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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어떤 영화는 작품으로서의 완결이나 가치를 논하기도 전에 그들이 야기한 스캔들로 인해 영화사에 오명을 남기기도 한다. <천국의 문>은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불운의 전범으로 곧잘 거론된다. 720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제작되기로 한 영화가 44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가까스로 완성된 뒤, 고작 2백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스코어를 기록함으로써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치명적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 이 영화에 쏟아진 저주에 가까운 혹평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장장 세 시간 삼십 분에 달하는, 미국의 탄생과 역사에 대한 이 기념비적인 메타포는 미국영화사의 문제적 감독 중 하나인 마이클 치미노의 웅혼이 하나하나의 쇼트 마다 서려 있는 역작이다.

장대한 규모와 서사시적 작풍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이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에 견줄만하며, 하늘과 산, 대평원을 훑어가는 장쾌한 파노라마 쇼트는 조금 먼저 나온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 필적한다. 맬릭이나 코폴라, 베르톨루치를 의식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치미노의 야망만큼은 저들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와이오밍 주 존슨 카운티를 물들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슨 카운티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법원 수사관 제임스(크리스 크리스토퍼슨)는 패악의 온상이 된 그곳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된다. 부유한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의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청소 작업이 모의되면서 프랭크 칸톤(샘 워터스톤)이 이끄는 지주들은 강도 혐의를 씌워 존슨 카운티의 이주민들에 대한 합법적인 살생부를 만든다. 살생부에는 제임스와 그의 친구 네이트(크리스토퍼 월큰)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놓인 창녀 엘라(이자벨 위페르)도 끼어 있다. 20년 전 대학 졸업식에서 자유와 이상을 꿈꾸었던 동무들은 찌들은 모습이 되어 재회한다. 희망과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온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돈만 밝히고, 뿔뿔이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린다. 한때 평화와 생기가 넘쳤던 이 공동체는 점점 위험해지더니 천국의 향기가 사라진 학살과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버렸다.


<디어 헌터>와 같이 <천국의 문>은 미국의 다원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몇몇 평자들은 영화 안에서 서사시적 엄숙주의와 웅장한 세계관이 정교한 서사로 응결되지 못했음을 지적했지만 치미노는 그 자체로 미국의 뿌리와 동일시되는 서부의 역사를 탈신화화하여 그 본질을 들추어낸다. 특별히 여러 번 등장하는 춤 시퀀스와 풍경의 시각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도입부 대학 졸업식 장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청년들의 집단 군무, 이민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롤러스케이트 댄스와 이어지는 제임스와 엘라의 아름다운 춤 장면은 영화적 음율과 미감이 한 경지를 보여준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춤은 공동체적인 가치가 충만하게 넘치고, 변질되고, 마침내 파괴되어 버리는 과정을 은유하는 장치로 쓰인다.

<천국의 문>은 백인 신교도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어 온 미국의 탄생을 타자에 대한 정복과 학살의 역사로 규정한다. 반골 감독 치미노는 여러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각대로 영화를 찍었고, 결국 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할리우드에서 가장 체제 전복적인 문제작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세계의 상징과 알레고리로 점철된 다분히 문학적인 각본을 보완하는 것은 <서바이벌 게임>(1972), <옵세션>(1976), <디어 헌터>를 찍은 명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몬트의 유려한 카메라워킹이다. 회화적인 구도와 색감,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이동 촬영 쇼트는 장면마다의 품격을 한 뼘쯤 높여 놓는다. 풍부한 정서와 뉘앙스를 전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으로도 <천국의 문>을 필름으로 확인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장병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