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5. 14:24ㆍ회고전/아녜스 바르다 회고전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
‘아녜스 바르다’라는 이름을 인터넷 창에 검색할 때마다 그녀의 이름 앞에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누벨바그의 대모’, 여기서 ‘대모’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마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그녀가 누벨바그를 이끈 일군의 감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1954)이 푸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나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보다 수년 전에 누벨바그적 영화 실험들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바르다의 영화들을 다시 훑어보면서 개인적으로 ‘代母’인지 ‘大母’인지도 불분명한, 그렇지만 분명히 ‘어머니’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들이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것에 대해 과연 그는 만족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그 이름을 선사한 지고의 ‘행복’과 함께 강요되는 수만, 수천 가지의 미덕과 아이러니하게 포기되어야 하는 여성성의 다른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녜스 바르다의 여성의 삶의 무수한 국면들과 그것을 다루는 섬세한 사유들은 어떻게 보면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관용적 수식에조차 날카로운 반성적 사유를 들이댔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페미니즘 영화의 대가? 반동적 부르주아 영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관계 맺는 방식들을 본다. 하나는 라 푸앵트 쿠르트라는 어촌을 유지하는 가부장적인 가족구조 안에서의 전통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리에서 휴양차 이 마을을 찾은 커플의 히스테릭하지만 로맨틱한 관계다. 전통적 가족구조 안에서 여성과 남성은 서로의 영역이 명백하게 나뉘어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말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당사자의 의사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승인이다. 아버지는 딸을 보호하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파리에서 온 커플에게 라 푸앵트 쿠르트는 하나의 사랑이 종결되고 다른 사랑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파국으로 치달았던 사랑은 새롭게 부활한다. 하지만 섬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연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지나치게 말이 많고’, ‘강아지처럼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는’ 이상한 커플이다. 바르다는 두 개의 삶 중 어느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를 페미니즘영화의 대가로 추앙받는 동시에 반동적인 부르주아영화로 혹평받게 한, 상반된 평가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만든 이유다. 그는 여성들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과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적대적 관계에 놓지 않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하는 여성들의 짐과 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사랑이라는 권력관계 안에서 여성이 쟁취해야 할 입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바르다에게 영화는 꿈이나 환상 혹은 전투지가 아니라 ‘자신이 늘 그 속에서 살아왔던 집’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가 과도하게 사운드트랙을 장악했던 <행복>(1965)은 그런 논란의 불씨를 댕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한 가족의 피크닉 풍경이 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아름다운 젊은 부부의 애정 넘치는 대화, 그러나 남자는 곧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한다. 그로 인해 그는 더 행복해진다. 남편에게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었던 아내는 그녀도 사랑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빼앗지 말고 그냥 자신을 더 사랑해달라는 남편의 이기적인 부탁에 알겠다고 대답하지만 이내 자살한다. 그녀의 장례식 이후 아이들의 양육문제로 가족간 회의가 소집되지만 어머니와 성적 파트너로서의 그녀의 빈자리는 남편의 새 애인으로 곧 채워진다. 놀랄 만큼 유사한 피크닉 풍경을 나란히 이어붙임으로 얻어지는 정서적 충격. 같이 영화를 보던 이는 “뭐 이렇게 ‘무윤리적인 영화’가 다 있냐”고 물었다. 지독하게 불행한 한 여성의 삶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 속에 묻혀버리고 가장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바르다는 이 영화를 통해 행복의 욕망구조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이 사회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성적으로 편향되게 구조화되어 있고, 역할 분담되고 있는지 냉정하게 제시한다. 이 영화는 스스로 전시하고 있는 행복은 매우 피상적이고 폭력적인 것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담백한 이 영화의 화법은 1970년대 여성주의 이론가들로 하여금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다.
여성의 목소리로
바르다의 영화들은 분명히 여성으로서 그의 시선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예술 양식들이나 사진, 그리고 영화에 대한 정열적인 애정과 정치적 태도들 역시 담아내고 있다. 바르다 안에서 여성과 예술가로서의 자아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강화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다정한 주석을 들으면서 파리의 풍경과 LA의 벽화들,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술가이자 생활인이며 애인이자 아내이며 어머니이고 할머니이며 또 딸인 그녀의 삶이 느껴진다. 바르다는 평범한 삶 속에 숨겨진 비범한 의미들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놓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그녀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역할들이 부여된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풍경 안에 숨겨진 예술적인 찰나들을 포착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글: 김지미 영화평론가)
* 이 글은 2010년 10월 19일에 발행된 씨네21 775호에 게재된 글을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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