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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1960년대에 대한 쓸쓸한 초상 - 장준환 감독의 선택작 <5번가의 비명>


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미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존 터투로, 조디 포스터, 팀 로빈스가 아주 유명해지기 전에 출연한 작품인데, 개성 있는 배우들이 개성 있는 영화에서 독특하고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대단한 의미가 있다거나 무게가 있기보다는 컬트, 또는 괴작에 가까운 영화다. 이런 독특한 재미를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 <5번가의 비명> 장준환 감독의 추천사 



[리뷰] 1960년대에 대한 쓸쓸한 초상 - <5번가의 비명>





토니 빌 감독의 <5번가의 비명>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만큼 국내 관객에게 조금은 생소할 작품이다. 영화는 뉴욕 브롱크스 지역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훑으며 시작된다. 그러나 곧이어 드러나는 인물들의 상황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느 수학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날, 강간죄로 감옥에 갔던 하인즈(존 터투로)가 마을에 돌아온다. 하인즈의 광기어린 집착이 다시 시작될 것이 두려운 린다(조디 포스터)는 그를 감옥에 보낸 장본인인 해리(팀 로빈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해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틴 루터 킹의 가르침에 심취해 비폭력주의자가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그녀를 구하려다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된 린다의 남자친구 제임스(토드 그래프)는 그녀와 해리의 사이를 오해해 히스테리를 부린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게 된 린다는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하인즈에게 납치당한다. 그들의 소동 사이로 뜻밖의 휴일을 얻은 두 남학생과 두 여인의 일탈기가 끼어드는 가운데, 경찰과 해리와 제임스에게 쫓기던 하인즈는 서글픈 최후를 맞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가족, 연인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 혹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 혹은 트라우마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정상적인 삶에서 조금씩 비켜나 있는 인물들의 삶은 말 그대로 카오스 그 자체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그저 자의적으로 구성된 무질서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질서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반영돼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4년, 존 F. 케네디가 죽은 직후이며, 아직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시기이다.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텔레비전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반전 연설이 울려 퍼지는 한편, 거리에서는 공화당 상원의원 선전 차량이 활보 중이다. 또 1960년대라면 미국 곳곳에서 반전운동, 흑인인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동성애운동이 활발히 일어남과 동시에 미국 밖에서는 아프리카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 혼란과 분열의 시기의 한가운데에 놓인 인물들이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기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존 패트릭 샌리가 유년기를 보낸 동네를 배경으로 해서 각본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적 삶이 맞닿아 있는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해냈다. 비록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평단은 이 브로드웨이 출신 각본가에게 야박한 점수를 줬지만 말이다. 또 다른 빼어난 극작가 토니 쿠쉬너(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과 <링컨>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극작가)는 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 굉장한 연민을 갖고서 왜 인간이 그렇게 나쁘게 행동하는지를 탐구한다. 그건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조합이다.” 이 점은 하인즈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로는 거의 미치광이 악인에 가깝게 묘사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 이상 증세를 갖고 있는 어머니와의 불완전한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영혼으로 묘사되기도 해, 끝내 관객으로부터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그가 린다에게 펭귄을 선물하다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하는 서정적이고도 기괴한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편 아직 유명해지기 전인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 볼 만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존 터투로다. 그는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이미 존 패트릭 샌리와 협업하여 오비상을 받은 바 있으며, 영화계에서는 마틴 스콜세지 영화에서 비열한 캐릭터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던 중이었다. 특히 그의 얼굴이 이 영화의 중요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관자놀이에 난 긴 칼자국 흉터와 부리부리한 눈매는 그 자체로 관객을 시선을 잡아끈다. 배우 출신 제작자 겸 감독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 능숙했던 토니 빌은 그의 그런 얼굴 속에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는 분노와 광기와 절망을 같이 뒤섞어냈다. 이후로도 주로 예민하고 폭력적이며 미친 인물을 자주 연기한 터투로의 연기 경력에 초석이 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배우와 작가와 감독과 시대의 만남이 1960년대에 대한 괴상하고도 쓸쓸한 초상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5번가의 비명 Five Corners

198790min미국, 영국Color35mm│15세 관람가

연출토니 빌 Tony Bill

출연존 터투로, 조디 포스터, 팀 로빈스

상영일시ㅣ 2/7(금) 17:30, 2/13(목) 17:00, 2/23(일)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