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8. 14:32ㆍ특별전/다크 시티: 필름 누아르 특별전
[필름 누아르 특별전]
필름 누아르의 불온성을 지우다
- <길다>(찰스 비더)
<길다>는 두 개의 인상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먼저 도박사 조니와 카지노 주인 밸린, 이 두 남자 사이의 만남이다. 조니는 뉴욕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굴러들어간 과거가 모호한 도박사다. 길거리에서 주사위 사기로 막 한몫을 잡았는데, 현지의 불량배에게 모두 뺏길 판이다. 그때 밸린이 나타나서 조니를 구한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인한 인상의 밸린은 끝에 칼이 숨겨진 지팡이로 악당을 물리쳤다. 밤 항구에서 만난 두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고,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운다. 이들의 만남은 강한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투 숏 덕분에 마치 연인들의 설레는 만남처럼 묘사돼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길다의 등장 장면이다. 길다는 밸린이 여행지에서 만나 바로 다음날 결혼한 미국인 여성이다. 밸린의 소개로 조니와 길다가 서로를 처음 봤을 때 두 사람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교환은 이들의 강렬한 욕망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길다>는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필름 누아르다. 필름 누아르의 공식에 따르면 젊은 여성 길다는 팜므 파탈, 조니는 추락하는 순진한 남자, 그리고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희생되는 악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길다>는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비튼다. 먼저 길다의 캐릭터가 남성들의 미움을 받는 악녀 팜므 파탈에 머물지 않는다. 길다는 다른 팜므 파탈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작전을 짜는 ‘영리한’ 인물이 아니라 오직 조니의 사랑에만 헌신하는 ‘착한’ 여성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길다가 처음 등장할 때, 누아르 특유의 범죄적 열정보다는 조니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더욱 강조된 데서 길다의 멜로드라마적 캐릭터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길다는 누아르 특유의 불온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리고 두 남자의 관계도 전형성과 다르다. 이 점은 개봉 때부터 일부에 의해 꾸준히 지적돼 왔는데, 두 남자는 우정을 넘어 동성애적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두 남자가 보인 상대에 대한 특별한 호감, 그리고 조니가 남성성을 상징하는 밸린의 지팡이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주요한 이유로 제시됐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조니가 제거해야 하는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다. 더 나아가 조니는 밸린과 길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포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밸린이 사라진 뒤 길다를 학대에 가깝게 대하는 조니의 태도는 밸린에 대한 배반의 죄책감을 길다에게 덧씌우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이 길다인지 조니인지 혼란이 생길 정도다.
<길다>는 필름 누아르 계보에서 늘 빠지지 않는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아마도 리타 헤이워드의 압도적인 매력, 그리고 명암의 강렬한 대조를 마법처럼 잡아낸 촬영(루돌프 마테)의 솜씨 덕이 클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길다>는 누아르의 불온성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결국 윤리를 강조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종결된다. 아마 스타였던 리타 헤이워드를 악녀 팜므 파탈로 만들거나 비극적 결말의 장본인으로 내세우는 데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길다>는 불온성보다는 대중성을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필름 누아르의 전설로 남은 특이한 위치에 있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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