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감동에 젖기도 하며,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나 기억을 환기시키는 영화는 더욱 특별한 작품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존 포드의 가장 빼어난 드라마중 하나인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는 거기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보편적이고 진실해서, 누구에게라도 그러한 특별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고전적 형식미의 완결성과 전형적인 가족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만으로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그려낸다.

 

영화는 웨일즈의 한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모건 가족의 이야기다. 막내인 휴는 자신 인생의 정점에서 유년기의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나의 계곡은 얼마나 푸르렀던가!”라는 회상. 집안에 위치하던 카메라는 유연하게 창밖으로 이동하며 그 회상을 표현한다. 그곳은 계곡의 정점에 탄광이 있고, 거기서부터 내려오는 길가를 따라 집들이 정렬해 있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다. 모건 가족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모두 탄광에 다닌다. 일이 끝나면 일당을 받고, 다 같이 집에 와 몸을 씻으며 저녁식사를 한다.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평범한 가정이다. 휴는 “아버지는 우리들의 머리였고, 어머니는 심장이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런데 이 가족의 조화로운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몇몇 갈등이 발생한다. 탄광회사 측의 횡포(임금 삭감)로 인한 파업을 바라보는 견해차로 가족의 분열이 일고, 어머니와 휴에게 닥친 사고로 한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는 일도 생긴다. 마을의 목사와 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문제도 있다. 두 아들이 탄광에서 해고되어 미국으로 떠나면서 가족의 분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건 가족의 친구이지만, 쉽사리 소문에 휩쓸리며 때로는 적대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갈등들은 오래지 않아 무마된다. 휴가 한동안 걷지 못하다가 푸른 꽃밭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걷기 시작할 때가 그 시작이다. 롱쇼트로 찍힌 이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의 아름다움, 이에 더해 인간성의 따스한 품속에서 모든 갈등은 치유된다. 휴가 유년시절의 회상을 끝내는 결정적 사건도 회한과 고통보다는 애상감이 더 크다. 가족은 언제나 거기에 굳건하게 자리한다. 휴의 기억 속에서는 가족들과 아버지에게서 배운 삶의 가치들이 평생 뿌리처럼 자라왔던 것이다. 그 계곡의 푸름과 함께.

 

이 영화에 담긴 ‘가족과 집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는 쉽사리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또한 영화 속 따스한 감정들은 현실성 없는 낭만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실제로 고용자와 노동조합의 문제, 계급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같은 갈등의 틈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봉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모든 현실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숭고한 지점에 있다. 삶의 순수한 진실이 담겼기 때문이다. 포드는 삶의 가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영화적인 직관만으로, 이 영화를 진실함의 심원한 영역에 올려놓는다. 어떠한 표현적인 혹은 스타일적인 기교도 필요치 않다. 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살아 숨쉰다.

 

영화는 애상에 젖어 말한다.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도 삶은 그 자체로 흘러왔으며, 인생의 정점에서 돌이켜 볼 때 그 시절은 더없이 아름다웠다고. 이는 아일랜드 이민 2세대인 포드가 가진 ‘아일랜드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린 시절에 보았다면 평생 어떠한 유년의 기억처럼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고, 나이가 지긋이 든 후에 본다면 삶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영화를 ‘고전’이라고 부른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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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존 포드의 <굽이도는 증기선>



존 포드의 1935년 작 <굽이도는 증기선>은 미국 남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 닥터 존(윌 로저스)은 여객선에서 위스키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파는 장사꾼이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합심해서 폐어선을 복구시키고 선장이 되지만, 조카인 듀크(존 맥가이어)가 플리티 벨(앤 셜리)을 구하려다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일이 꼬인다. 존은 조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본의 아니게 보트 경주에 참여하게 된다.

 

이 영화는 ‘윌 로저스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존 포드가 연출을 맡은 <닥터 불>(1933), <저지 프리스트>(1934)에 이어, 윌 로저스는 소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전반부는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포드 특유의 유머러스한 상황설정과 윌 로저스의 순발력이 어우러진 후반부는 밝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유머와 휴머니즘은 종종 같은 해 발표된 존 포드의 또 다른 영화 <정보원>(1935)의 우울한 세계관과 비교되곤 한다.


 

영화는 늘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충돌한다.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고, 늪지대 주민들과 강변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공간으로는 밀랍 인형 전시관이 있다. 존과 플리티 벨은 변호사 선임비를 구하기 위해 여객선 안에 밀랍 인형 전시장을 설치한다. 인형 중에는 서부 개척자 대니얼 분이나 남부 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같은 전쟁영웅, 그리고 제시 제임스 형제들처럼 악명 높은 악당들의 인형도 있다. 태그 갤러거는 이 밀랍 인형 전시장을 “이름, 외형, 신화, 상징 그리고 컨벤션이 실재가 되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인형에 부여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관람객들은 위엄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는다. 농부들이 박물관을 폐쇄하러 왔다가 제시 제임스의 인형을 보고 오금을 저리며, 로버트 리 장군의 인형을 보고 일동 거수경례를 한다. 영화는 이러한 오인의 순간들을 통해 역사적 인물들을 희화하고 풍자한다. 더불어 인형을 관람하는 농부들의 순박한 표정과 행동을 통해 극 전체를 온화하게 만든다.


나아가 포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발생시켜 극을 이끌어간다. 보트 경주 후반부에 여객선에 연료가 떨어지자 선원들은 땔감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엔진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의자, 책상, 갑판을 떼어내는 것도 모자라 밀랍인형과 위스키까지 모조리 던진다. 죄다 연료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미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밀랍 인형, 한 때 닥터 존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팔던 위스키, 심지어 배의 일부를 뜯어내 원료로 쓴다. 이 장면은 파괴를 통해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무작정 때려 부수고, 그 파편들을 집어던지는 장면은 포드가 즐겨 사용하는 ‘던지기’ 액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막스 브라더스의 1940년 영화 <고웨스트(Go West)>에서 마차를 부수어 증기기차의 연료로 쓰던 장면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영화사적인 비화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삼부작 중 두 편은 폭스에서 제작되었는데 <굽이도는 증기선>만 RKO에서 제작되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당시 제작환경이 변하면서 이 영화의 코믹한 부분이 제작자에 의해 상당수 편집되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전했다. 한편 윌 로저스는 이 영화 촬영 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때문에 로저스에게 이 작품은 본의 아닌 유작이 되었고, 그의 팬들에게는 로저스가 보내는 작별인사로 기억되는 영화로 남았다. (이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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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영화평론가의 선택,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시네토크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작품은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지난 17일 이 영화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진 평론가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한껏 젖어있는 관객들을 보며 ‘나도 여러분이 보시는 그대로만 존 포드를 알고 있다’는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개괄적 설명과 함께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존 포드 감독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 주었던 시간이었다. 재치와 유머가 한껏 묻어났던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 현장을 이곳에 옮긴다.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영화 잘 보셨는지 궁금하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어렸을 때보면서 막 울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대책 없이 센치한 영화 같다. (웃음) 감독 존 포드에 대해서 우리는 늘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대체 그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감독이라고 하지만 명쾌하게 왜 위대한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존 포드는 무성영화부터 시작했던 감독이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다져진 감독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저히 당도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감독이었다. 주로 그는 ‘촬영은 사람들의 눈을 찍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의 영화를 보면 이 말이 정말 공감된다. 존 포드 영화현장의 전설 중 하나가 우연찮게 굉장한 장면을 건진다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진주만 습격 때 존 포드가 현장에 있었는데 그는 그걸 카메라에 담았다. 또한 <황색 리본을 한 여자>에서 기병대가 말을 타고 갈 때 내려치는 천둥번개를 그대로 화면에 담았다고 한다. 일부는 철저하게 기획된 것들도 많았겠지만 이 같은 에피소드들은 정말 기막힌 우연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는 전성기가 굉장히 길었고 외형상으로 거의 모든 작품을 통해 확고한 커리어를 쌓았던 감독이나 그럼에도 불가하고 그의 최고 정점을 꼽자면 1939년 후 <역마차>와 <젊은 날의 링컨>, 그리고 <모호크족의 북소리> 등을 연달아 발표할 때다. 흔히 존 포드의 영화는 패밀리 전통에 대해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미화를 하고 있다고 읽혀지는데 사실 그것 이상으로 패밀리 공동체가 부서지는 걸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는 게 훨씬 흥미롭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처음 봤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보여주는 방식이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 아들의 대사 한 마디 없이 바로 점프해서 어머니로 넘어가는데 어머니가 ‘영광을 봤다’라고 하잖나. 그런 ‘디그니티’, 가족이 ‘디그니티’를 지키며 어떻게 죽음과 대면하는가를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부분이다.

존 포드 영화에서 말하기 힘든 부분들 중 하나는 영화에 나타나는 텐션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논구를 많이 했지만 존 포드의 살아생전 인터뷰에서는 그럴듯한 대답이 없었다. 존 포드는 1950년대 이후에 비평적 명성이 높아지며 유럽에서 엄청난 열풍이 불었던 감독이다. 인터뷰는 거의 코미디였다. (웃음)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인터뷰가 있는데 것도 재밌지만 서면으로 볼 수 있는 평론가들 인터뷰는 더 희극적이다. 존 포드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흔히 존 포드가 굉장히 권위적이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존 포드를 회고하며 그의 스태프들은 존 포드를 ‘고집불통 노인네’라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그와 일한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존 포드는 인터뷰를 통해 ‘나에게 영화는 직업이고 내 인생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좋아했고 그것을 즐겼을 뿐이지 자신이 한 번도 위대하다거나 하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들이 존 포드 영화 복합성의 깊이를 설명해주는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존 포드는 할리우드 인더스트리 내에 있었고 단 한 번도 스스로 각본을 쓰지 않았다. 당시 영화사의 사장들은 소위 ‘영화 밥 먹고 자란 사람들’이라 나름대로 영화의 도사였다고 한다. 그날 찍은 분량을 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재촬영하고 편집기사 불러서 편집하고 했던 시스템이 있어서, 감독은 실제로 공장의 현장책임자정도에 불과했었다. 이로 인해 존 포드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존 포드는 왜 ‘존 포드’일까. 그는 미국의 역사에 대해 굉장한 탐구를 했던 감독이다. 책도 많이 읽고 영화들을 보면 독립전쟁부터 서부시대는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시기의 영화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현재나 미래가 늘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황야의 결투>에서도 그렇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주인공의 회상부터 시작하지 않나.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다짐할 때 전통은 굉장히 강력한 흡입력을 보여준다. 놀라운 건 존 포드가 그려낸 현재와 미래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낙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나중에 이르러서 신화 자체도 스스로 해체하고 파괴하는 정도까지 발전한다. 이게 바로 존 포드 영화의 특이점이다. 많은 할리우드감독들은 존 포드만큼 미국을 사랑했고 미국적 가치를 주장했지만 그만큼 미국의 역사 이면의 양극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낸 감독은 없었다. 근데 이게 드라이하지 않고 센치하며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나. 존 포드 영화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잔치장면이다. 그는 이걸 거의 의식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밥 먹은 것을 마치 의식 치루는 것처럼 아기자기하게 보여준다. 일상에서 흥분되는 하모니의 순간들을 잡아내는 거다. 이 장면들은 언제나 순간적이다. 향연이 짧게 끝나고 그다음은 대체로 가족의 해체라든가 노동착취, 초기 자본주의의 극악함이 극에 달할 때의 상황이 전개된다. 로빈우드는 포드적 히어로는 결말에 늘 혼자 남는다는 말을 했다. 기이한 패러독스다. <분노의 포도>에서도 마지막에 어머니를 떠나는 헨리 폰다가 전혀 낙관적이지가 않게 보인다. 전통의 가치는 신화화된 시선에 뿌리를 두고 현재와 미래를 그려내지만 항상 현실의 복합적 조직들이 인물들이나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끝까지 ‘디그니티’를 잃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감동을 준다.

존 포드의 스타일은 수식이 없다. 그는 얼터너티브한 숏을 절대 쓰지 않는다. 그렇게 카메라에 담겨진 장면들은 편집실에서 그냥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다. 물론 이것도 존 포드의 전설 중 하나다. 그는 두 번 찍으면 불 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히치콕은 치밀한 콘티를 짰지만 존 포드는 그냥 굵게 제작하는 스타일이었다. 요즘엔 왜 다들 이렇게 찍지 못할까 의문이 든다. 현존하는 존 포드 스타일의 유일한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생각이 든다.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호소력이 있지 않나. 결국 영화는 다 인품 그대로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존 포드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존 포드는 정말 철두철미한 감독이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영화를 찍어왔고 엄청난 커리어가 붙었기 때문에 그는 전설의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관객1: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씀을 하실 때 공감을 했다. 감독 가치관의 옳고 그름이 영화에 투영되고 또 그것이 영화의 가치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는 불필요한 것 같다. 이면을 같이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겉으로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많잖나. 훌륭한 예술가는 그 레벨이 아닌 것 같다. 복합성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분노의 포도>같은 경우도 보수적인 사람이 만든 영환데 요즘 이야기 같지 않나, 용산 이야기 같고 어쩜 이렇게 현재와 똑같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노의 포도>가 존 스타인벡의 사회리얼리즘을 감상적으로 변형시켰다는 글을 보았는데 나는 이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면 가족이 트럭을 타고 난민촌으로 가는데 놀라운 숏이 나온다. 모든 난민들의 얼굴에 초점이 맞아있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굉장한 리얼리스트의 태도다. 물론 정서적으로 영화에서 찡한 것 도 있었다. 극 중 아들이 엄마와 춤을 추는데 엄마는 아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은 엄마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 융합되어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다. 보수적인 엄마와 운동권 아들이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지 않나. 이것에 흐르는 인간애라는 건 진짜 성숙한 무언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관객2: 영화 속에서 가족만이 유일하게 주인공들의 불명예를 안아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가족들은 현실 때문에 죽거나 떠난다. 양면성과 복합성을 드러내는데 이런 영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
김영진: 본인이 말씀하셔놓고(웃음),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된다. 이 영화도 충분히 산만하게 찍을 수 있는 영화인데 산만하지 않다. 비교적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편인데 이런 구조에서 양가성을 나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머리면 어머니는 가슴이라는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머리’라지만 아들들이 노조를 결성할 때는 갑자기 감동적으로 나오지않나. 이런 인물들의 세세한 지점을 보는 것이 정말 재밌다.


관객3: 영화에서 특이하게 노래가 많이 나오는데 어떤 부분은 뮤지컬이라 생각될 정도다. 노래의 영향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신다면.
김영진: 나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존 포드 개인의 자전적 느낌이 수용되었다 생각한다. 존 포드는 아일랜드계였고 미국에서 태어낫는데 11명의 형제들 중 막내였다. 그의 11명의 형제들 중 6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때문에 휴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 짙게 담겨있지 않나. 사실 존 포드의 댄스파티만 나오면 나는 이성을 잃는다. (웃음) 정말 따듯한 순간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나도 존 포드를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감독의 산맥을 넘어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거다. 여러분들과 나, 우리 모두 존 포드를 너무 익숙하게 보지 말고 제한적 영역을 뚫었던 위대한 감독이라는데 동의해야한다. 아직도 나는 존 포드를 탐구 중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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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존 포드의 <모호크족의 북소리>



앙드레 바쟁은 웨스턴에 관한 그의 글에서 서부의 정복과 소비에트 혁명을 비교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새로운 질서와 문명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미학적 차원을 부여한 유일한 언어는 바로 영화였다고 말한다. 웨스턴 장르는 미국(할리우드)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존 포드의 웨스턴 영화들은 미국에 대해 그가 갖는 역사적 비전을 담아내면서 진화했다. 그 중 1939년에 만들어진 <모호크족의 북소리>는 미국이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던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개척정신에 뿌리를 둔 미국의 기원을 그렸다. 존 포드의 첫 테크니컬러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자연과 풍경, 계절과 날씨의 변화, 빛과 어둠의 변화를 풍부하게 담아내면서, 이를 통해 인물의 감정과 내러티브를 전달한다.

영화는 커플의 결혼식 장면으로 시작된다. 뉴욕에서 생활하던 라나는 길버트와 결혼하게 되면서 새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를 따라 북부의 프론티어로 떠난다. 새 보금자리에 도착하던 날 밤, 궂은 날씨와 작고 초라한 집, 갑작스런 인디언의 등장에 놀란 라나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녀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으로 울먹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곧 생활력 강한 개척민 모습으로 변화해나간다. 변화의 과정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강인함과 생명력은 위기에서 다시 딛고 일어서는 공동체의 회복력과 동일시된다. 계절이 순환하듯, 공동체의 삶도 위기와 희망을 오가며 다져져 가고 있다.



영화는 라나와 길버트를 비롯해서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주변캐릭터들을 그리면서, 그들이 구성하는 공동체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다. 불태워지는 집과 요새를 습격해오는 인디언처럼 위협과 공포는 공동체 내부에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한편, 공동체 바깥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은 과감히 생략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날 밤의 깊은 어둠과 폭우, 그리고 전쟁터의 참혹함을 회상하는 길버트의 긴 독백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개척해나가야 할,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에 맞서는 과정이다. 요새 바깥, 숲과 들판에서 출몰하며 공동체를 위협하는 인디언들은 그러한 환경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은유적 표현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공동체의 요새가 포위당하게 되고, 길버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웃 요새로 향한다.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은 인디언의 추격을 받으며 달리는 장면이다. 숲과 강, 들판을 지나고, 밤의 어둠에서 밝은 태양, 석양의 붉은 빛에 이르는 시공간의 변화와 함께 길버트와 인디언이 끊임없이 달리는 장면은 단순한 추격 장면 이상의 감흥을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위기의 순간이 지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성조기를 꽂는다. 흐믓한 표정으로 국기를 바라보는 모습에는 백인과 흑인, 그리고 인디언이 어우러져 있다. 환경에 맞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곳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개척정신과 이를 위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미국적 이상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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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의 <아파치 요새>(1948)는 서부영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영화이다. 서부영화는 기본적으로 충돌과 대립의 영화로 동부와 서부, 문명과 야만,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선과 악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충돌의 장이다. 이러한 구도를 확립한 존 포드의 <역마차>를 보자. 문제를 가진 공동체가 있고 공동체 바깥에서 서부의 사나이가 홀연히 등장한다. 둘은 충돌을 일으키지만, 결국 주인공의 탁월한 무력과 정의감으로 문제는 해결되고 다시 서부로 떠난다. <역마차> 이후의 모든 서부영화는 이 서사를 다양하게 변주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파치 요새>는 이 공식을 흥미롭게 변주한 영화 중 한 편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서부영화 속의 명백한 이항적 요소의 대립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꿔 놓는다. 단순히 기존의 판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는 아파치 요새로 부임하는 헨리 폰다에서 시작한다.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깐깐해 보이는 ‘동부의 사나이’인데 역시나 부임하자마자 아파치 요새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하며 기존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킨다. 이는 명백한 동부와 서부의 충돌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립이 등장하는데, 바로 공동체 외부에서 ‘야만’을 상징하는 아파치 인디언들이다. 즉 공동체내부에서는 동부와 서부의 질서가 충돌하고, 밖에서는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인디언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존 포드는 이 대립 구조를 선과 악의 구도로 풀지 않는다. 헨리 폰다와 존 웨인의 대립만 보아도 그렇다. 언뜻 보면 헨리 폰다는 지나치게 질서만을 강조하는 꽉 막힌 인물로 보이며 심지어 전투에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영화는 이를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헨리 폰다를 긍정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특히 <아파치 요새>가 보여주는 서부 공동체와 인디언과의 관계는 지금 보아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 존 웨인은 인디언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까지 한다. 인디언들은 애초에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며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인디언들을 불행하게 하는 양심 없는 미국인들이다.

<아파치 요새>가 특별한 또 다른 지점은 이 영화가 갖는 서부영화로서의 자기 반영성이다. 이 영화는 아파치 인디언이 미 기병대를 전멸시켰던 서부 개척 시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실화를 영화화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가 신화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헨리 폰다는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기존 공동체와 음주에서 복장, 심지어 연애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헨리 폰다는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사적 사실대로 아파치에게 전멸 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퀀스가 바뀌면 존 웨인이 기자들에게 ‘영웅’ 헨리 폰다에 대해 얘기하며 ‘4열 종대’로 아파치 인디언과 싸우러 나간다. 이는 지금까지의 갈등을 급격하게 봉합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이질감을 줄 정도이지만 서부극의 성립 과정을 자기 반영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은 결국 헨리 폰다의 죽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로 만들어진 것이나 후세의 사람들(존 웨인)이 이를 용감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신화화했던 것. 그런 맥락에서 <아파치 요새>는 메타 서부극으로도 불린다.

이처럼 <아파치 요새>는 많은 서부영화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어떤 지배적인 가치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존 포드는 어떤 면에서는 헨리 폰다, 어떤 면에서는 존 웨인, 또 어떤 면에서는 아파치 인디언들의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를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보기를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하나의 주제를 찾으려 하면 오히려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 길을 찾는 방법은 물론 관객 각자의 몫이다. (김보년)

 ▶▶상영일정
1월 17일 (일) 19:00
1월 27일 (수) 16:00
2월 3일 (수) 13:00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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