매주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이 극장에 걸리던 시기였다. 일본영화계의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영화사에서 보자면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시작되며 일본 역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쇼치쿠는 오즈를 중심으로 한 서민극, 코미디, 현대극들 중심의 영화들을 채워왔지만, 닛카츠는 좀 더 도전적인 시도를 한다. 50년대 후반부터 쇼치쿠와 닛카츠의 시장 우위는 바뀌게 된다. 56년에 <태양의 계절>과 <미친 과실>같은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 영화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태양족 영화’라고 이름 붙여진 이 새로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방종하고, 문란하며, 거침없는 젊은 세대인데 이들은 사회적 규범을 넘나들면서 범죄에 가까운 향락을 즐긴다. 염세적이고, 화려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태양족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영화계를 동요시키고 있을 때, 오즈는 이 <동경의 황혼>을 만든 것이다. <이른 봄>과 <동경의 황혼>은 당시에는 오즈의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이 영화들이 태양족 영화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 반응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영화의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의 성적인 문란이 사건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직접적으로 서사 내에서 징벌이 가해진다. 그런 점들이 아마 젊은 세대의 등장에 흥분하고, 환호를 보내고 있던 당시의 풍토 안에서 보자면, 어딘가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동경의 황혼>이 갖는 이상한 특징들이기도 한 밤, 겨울, 눈이 등장하는 순간 어딘가 오즈의 영화세계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흔들리는가. 사실 이 영화는 오즈의 영화 중 가장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다. 대체로 오즈의 영화의 이야기를 특징짓는 점들은 가족 문제들, 딸을 시집보내는 일, 홀로 된 아버지를 재혼시키는 것, 노부모를 누가 모시는가하는 문제처럼 일상적인 일들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폭이 굉장히 좁은 편이고, 에피소드 중심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것에 비해 <동경의 황혼>은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류 치슈의 아내는 오래 전 다른 남자와 도망갔고, 아들은 이미 죽었으며, 큰 딸은 결혼을 했지만 고약한 남편을 만나 집에 들어와 있고, 작은 딸은 낙태를 하고 결국 죽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이 안에 담겨져 있다. 왜 오즈는 자신의 마지막 흑백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가. 게다가 오즈의 영화에서 종종 노부모가 죽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태아와 젊은 딸이 죽는다. 굉장히 끔찍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들을 끌어들이고 나서도 오즈는 자신의 내러티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즉, 오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즈의 모든 영화가 어떻게 보면 이야기라는 기준에서는 굉장히 불친절하며, 각 쇼트들이 구조적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경의 황혼>은 끔찍한 이야기를 복수로 가져오면서도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제시된 이야기나 갈등 중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들은 갈등을 해결할 의지조차 없다. 인물의 노력 뿐 아니라 서사적 진행이 갈등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마치 자신은 사건의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는 오즈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오즈는 그 갈등들을 무심히 쳐다만 보는 듯하다. 아키코의 죽음을 얼마나 간결하게 처리하는지는 정말 놀랍다. 딸이 죽는 그 중대한 장면을 담아내는데, 심지어 관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병상 장면 직후, 하라 세츠코가 걸어가는 장면은 음악조차도 명랑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엄마 앞에서 아키코가 죽었다고 말할 때, 이러한 흐름 자체가 굉장히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마치 오즈의 이야기하는 방식, 무심히 바라볼 뿐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오즈의 이러한 방식을 과연 견딜 수 있을지, 관객을 시험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동경의 황혼>에서 오즈는 사건을 던져놓고도 자신의 고유한 내러티브 구조로 완강하게 버텨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맹렬한 요구와 자신의 완강함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을 준다. 이 긴장이 오즈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변화시킨다. 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눈, 겨울, 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너무 춥기 때문에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들은 의미 전달을 위한 대화가 아닌, 교화적 기능의 대화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겨울에는 이러한 교화적 대화를 할 수 없다. 이 모든 끔찍한 사태를 초래한 이유는 이 영화를 겨울에 찍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할 수 없음이 오즈의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먼저 공간의 기능을 변화시킨다. 오즈의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은 술집과 집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술집은 남자어른들이 친구들 동창들 동료들과 만나서 남자들의 일종의 유사 공동체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집은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1층은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을 불러내 인사를 하거나 밥을 먹는다. 딸들은 대부분 2층에서 잔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는 2층에 가지 않는다. 2층은 딸들의 공간이다. 그래서 남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족들은 1층에 다 소집이 되어야 한다. <동경의 황혼>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기능 분담이 완전히 깨져버린다. 오즈의 모든 영화 중, 술집이라는 공간이 이 영화만큼 범죄의 분위기로 가득 찬 것을 본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술집은 비공식적·공식적 매춘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따라서 두 남녀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잠복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에서라면 술집이란 공간은 류 치슈와 친구들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다르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만큼 류 치슈가 일관되게 불행한 영화가 없다. 그는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 그려진다. 어떠한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다.


오즈의 영화에는 원인이란 없다. 인과관계 대신 다만 어떤 계열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자각성의 계열을 구성하는 최초의 자리에 눈이 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닥치자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친구는 사라지고, 공간의 기능은 무너지고, 아버지는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대화 상대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실패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중간에 사라져버린다. 마지막에 남겨진 두 인물, 류 치슈의 전 아내와 그녀의 새 남자, 이 두 사람은 홋카이도로 떠난다. 오즈의 영화에서 홋카이도로 떠난다는 것은 마치 유배를 가는 듯한, 멀리 떠나서 이제 도쿄의 사람들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것이다. 이들이 떠나는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는 스키를 들고 기차에 오르는 젊은이들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마치 영원히 떠나기라도 하듯 비장함을 보여주는데, 젊은 세대는 놀러가듯 스키를 들고 떠난다. 여기에 오즈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생기는 이상한 이질성의 충돌이 존재한다. 이 익명의 젊은이들이 기차에 타는 순간, 두 남녀이 보여주는 비장함이라는 것은 굉장히 우스워진다. 딸이 죽었는데 류 치슈는 눈물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어떠한 해결 없이,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 없이, 무언가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아주 강하게 상기시킨다. 이 영화를 체험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눈이 내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공간은 어떻게 변해 가는가,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운명을 맞이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구조는 어떤 것인가, 하는 측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정은정(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