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1941~1996)의 ‘데칼로그’가 공개된 지 30년이 되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영화를 만든 1980년대는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다.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 운동에서 시작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 폴란드에서 도덕적 의미를 담은 <데칼로그>의 제작으로 절망의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희망과 비전의 길을 찾고자 했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따르면 <데칼로그>는 크지쉬토프 피에세비츠(Krzysztof Piesiewicz)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에세비츠는 전작 <노 엔드 No End>(1985)의 공동 각본을 썼고, 가톨릭 교회를 믿는 신앙인이자, 폴란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재판에서 활동했던 변호사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추운 날 피에세비츠는 그에게 “누군가 십계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처음에는 염두에 두지 않다가, 바르샤바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고 피에세비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피에세비츠와 함께 3년 동안 십계명에 대한 신학 및 철학적 연구를 하며 공동 시나리오를 썼다. 두 사람은 20세기 후반 서구 세계에서 고대 계명의 보편적, 도덕적, 법적 타당성과 오늘날의 세속적인 개인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14개월에 걸쳐 10부작을 연출했다. 1989년에 이 작품이 폴란드 텔레비전을 통해 공개됐을 때, 폴란드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즐겼다고 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1980년대라는 변화의 시기에 공산 국가냐 자본주의 국가냐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 여겼다. 배급 카드와 같은 공산주의 치하의 폴란드 현실이 그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일부 비판이 있긴 했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데칼로그>에서 사회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대 세계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사적 감정과 그들이 처한 윤리적 딜레마의 문제를 다뤘다. 그는 단순한 계명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찾아간다. 외면적으로 단순 명료해 보이는 ‘십계명’의 “하지 말라”라는 금지 명령에 담긴 이면과 복잡성, 역설적 측면이 그렇게 드러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작품의 의도를 밝힌 인터뷰에서 “조심하라. 너희 곁에 다른 사람들도 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영화와 계명의 정확한 상관관계를 밝히기보다는 계명에 담긴 전체 윤리체계 안에서 영화를 이해하도록 제안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폴란드인의 삶을 바꿀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삶의 가치와 방향을 상실한 도덕적 불안에 대한 영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영화의 중심 배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카메라가 쫓아가 그들의 삶을 잠시 엿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다른 시리즈에 잠깐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매번 등장하는 ‘미지의 청년’도 있다. 2편의 주인공 도로타와 그녀의 남편은 5편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부부로 등장하고, 5편의 주인공 토멕은 10편에서 마찬가지로 우체국 직원으로 나온다. 또 3편과 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촬영감독을 기용해 총 9명의 촬영감독이 영화에 참여했고, 시리즈 전체에 걸쳐 즈비그뉴 프라이즈너(Zbigniew Preisner)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데칼로그 1. 운명

바르샤바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 크지쉬토프와 어린 아들 파벨, 그리고 고모 이레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크지쉬토프는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이성에 따라 살지만 가시적인 세계 외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고모 이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파벨을 따뜻하게 돌봐주며 신앙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한다. 파벨은 아버지와 함께 컴퓨터와 체스를 즐기면서도, 고모가 말하는 신앙과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다.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하는 파벨을 위해 아버지는 컴퓨터로 얼음 두께를 계산해서 안전을 확인한 후 스케이트 타는 것을 허락한다. 다음 날 책상 위에 있던 잉크가 깨져 파란 얼룩이 번지고 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낀다. 

1편은 가톨릭에서는 1계명이며, 개신교로는 1, 2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20:3-6)’에 해당한다. 영화는 계명이 가지는 ‘금지’와 ‘명령’의 성격을 뒤집어 ‘질문’으로 풀어낸다. 계명이 가지는 도덕적 교훈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과 딜레마를 보여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인터뷰에서 “내 영화들은 도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중립적인 카메라는 해답을 추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시작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어떤 실존적 운명의 의미를 찾아간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난생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한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에 계명의 숨은 의미가 담겨 있다.



데칼로그 2. 선택

바이올리니스트 도로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병원의 진료부장을 찾아간다. 도로타는 병원에 입원 중인 남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묻는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그녀는 남편이 죽게 되면 아이를 살리고, 남편이 살게 되면 아이를 낙태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남편의 생사 여부에 따라 낙태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의 생사 여부는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대답을 할 뿐이다. 하지만 도로타의 집요한 요청과 그녀가 처한 상황의 고백을 들은 의사는 고민한다. 의사는 남편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에게 남편이 죽어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영화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한 여자와 그 선택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의사의 관계를 다룬다. 신의 이름이나 맹세라는 계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아닌 두 인물의 실존적 상황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문제에 집중한다. 도로타는 뱃속의 아이와 남편 사이의 양자 간 선택의 기로에 있다. 진료부장 역시 도로타에게 남편이 죽음 여부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명의 의미를 ‘선택’에 대한 질문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물들이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윤리적 딜레마로서의 삶의 문제와 선택의 의미를 질문하게 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선택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데칼로그 3. 안식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술 취한 사람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바로 근처에서 택시 운전사 야누스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택시에 앉아 있다. 같은 시간, 붉은색 차를 탄 여주인공 에바는 양로원에 있는 이모를 찾아간다. 영화 초반부는 주요하게 크리스마스의 전통과 가정의 긴밀한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술주정꾼은 “우리 집이 어디야? 집이 없어.”라며 트리를 끌고 거리를 헤맨다. 에바는 환자복을 입은 아이가 “집에 가고 싶어.”라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바라본다. 

키에슬로프스키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전통적 서구 가정의 모습을 십계명의 안식일에 대한 계명과 연결해 그려낸다. 야누스의 행복한 가정의 집안 풍경을 밖에서 홀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1편의 주인공 교수 크지쉬토프와 야누스의 과거 애인 에바이다. 교수는 아이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두 사람은 창문 너머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된 아늑한 거실과 어린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야누스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가정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감독은 크리스마스를 과거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밤인 동시에, 절망하고 외로운 영혼과 함께 보내는 위로의 밤으로 묘사한다. 에바의 대사처럼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커튼을 닫고 가족끼리 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전히 밖에는 홀로 쓸쓸하고 가난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이웃들이 있다. 영화는 이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감독은 가족의 거룩한 시간뿐 아니라 사랑의 나눔과 해방의 거룩한 시간성을 강조한다. 안식이라는 시간의 신성함과 진정한 의미를 질문한다.

 

데칼로그 4. 부모

부활절 월요일 아침, 앙카는 물병을 들고 몰래 아버지 미할의 방에 들어간다. 물병에 든 물을 미할의 머리에 쏟아붇는다. 짓궂은 장난처럼 보이지만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부활절 월요일(Easter Monday)에 서로 물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중적 풍습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스무 살 앙카는 예술학교에서 연기를 배우는 대학생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멀리 출장 가는 아버지를 배웅한 후 앙카는 아버지의 책상 위에서 의문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 겉면에는 ‘내가 죽은 후에 열어볼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 비밀스러운 편지는 전체 사건과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부녀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메시지가 담겨 있다. 관계의 경계 앞에서 앙카는 감정의 혼란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영화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출발해 근친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 즉 갱생(更生)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스스로 관계를 선택하고 재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내면적 절망과 죽음을 통해 과거 부녀 관계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부활절 월요일 에피소드와 더불어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를 보여주는 몇 가지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앙카가 시력검사를 받는 장면과 연기 수업 장면이다. 시력검사 장면에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표에 있는 글자를 읽는데 그 글자의 조합이 ‘아버지(father)’이다. 앙카는 안경을 쓰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한다. 공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갈 때 앙카는 안경을 쓰고 나간다. 또 다른 장면은 앙카가 예술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받는 장면이다. 앙카는 사랑하는 관계를 연기하려 하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지도 교수는 역할에 몰두하라 조언한다. 영화는 인간관계의 질서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관계를 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한다. 

 

데칼로그 5. 살인

5편과 6편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장편으로 개봉한 작품이다. 영화는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이상주의자 피오트르, 속물적인 택시 운전사 발데마르, 그리고 무심하게 세상을 표류하는 청년 야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무관한 세 사람의 일상의 단편이 어떤 친밀한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교차하고 서로 연결된다.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는 살인이 행해지고, 이윽고 법원에서 형이 선고되고 사형이 집행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담은 5편은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현대인의 상황을 묘사하지만, 훨씬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데칼로그> 전편에서 일관되게 묘사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와 고독, 소통 불가능성의 문제가 5편에서는 극단적으로 제시된다. 규격화된 회색빛 아파트 우울한 풍경은 바르샤바 거리로 확장되고, 도시 전체가 방황과 소외의 공간이 되고 위협적인 곳이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야첵의 감정 없이 이루어지는 살인 행위가 후반부 사행 집행 과정의 형식적 절차와 유사하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마치 두 번째 살인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 행위와 사형 집행 사이의 유비 관계의 실마리는 5편의 전체 주제이며, 변호사 피오트르의 독백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법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개선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인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법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요. 형벌은 보복입니다. 범죄 예방이 아닌 범죄자 처벌에 집중한다면요. 그런데 법은 무슨 명분으로 보복을 집행합니까? 결백을 위해서입니까? 그럼 법을 만든 이는 결백합니까?” 

 

데칼로그 6. 사랑

6편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달리 극장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랑’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5편과 6편은 <데칼로그> 시리즈의 중심을 차지하며 ‘살인’과 ‘사랑’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구성에서는 유사성이 감지된다. 이야기는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하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고아 출신의 19살 청년 토멕은 훔친 망원경으로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30대 연상의 여인 마그다를 1년 넘게 매일 훔쳐본다. 영화 전반부는 토멕이 마그다를 훔쳐보는 과정을, 후반부는 토멕이 훔쳐보기 행위를 고백한 후 마그다와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5편이 개인의 충동적 살인과 국가의 체계화된 처형의 과정을 전후반부로 나눠 배치해서 두 살인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게, 6편은 청년이 훔쳐보는 행위와 여성이 바라보는 과정을 배치해서 둘 간의 행위를 비교하도록 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소통하는 데 실패한 현대인의 소외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신성함과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극장용으로 재편집되면서 결말도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그다 역을 맡았던 여배우의 요청에 의해 결말이 더 긍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6편은 자살 시도 후 우체국으로 다시 출근한 토멕과 마그다가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희미하게 웃는 마그다와 달리 토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극장판에서 마그다는 토멕의 아파트를 찾아가 망원경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데칼로그 7. 고백

영화가 시작하면 바르샤바 아파트 단지의 외경이 보이고, 한 아이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 비명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누구의 것이며, 왜 그러는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관객은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아파트의 수많은 창문 중 그 비명의 출원지를 찾게 된다. 비명소리는 인간의 본질적 두려움과 불안의 표현인 양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격자형 회색빛 아파트의 단순하고 차가운 외관은 죽음과 감옥을 떠올리게 하며 불안을 가중시킨다. 화면이 바뀌고 한 젊은 여대생이 학교를 그만두려 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다시 영화는 아파트 내부 한 가정의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비로소 비명이 한 어린아이가 악몽을 꾸며 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악몽이 어디서 기원하고 어떤 내용인지는 마지막까지 미스터리로 남는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질문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이 아닌 긴장감을 보여준다. 관계의 혼란에서 오는 불안은 아이의 악몽을 통해 표현된다. 소유에 대한 집착과 억압은 또한 어린 안야가 잠자는 동안 꼭 잡고 놓지 않는 손으로 표현된다. 이렇듯 안야는 7편의 도덕적 불안의 정서를 반영하며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마이카의 뒤를 쫓는 안야의 눈빛은 오프닝 시퀀스의 악몽으로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소유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마주할 수 있을까?

 

데칼로그 8. 과거

8편은 오래 전 과거에 대한 회상 장면(플래시백)으로 시작한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다 발자국 울림소리가 들리고 한 성인과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카메라가 그들 뒤를 한참을 따라가다 뒤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이 언뜻 스치고는 곧 깜깜한 어둠 속에 잠긴다. 암울한 과거를 비추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다. 싱그러운 아침햇살과 새소리가 들리는 초록의 공원이 보이고, 조피아는 바르샤바 대학으로 출근해 윤리학 수업을 진행한다. 이 날은 미국에서 온 폴란드 출신 연구자 엘즈비에타가 수업에 참여한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유대인 생존자들의 운명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조피아는 학생들에게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윤리적 선택의 극한 상황을 다루는, 이른바 ‘윤리적 지옥’이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엘즈비에타는 1943년 여섯 살 유대인 소녀에게 일어난 일을 사례로 제시한다. 

8편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비교적 분명하지만 단순하지 않게 표현한다. 영화에서 ‘윤리적 지옥’으로 제시되는 선택의 고뇌는 선택하는 순간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그날 밤의 선택은 조피아의 삶을 지배한다. 과거에 대한 자세는 엘즈비에타에게도 적용된다. 두 사람은 모두 과거 ‘쇼아’의 기억에 근거한 삶을 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분명한 대비로 쌍을 이루며, 첫 장면의 어두운 불안감이 비로소 떨쳐진다.



데칼로그 9. 고독 

9편은 위기에 처한 부부 관계를 다룬다. 성공한 외과 의사 남편 로만과 항공사 직원 아내 항카는 아이 없이 결혼 10년째 접어든 부부이다.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비뇨기과 의사 친구를 만난 로만은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성 무능력 상태를 확진받는다. 의사 친구는 가혹하게도 아내와 이혼하라고 충고한다. 이후 로만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자살 충동과 아내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느끼면서 절망적 감정의 갈등상태에 빠진다. 아내에 대한 육체적 소유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는 심리적 위협과 자괴감은 로만에게 보다 총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일으킨다. 로만은 항카의 은밀한 삶을 추적하고 감시하기 시작한다.

<데칼로그>를 계획하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신의 시선’에 대한 생각을 구약의 신과 연관시켰다고 한다. 그에게 구약의 신은 “인간에게 많은 자유와 책임을 맡기고 인간이 그것을 잘 사용하는지 지켜본 다음 보상하거나 벌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는 <데칼로그>에서 신의 시선과 판단에 근원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 도덕적 명령의 깊은 의미를 탐사해 나간다.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을 남자 주인공 로만이 추구하는 감시와 통제의 힘으로 대체하고, 그런 시선과 시도의 부도덕을 보여줌으로써 인류 내면을 지켜보는 신적 공의에 질문을 제기한다. ‘전능한 감시’의 진실한 의미를 찾기 위해 신의 시선(God’s eye view)이라고도 하는 부감 숏의 능력을 자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로만의 시청각적 엿보기에 내재된 모든 잔인함과 사악함, 이기심이 관음증적 욕망이나 시각적 쾌락이 아닌 대상을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존재론적 필요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한다. 영화는 사람을 탐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한 신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간다. 

 

데칼로그 10. 희망

10편은 <데칼로그>의 마지막 영화이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영화이다. 탐심에 대한 계명의 의미는 사실 보편적이고 흔하게 발견되며 여러 편에 걸쳐 다양하게 묘사된다. 7편은 사람을 소유하려는 탐심, 9편은 정신적인 소유에 대한 탐심을 다뤘고, 10편에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물질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지하고 우울한 톤으로 진행되는 다른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톤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희극적 요소, 웃음과 관련한 것이다. 10편의 마지막 장면은 두 형제가 이마를 서로 맞대고 아이러니한 큰 웃음을 쏟아내며 끝난다. 그리고 이 희극적 요소는 영화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랜만에 만난 형제 예르지와 아르투르는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 각종 자물쇠로 채워진 철문 안에는 좁고 낡은 한 칸 방만 있고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고 철통 보안이 되어 있다. 형제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그 삶의 모습을 비웃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엄청난 고가의 우표 수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세계에 빠져들면서 형제도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소유하려는 욕구가 발생하는 지속적이고 다양한 효과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면서 탐심의 본성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탐구한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아버지의 유산에 탐심이 발동한 형제의 모습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탐심을 객관화하는 과정과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형제가 아버지의 유산과 관련한 여러 사건들을 통과하며 겪게 되는 일은 자기 내면의 탐심을 깨닫는 과정이며 가족 관계에 대한 재발견이다. 

 

임세은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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