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로지의 <하인> 상영 후 김영진 평론가와의 시네토크

 

지난 4월 13일 저녁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조셉 로지 감독의 <하인> 상영 후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조셉 로지 감독의 필모그래피부터 영화에 대한 해설까지 흥미롭게 들려준 그의 영화에 대한 해설을 여기에 옮긴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영화 재밌지 않나?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는 정반대 결과를 갖고 있는 영화다. 아마도 1960년대와 2010년 이라는 시대적 차이 때문 일거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와도 유사성이 있다. 동시대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유사한 주제의식을 갖게 됐는지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다.

조셉로지의 필모그래피는 유럽에서 꾸준히 영화를 찍은 덕에 상당히 다양한 편이고 수준도 들쑥날쑥한 편이다. 퇴작도 좀 있고 그렇지만 지금 본 <하인 The servant>이나<사랑의 상처 Accident>는 두말 할 나위 없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다.

 

조셉로지 감독은 미국 감독인데 좌익 쪽에 관심이 많아서 러시아에서 영화를 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에게서 사사를 받기도 했다더라. 상당히 레드컬러에 있던 사람이라는 얘긴데, 50년대 초에 B무비 몇 편을 찍은 다음 매카시 광풍이 불 때 증언하기를 거부하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에 있는 것보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유럽에 갔을 때 네오리얼리즘이 한바탕 지나가고 영화 사업이 부흥할 무렵이어서 소위 모던시네마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안소니 퀸의 자서전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데, <길>이후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있는 거리의 수많은 카페에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다 모여 있었다더라. 여기서 펠리니 감독이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0미터 가는 동안에 몇 명의 프로듀서들이 나한테 딜을 제안을 하는 지 나랑 내기 할래? 몇 명 이하면 누가 술값을 내고’라고 내기를 했는데 펠리니가 이겼단다. 그럴 정도로 유럽 영화산업이 좋을 때였는데 누벨바그가 나오고 무엇보다 그런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있었을 때 조셉 로지가 건너간 거다. 사실, 굉장히 영화가 지적이고 지식인 관객들이 매우 좋아할만한데다 그런 시대적 흐름을 만나면서 일년에 한 번 꼴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고 지금의 대표작들도 많이 나오게 된 거다.

 

이 영화는 보여 지는 것, 들려지는 것 등 모든 레이어에서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영화 처음 시작부분, 토니에 집에 갔을 때부터 모든 앵글이 극적이다. 전경과 후경에 인물을 놓고 거리를 강조하는 앵글을 매우 많이 사용 한다. 전경에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우리를 보고 있으며 깊이감이 강하게 잡혀있는 구조로 구도가 잡혀있다.

초반에는 토니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공간의 지배권을 계속 갖고 있다. 수돗물 똑똑 떨어지는 그날 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와이드로 거리를 두고 공간감과 부피감이 유지가 되는데 토니하고 수잔이 항상 점유권을 갖고 있는데 계속 휴고 바렛이 끼어든다. 상황적으로도 끼어들지만, 아까처럼 노크 안하고 들어오듯. 그럴 때도 구도 상으로 문이 열려있고 거울로 토니하고 수잔이 있을 때 아직 안 들어온 상태가 보이는 등으로 그들의 구도에 바렛의 계속되는 침입의 모티브를 시각적으로 강조 한다. 수돗물 떨어지는 그 날 밤 이후에 조금씩 역전되는데 이후 수시로 바뀐다. 이미 그때는 이미 영화 중반까지 확립된 지배권의 우열관계는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조명을 굉장히 특이하게 해서 토니가 앞에 있어도 우월한 느낌이 아니라 불쌍해 보인다. 극적인 앵글 하에서 거리를 강조하는 공간의 깊이감을 통해서 지배관계 전복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또 이 영화에 거울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거울이 있으면 거울에 비친 인물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면 속 인물과 같은 위치를 차지함으로서 동일화되기 쉬운 앵글이다. 토니같은 경우 굉장히 강해 보이는데 귀족이고 유산을 받았고 출신도 좋고 상류층인데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그의 정체성이 사실 굉장히 연약하다는 것을 계속 구도 상으로 암시하고 있다. 또 그 빛과 조명이 서양식은 우리와 달라 굉장히 그림자를 많이 쓴 걸 알 수 있는데 가령 심야에 들어왔을 때 그림자가 말을 한다. 당당하게 그림자가 말을 하고 심지어 토니를 압도하고 있다. 또 사운드나 연상효과도 잘 쓰고 있는데 후반부에 숨바꼭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장면은 저항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다음 신이 비가 오면서 그 물줄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또 악마 같은 여자가 찾아와서 다시 연극을 하고, 그 때 조명이 어떻게 그렇게 비가 오는 와중에 인물의 그림자를 불규칙하게 흐르는 하는 지. 이런 식으로 이전에 반복되어 왔던 것들이 연상 작용을 일으키며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시청각적 효과들이 상승하는 굉장히 공 감각적이다.

또 부자 집에만 있는 많은 그림들과 사진들을 이용한 구도들도 있다. 초반에는 전형적인 귀족적 초상화들, 정돈돼있고 권위적이고 단아한 것들 위주로 프레이밍을 많이 하다 나중부터는 훨씬 음침하고 현대적인 그림들이 프레이밍이 많이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소용돌이치는 것이 마지막 파티장면 씬이다. 일단 파티 장면 자체가 그림의 한 장면처럼 구도가 잡혀있고 여자들이 옷도 그렇게 입고 있다. 마치 귀부인들처럼. 하지만 근데 전부 광기에 제정신으로 안 보인다. 그게 어디 파티에 가는 사람들처럼 보이나. 카페에서 봤던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좀비처럼 앉아있고. 초반에 보여줬던 귀족사회의 단아함 권위 우아함 이런 것들을 보여줬던 구도로 앉아있는데 그 내면은 정 반대인 그런 프레임으로 앉아있고 정중앙에 문제의 그녀 베라가 거울 앞에 있다. 사건의 지휘자는 바렛이지만 실행자인 그녀. 여기서 수잔의 캐릭터도 매우 재밌는데 처음 수잔은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올 정도로 싸늘하게 생겼고 직감도 좋다. 하지만 수잔도 무너지고 만다. 그런 식으로 기존에 갖고 있었던 아이덴터티가 다 허물어져버리는 이런 것들을 이 서사적 흐름 말고 시청각적인 것을 다 동원해서 관객들을 설득을 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저것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였던 것 같다. 영국이란 사회는 사실 완강한 계급사회이고 지금도 그 틀이 유지되고 있는. 우리는 아직 집안 따지고 그런 건 남아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왕족이 다 망했고 수직 이동이 굉장히 심했던 사회를 살지 않았나? 20세기엔, 요즘엔 우리도 계급사회가 됐는데. 저 사회는 수직이동이 불가능한 고착된 사회인 거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라는 유명한 문화 평론가이자 문화이론가가 있는데 그분이 노동자의 아들인데 옥스퍼드에 들어갔다. 그런데 레이몬드 아버지 친구들이 레이몬드 아버지와 레이몬드를 비난했다더라. 너는 노동자의 자식이 왜 대학에 갈 수 있었고 또 옥스퍼드에? 우리 같으면 동네잔치 하고 했을 텐데 거긴 오히려 거꾸로 자기 계급에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가는 사회였던 거다.

 

60년대는 모든 것이 해체되는 사회였고, 60년대 후반에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그 유사혁명의 기운을 생각해보더라도 그 전까지 여러 가지 전조들이 있었겠다. 영국사회도 분명히 그런 게 있었고, 비틀즈가 나오고 흔들리는 런던 이런 얘기가 있었듯이, 그런 식의 시대적 맥락과 조우하면서 또 이 조셉 로지는 막시스트였기 때문에 그런 얘길 한 거 같다. 가만이 보면 그들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요인이 있었다. 우리의 추론으로도 엄청 경계가 심하지 않은가. 저 계급은 조금만 프레임에서도 벗어나면 안 되는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단단함으로 뭉쳐진 폐쇄성이 아니고 사실은 굉장히 연약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일단 저 휴고 바렛도 굉장히 겉으로는 빈틈없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허물어지지 않나? 자신의 정욕에 무너진 거다. 애인한테 준비가 안 됐는데도 떠나자고 한 건 자기 자신을 추수를 수 없는 것에 대해 안간힘을 쓰는 거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보면 여동생도 아니었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럴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 그날 밤엔 그리고 약혼녀와의 관계도 깨지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기존의 자기 생활과 다르게 완전히 폐인처럼 살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인물은 자발적인 생명력이 없다. 그걸 암시하는 모습이 난간에 프레이밍 되는 모습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이 보이고 그 안에 내적인 생명력이 전혀 없는 인간으로 주인공을 그려내고 있다. 그에 비하면 되게 야비하고 비열하지만 무서운 남녀 주인공인 토니와 베라. 이들처럼 감당 안 되는 캐릭터들은 사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웃음) 굉장히 욕망에 충실하고 카멜레온 같이 변하는데 모럴이 없다. 대신 굉장한 생명력이 있는 건데 토니는 이런 생명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퇴행한다. 그래서 마치 엄마 젖을 먹듯 술을 먹으면서 유치한 어린애들의 놀이를 하게 된다.

조셉 로지라는 감독은 당시의 영국의 유한계급의 내부를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으로 봤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영화의 외부, 텍스트를 감싸고 있던 당시 사회의 콘텍스트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런 기운이 있지 않았나 싶다. 예민한 숙주처럼 조셉 로지라는 감독이 그걸 영화화 한 거고, 그게 그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킨 거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고전이 된 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다.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르다. 거기에서도 여전히 침입의 모티브가 중요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관계도 중요하며 그건 거의 모티브가 똑같다. 근데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데, 당시 우리나라는 사회적 중산층이라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이층집을 짓게 되고 그리고 거기로 이사를 가는 집안이, 와이프가 열심히 삯바느질 하고 있고 남편은 피아노 알바하고 있는데 고객이 여공들인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중산층이면 얼마나 허약하겠는가. 그 허약한 내부 안에 팜므파탈이 들어가 무너뜨린 거다. 근데 얘기가 되는 게, 그 당시에 사회문제가 굉장히 많았다더라. 식모 때문에 패가망신한 가장들이 많았다던데, 당시 신문 사회면에서. 영화 볼 때 낮에 가면 아줌마들이 많았는데 이쪽은 주인아줌마 이쪽은 시장 보러 나온 핑계인 가정부들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했다더라.

 

비슷한 주제의식과 모티브를 갖고 있지만 그 토대는 다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이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앵글보다는 시각적 모티브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다. 미닫이문이 열리면 안방이 펼쳐지는 장면은 엄청난 미장센 효과를 발휘하고 있고, 담배 연기를 남자 얼굴에 뿜을 때 마치 영토 확장을 위한 침입처럼 담배 연기도 매우 잘 쓰고 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원작에 대한 리스팩트가 없다. 현재는 그게 안 통한다고 생각한 거다. 첫날 밤 이후 이정제가 출근하기 전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동침을 했으면 대부분은 여자가 심리적 지배권을 갖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또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생각을 추론 해보자는 거다. (웃음) 자신만만하게 음식을 해서 가는데 그런데 이정재가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거기서 오히려 피아노에 압도를 당한다. 너는 내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시위하고 있는 거다. 그 재벌2세가 그리고 돈을 주면서 게임은 끝난다. 그 김기영의 하녀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돼 버린 거다. 그 계단 모티브도 김기영 영화에서처럼 안 쓰이고 이동이 안 되는 의미로 그리고 그 것을 계속 또 강조하고 있다. 시대가 다르다는 거다. 그 쪽 계급 자체가 난공불락인 거다. 결국은 자살 퍼포먼스 한 거 밖에 없게 된다. 이게 임상수가 보는 200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라는 거다. 김기영의 하녀와 전혀 다른, 대신에 임상수 감독은 특유의 시니컬한 장면을 마지막에 남겨 놓는데 ‘결국 이런 니들 별거 없다. 그렇게 살아봐야 맑고 천진했던 애를 괴물로 키우는 거 밖에 더 해?’라는 잔인한 저주의 논평을 엔딩에 해 놓고, 그 전에는 영화 맨 처음에 나왔던 자살하는 여자처럼 전도연도 자살을 시키고 끝을 맺는다. 그게 200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라는 건데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그렇게 각자의 시대적 콘텍스트를 갖고 나온 영화들인데 조셉로지의 <하인>이라는 영화는 그 당시의 60년대의 시대적 문맥에서 굉장히 시사적인 파워를 갖고 있고 이 분이 이런 유형의 소재를 매우 능숙하게 다룬다. 제가 이분 영화 중에 또 좋아하는 게 <미스터 클레인Mr. Klein>이라는 영화인데 알랭들롱이 나오는 영화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영화다. 알랭들롱이 조셉 로지 감독을 모셔다가 영화를 제작을 하고 자기가 주연을 했다. 영화에서 알랭들롱은 아주 악질적인 미술골동품 수집가이고, 유대인 잡아들일 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고가품들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은 이름인 유대인인 클라인이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주소를 그쪽으로 이전을 해 놓음으로써 알랭들롱은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을 확인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오히려 유대인 클라인의 아이덴티티를 점점 알아가게 된다. 유대인 클라인은 자기와 정 반대로 살았다. 친구도 너무 많고, 굉장히 지적이고, 자기의 거울 같은 걸 보는 건데 결국 나중에 두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섞인다. 그래서 주위의 도움으로 나올 수도 있는데 유대인 클라인의 안위가 궁금해서 또 수용소로 간다. 친구가 말리는데도 자꾸 유대인 클라인의 뒤통수를 쫓아 들어가지만 결국 그곳에는 온통 유대인 뿐, 그것을 보고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라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도 <하인>처럼 거울 미장센이 엄청 나온다. 어디 갈 때마다 있다. 거울을 보면서 알랭들롱이 나중에 거울에 있는 게 자기인지 의심하는. 사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굉장히 강력한 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지만 그게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에 대해서 그 복합적인 추론에 관해서 감독은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조셉로지 감독은 막시스트였으니까 당연히 사회변혁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현대사가 어떻게 보면 좌파들에게는 좌절의 역사이지 않은가. 소비에트 공산화가 됐는데 스탈린 이후에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때도 프랑코가 이겼고 이럴 때 60년대 말에 로지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스페인 내전이 지난 한참 후에 50년대 초반인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는데 어떤 정갈한 사람이 세상은 선과 악 좋은 놈 나쁜 놈 이런 식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다. 지당한 명제이기는 한데 그 당시 감독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줬단다. 앞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이 세상의 중층적인 그런 면을 탐구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작품세계에 기초를 세우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아이덴티티의 교환 경쟁 전복 등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소사이어티 내에서 가정 내에서 관계 내에서 굉장히 다양한 레이어로 펼쳐지는 것들을 즐겨 다루고, 그럴 때 이 조셉 로지 감독의 뛰어난 비쥬얼 스토리텔링이 빛을 발했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관객1: 다른 영국배우들 연기는 자주 봤지만 더크 보가드라는 배우는 거의 못 봤는데 오늘 보니까 연기 매우 잘 하더라. <나이트포터>에 출연한 걸로 아는데 그 외에 다른 출연작과 경력에 대해서 알고 싶다.

김영진: 제일 유명한 출연작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거기서 시한부로 죽어가는 말로를 연기한다. 사실 저런 식의 마스크와 감성을 갖고 있는 배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남자지만 굉장히 섬세한 모습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굉장히 악하게 보일 때와 굉장히 연약하게 보일 때가 둘 다 어울리는 그런 유형의 마스크와 연기력을 보여 준다. 조셉 로지 감독의 영화에 많이 출연 했다. 더크 보가트는 로지의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공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너무 헌신적으로 잘 해 주니까 조셉로지가 너무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베니스에서 죽다>는 말러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비스콘티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많이 투사된 거다.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그 영화에는. 토마스 만의 소설 그대로 말러가 주인공이지만 비스콘티도 영화 찍을 때, 쇠약해서 휠체어에 타고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보면 줌이 굉장히 많은데 예전 같으면 트랙으로 다 했을 것을 앉아서 했기 때문에 줌으로만 당겨 찍었다더라. 더크 보가트가 연기 하는 인물은 늙은 말런데 페스트가 창궐하고 있는데 베니스와 와서 휴양을 한다. 그러다 너무 아름다운 미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저 먼데서 보기만 한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게 영화의 내용이다. 그 생명력에 반하는 거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이 바닷가에서 역광을 받으면서 서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를 보면서 눈을 감는데 해변 가에서 너무너무 잘 어울린다.

 

관객2: 거울이나 그림자 조명, 이런 기법을 얘기해 주셨다. 영화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게 사람의 신체 중에서 발이 에로틱한 분위기로 부각이 되더라. 신체 일부 중에서 왜 발이 이렇게 부각되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페티쉬라 한다. 신체 일부에 대한 패티쉬. 우리가 욕망을 느낀다고 할 때, 몸 전체로의 사랑이 아니라 어떤 인화점이 있지 않은가. 구두나 긴 손가락, 손톱만 보면 미치는... 로지 감독은 발에 대한 페티쉬가 있는 것 같다. 공중전화에서 베라에게 전화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인데 발을 보지 않는가? 영화 처음 볼 때 관객들이 깜짝 놀라는데, 욕설을 퍼부으니까, 근데 이런 반응은 욕망을 느끼는 거에 대한 역반응일 수 있다. 바렛의 시점으로 본 그 샷이 있었기 때문에 비치라고 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에 성냥불을 그은 것이다. 베라도 마찬가진데 그런 구도를 봤을 때 화면상의 논리나 전조로는 베라의 발 때문에 틀림없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감독들은 패티쉬가 있다. 음악도 블루스와 재즈를 쓰고 가사도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뭔가 영화 전체가 느낌이 관능적이다.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주요 사건도 그것 때문에 다 사단이 일어나니까.

 

정리: 김준완(관객에디터) | 사진: 최용혁(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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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로지의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미국 위스콘신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와 영국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연출활동을 했던 국외자적 영화세계에 대해 이 짧은 지면에 모두 소개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시네마 오디세이 part2: 친밀한 삶'에서 그의 영국 시절 마스터피스로 손꼽히는 <하인>(1963)과 <사랑의 상처>(1967)가 상영되는 만큼 이 두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셉 로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1960년대의 영국영화계는 '찻잔 속의 폭풍'이라 할 만큼 새로운 영화적 시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시기로 기억된다. 누벨바그나 아메리칸 뉴 시네마처럼 세계영화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정도는 아니지만 매카시 광풍이 창작의 자유를 위축시켰던 당시의 할리우드와 달리 소재에 대한 제약이 없었고, 영어사용권이었기에 제대로 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기 힘들었던 제3국(?)의 연출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앵그리 영 맨'으로 불리는 일군의 신진 감독들, 토니 리처드슨(<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8))과 카렐 라이스(<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와 린지 앤더슨(<고독의 보수>(1963)) 등이 '프리 시네마' 운동을 일으킨 한편에서 로만 폴란스키는 조국 폴란드를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와 <혐오>(1965)와 <궁지>(1966)를 만들었고 프랑스의 프랑소와 트뤼포는 <화씨 451>(1966)을 작업했으며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모더니즘 영화 <욕망>(1966)을 연출했다.

미국인 감독들의 영국 러시 또한 만만치 않아서 리처드 레스터는 비틀스를 출연시킨 <하드 데이즈 나이트>(1964)를, 로저 코먼은 에드거 앨런 포 시리즈의 몇 편을, 시드니 루멧은 북아프리카의 어느 영국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언덕>(1965)을, 프레드 진네만은 <사계절의 사나이>를 영국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조셉 로지는 매카시의 빨갱이 혐의를 피해 1950년대 초에 영국으로 건너와 <Time without Pity>(1957), <Blind Date>(1959), <The Criminal>(1960), <Eva>(1962) 등 일련의 범죄영화로 입지를 굳힌 후 극작가 헤럴드 핀터와 손잡고 만든 일명 '관계 삼부작' <하인> <사랑의 상처> <사랑의 메신저 The Go-Between>(1970)를 통해 작가의 지위에 올랐다.

 

<하인> 관계의 역전

 

 

<하인>은 조셉 로지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조력자로 꼽히는 배우 더크 보가드와 헤럴드 핀터 셋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포텐'을 터뜨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로빈 모옴의 동명소설을 헤럴드 핀터가 각색한 이 영화는 귀족 토니(제임스 폭스)에게 고용된 저택 관리인 바렛(더크 보가드)이 주인의 공간과 정신세계를 야금야금 장악해가는 과정을 통해 관계의 뒤집힘을 다룬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점하지만 계급이나 권력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더 잘 이해하는 손아랫사람에 의해 정신적 데미지를 입는 자의 이야기는 조셉 로지가 심심찮게 주목해온 주제다.

계급의 역전이 빚은 부조리한 관계의 풍경화는 조셉 로지가 <하인> 이전 <Eva>에서도 다뤘던 내용이다. (다만 <하인>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프랑스와 달리 범죄영화에 대해 평가가 박했던 영국저널의 풍토 탓이었다.) 하여 그의 영화는 정치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녹색 머리카락의 소년>(1948)은 머리 색깔이 녹색으로 변한 소년이 갖게 된 공포를 통해 매카시즘을 풍자했고, <저주 받은 아이들>(1963)과 <왕과 조국>(1964)은 전쟁 반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으며, <Time without Pity>와 <Blind Date>는 사법과 사형 제도에 대해 비판한 영화였다.

조셉 로지의 일관된 반골 성향의 영화적 태도는 그가 쌓아온 예술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연극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조셉 로지는 1935년 소련을 여행하며 그곳의 예술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으로 돌아와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우는 연극 활동에 적극 기여하게 된다. 또한 90편이 넘는 라디오 정치 쇼를 제작, 연출하고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니, 그의 정치저인 성향은 스튜디오와의 잦은 불화를 가져왔다. 결국에는 공산당으로 지목되어 반미조사위원회의 증인으로 출석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영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몇몇 비평가들은 <하인>에 대해 할리우드의 영화감독에서 타지를 떠도는 국외자가 된 조셉 로지의 심정을 반영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다만 정치적인 시선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탁월한 이미지 연출 능력 때문이다. 예컨대, 서있는 바렛이 잠이 든 토니를 내려다보는 첫 대면의 구도는 앞으로 토니가 바렛 위에 군림할 것임을 암시하며 바렛과 토니, 그리고 토니의 여자 친구를 굴절되게 비추는 거울상은 이 영화가 어긋난 관계의 초상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은 카메라가 저택을 벗어나지 않는 연극적인 구도 속에서 속박의 기운을 풍기며 사회적 질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이다.

 

<사랑의 상처> 관계의 굴절

 

 

조셉 로지가 특별히 헤럴드 핀터가 참여한 작품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건 잘 알려졌다. 극작에 능한 핀터가 연극의 제한적인 무대를 감안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적합한 언어로 각색한 탓이 크지만 이를 받아든 로지가 연출자의 태도를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유지한 것도 한몫했다. <하인>의 바렛이 처음 토니를 만나러 간 저택에서 곳곳을 신중하게 훑어보는 시선에는 공간(무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로지와 핀터와 보가드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사랑의 상처>에서 이와 같은 시선의 연출은 더욱 증폭된다.

<사랑의 상처>는 대학교수 스티븐(더크 보가드)이 젊은 여자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으면서 겪게 되는 혼란한 감정의 결을 성찰적으로 바라본다. 안정된 지위, 화목한 가정, 교외의 번듯한 저택까지, 모든 걸 가진 듯한 스티븐은 미성숙한 제자 윌리엄(마이클 요크)과 마음을 다 잡지 못하는 그의 약혼녀 애나(재클린 사사르)에 비해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위치에서 상황을 조망한다(하여 스티븐이 2층 서재에서 윌리엄과 애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 영화의 가장 특징적인 컷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제자의 여자를 공개적으로 탐할 수 없는 사회적인 제약,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윌리엄과 동료 교수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들만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스티븐은 마음속으로만 애나를 탐할 수밖에 없다(그래서 언급한 시선의 컷은 또한 멀리서 애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스티븐의 처지를 상징한다).

멀찍이서 지켜보는 까닭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비롯한 조셉 로지의 영화적 태도를 두고 혹자는 '국외자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확실히 미국을 떠나 유럽 각지를 돌며 만든 영화들을 보면,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사랑의 메신저>)이 됐든, 이념의 대립(<트로츠키 암살>(1972))이 됐든, 정체성의 문제(<무슈 클라인>(1976))가 됐든 독립한 위치에서 날카롭게 현상을 관찰하는 어떤 욕망이 강하게 감지되지만 결코 그 속으로 들어가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없는 일그러진 형태로 마무리되곤 했다.

이를 두고 조셉 로지는 "영화는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고통 받고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답을 주지는 않는다."고 자신의 영화적 철학을 압축했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조셉 로지에게 있어 영화는 곧 삶이면서, 사회와 제도와의 투쟁 속에서 쟁취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데뷔했지만 정치적 성향 탓에 상업영화의 한계와 대립해야 했고 급기야 조국에서 쫓겨나 평생을 독립영화인으로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상처>는 스티븐이 차사고로 목숨을 잃은 윌리엄과 부상을 입은 애나를 깨진 앞 유리창을 통해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처럼 조셉 로지는 삶이라는 거울에 비춘 굴절된 운명을 영화로 재현하며 반평생을 살다간 국외자로 기억된다.

 

글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 (www.hernamw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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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클럽] 조셉 로지 <무슈 클라인>

지난 3월 20일 열린 시네클럽 행사에서는 조셉 로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무슈 클라인>을 상영하고,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조셉 로지의 정치학’이란 제목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은 <무슈 클라인>이 갖는 의미와 무엇보다 조셉 로지가 자신의 영화에서 보여준 정치적인 태도에 대해 알아보고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루키노 비스콘티 전을 개최하면서 <저주받은 자들>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아직 진행되지 못했지만 2년 전 쯤부터 조셉 로지 특별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로지의 영화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무슈 클라인>을 한 번 쯤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이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6, 70년대에 파시즘이나 2차 대전 당시의 시기를 다루었던 영화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앙리 루소는 「비시 신드롬」이라는 책에서 이 영화가 나왔던 70년대 초를 ‘깨어진 거울의 시대’라고 묘사한다. 이때는 회상과 의문을 제기하는, 홀린 듯한 이끌림의 시대이자 회고 풍조를 통해 프랑스의 40년대의 문제들이 유령처럼 되돌아오는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되돌아왔던 문제들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반유대주의, 대독협력,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몇 편의 영화들이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레네의 경우 일찍이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지만 60년대 말에는 마르셀 오퓔스의 <차와 동정>이라는 작품이 있고, 70년대 초에는 멜빌의 <그림자 군단>도 등장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루이 말이 만든 <라콩브뤼시앵>은 굉장히 큰 여파를 불러 일으켰다. 앙리 루소는 이런 영화들이 등장한 것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촉매가 되어 그런 역사적 시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70년대 초에 프랑스에서 이런 일종의 회고주의가 등장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시기에 경제적인 위기가 불어 닥침에 따라 미래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기 보다는 과거의 노스탤지어나 복고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 중동에서의 위기와 관련하여 반유대주의나 유대적인 기억이 불거지게 된 면도 있다. 동시에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만들어진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샤를 드골이 몰락하면서 그 신화에 대한 의문들과 질문들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기도 했다. 74년부터 78년까지 제작된 영화 중에 독일의 점령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만 45편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그 이전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이런 영화들은 몇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발형 영화들이다. 그 시대에 있었던 끔찍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인데 이건 가장 일차적인 부분인 것 같다. 잊고 있었다든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노스탤지어적인 영화들이다. 분노를 보여주기보다는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복고적인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단어가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탐미적인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루이 말의 <라콩브뤼시앵>이 이에 해당되며 방금 보신 영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은 앙리 루소가 기회주의적 영화라고 표현하고 있는 성인물 같은 것들이다. 나치 점령기의 부분들을 포르노그라픽한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나온 영화가 방금 보신 <무슈 클라인>이다. 또한 이 영화는 70년대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70년대에는 굉장히 패러노이드적인 영화, 컨스피러시 필름 등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에서 이는 정치적인 느와르 같은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특히 시드니 루멧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도 그런 특성들을 약간 갖고 있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가 결국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유형의 영화중에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동시에 굉장히 잘 직조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일종의 덫에 걸린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로베르 클라인이 자신과 이름이 같은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찾아가는 추적의 과정 사이에 잠깐씩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의 변화들이 인서트처럼 많이 들어가 있다. 별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이런 부분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클라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그를 호송해가기 위한 준비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주 잘 직조된 태피스트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크레딧 시퀀스에 등장하는 태피스트리를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셉 로지는 종종 영국인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위스콘신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17세 때부터 이미 연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나중에 극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로지는 오손 웰즈와 굉장히 친했고 특히나 그가 만들었던 <심판>이라는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심판>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으며, 몇몇의 공간적 배경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로지는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었다. 미셸 시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헐리우드의 사람들은 늘 배우의 스캔들에만 관심을 갖고 잡담만 나누었는데 공산당에 입당하면 어떤 문화적 소양을 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입당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의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로지는 크게 보면 네 가지 정도의 시기를 겪게 된다. 초기 헐리우드 시기가 있고, 영국에서도 두 가지 정도로 시기가 나누어지며 작품의 경향이 조금 달라지고, 마지막으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보내는 시기가 있다. 그때마다 그는 이름을 바꾸어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로지에게 굉장히 중요하게 작동했을 것 같다.

<무슈 클라인>에서 역시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굉장히 큰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베르 클라인이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추적한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도플갱어적인 스토리다. 이런 부분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거울이나 여러 가지 공간적인 매치들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거울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치들이다. 클라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변화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배경들이 특정한 사건을 몰아가는 양상을 취하고 있다. 특히 크레딧 시퀀스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퀀스가 이 영화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며 보는 사람을 굉장히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여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되는데, 입술을 뒤집어 치아 상태를 보고, 자를 대어 얼굴의 크기를 재며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여부를 의사가 획인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빠지면 이 여자가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클라인을 추적하는 스토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사실상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먼제 이 장면은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냉담한 방식으로, 섹슈얼한 부분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가운데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다음 시퀀스에서 이어지는,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장면의 활력성과 비교된다. 동시에 클라인은 나중에 앞선 그 여자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첫 번째는 클라인이 유대인에게 넘겨받은 그림을 흥정하는 장면이다. 클라인은 앞서 의사가 했던 것과 똑같이 그림의 치수를 잰다. 또한 그가 잔느 모로를 만났을 때, 그녀는 클라인의 얼굴 크기에 대해 말하며 그가 가진 동물적인 지점을 이야기한다. 이렇듯 그가 클라인을 찾아가는 개인적인 여정, 즉 자신의 자아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42년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 안에서 유대인을 다루었던 프랑스 사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의 곳곳에 그런 느낌을 주는 부분들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그가 유대인을 조롱하는 내용의 공연을 보는 장면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클라인의 여자친구만이 유일하게 역겹다는 반응을 보이며 나가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가 여기를 떠나자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무대에서 ‘유대인들은 떠나야 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 순간과 교묘하게 겹쳐진다. 이는 클라인이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결국 반유대주의적인 정서들이고, 이는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프랑스 사회가 끊임없이 덮어버리려고 했던 문제다. 실제로 대독협력이나 반유대주의라는 문제들을 대치하는 것으로서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상당히 많은 장면들은 인물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얼굴을 굉장히 과도한 시간동안 차례로 훑어나가는 것, 그리고 근방의 레스토랑에서 클라인을 찾는 급사를 따라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 그러하다. 이런 장면들은, 의도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독협력을 하거나 반유대주의 정서에 몰입해있었던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을 고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도플갱어적인 또 다른 존재성의 호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와, 42년에 프랑스인들의 무관심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을 연결해서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차이를 넘어서서 그 둘이 갖고 있는 수렴점이라는 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바라보는 영화로, 선구적인 작품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진행이나 카메라 움직임, 미장센 같은 부분들 역시 잘 연결되어 있어서 작품으로서도 굉장히 훌륭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와 그것을 다루는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은 작품이 아닌가 한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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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에이젠슈테인에게 영화연출을 배웠고, 50년대 매카시 열풍 하에서 프리츠 랑의 <M>을 리메이크해 매카시즘을 비난했으며, 그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했던 인물. 미국 국적을 갖고 유럽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상과 입지를 확보한 몇 안 되는 감독이었으나, 자신을 버린 조국으로 돌아가 마음껏 영화를 찍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나카타 히데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조셉 로지: 네 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주인공으로 남겨진, <하인>과 <무슈 클라인>을 비롯해 바로 이 영화! <트로츠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조셉 로지이다.

 

조셉 로지의 1972년 작 <트로츠키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은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사의 전설적 인물인 레온 트로츠키의 생애 마지막 시간을 그리고 있다. 1940년 멕시코의 노동절 시가행진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트로츠키가 등산용 피켈에 의해 쓰러진 그해 8월 20일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실존인물을 그린 대게의 영화들이 정밀한 사실묘사와 극적인 서사를 적절하게 교합시켜 영화적 재미를 더했다면, 조셉 로지는 이런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 맞이할 최후의 시간을 담고 있음에도 스펙터클과는 거리를 두는 등, 인위적 비장미를 고조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소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는 투우장 시퀀스 정도가, 영화 전체를 관류하는 비극적 파토스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조셉 로지의 영화적 특징은 <트로츠키 암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즉 강렬한 사건을 통해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생각하도록 단초와 영감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이 영화의 경우 어차피 결론지어진 암살사건의 배후를 드러내거나 인과관계를 추적하기보다는, 볼셰비키 혁명 영웅이 이토록 허술한 경비와 보안 속에서 한낱 등산장비에 의해 쓰러져갔다는 사실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앞서 스탈린이 보낸 비밀요원의 기관총 습격 장면에서도 쉽게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여러 명이 가담한 이 습격 씬이 준비부터 실행까지를 꽤나 세밀하게 오랜 시간 보여준 데 반해, 정작 트로츠키의 최후는 무심한 듯 허무하게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멕시코 외곽에 한적한 주택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은둔중인 트로츠키(리처드 버튼)와 그의 암살을 맡아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프랭크 잭슨(알랭 들롱)을 대비시킴으로써 트로츠키 죽음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이는 조셉 로지의 빼어난 연출력에 공을 돌려야 마땅한 일이지만 숨은 각본가(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와 코스타 가브라스의 <계엄령>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프랑코 솔리나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때 마르크시즘에 심취했던 과격한 유물론자답게, 조셉 로지는 트로츠키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추억과 안타까움을 영화 곳곳에 심어놓고 있다.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초청해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를 여러 차례 보여준다든지, 특히 기자와의 대담 장면에서 소신을 피력하며 서성이는 트로츠키의 후경 즉,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잡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가 사실은 느릿하게 패닝하면서 경비대원과 벽을 칠하는 노동자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로 유지되는 영화의 마지막 5분은, 시대의 거물이 쓰러져가는 과정의 허무함과 확신 없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괴로워하는 암살자의 단말마가 뒤엉키면서 형언하기 힘든 여운을 남겨놓는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역사에서 영원히 미 복권된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자 스탈린 반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자였지만, 스탈린 정권에서 ‘인민의 적’으로 추방당했고 자본주의국가로부터는 위험한 혁명수출업자로 낙인 찍혀 떠돈 유랑의 혁명가였다. 어떤 면에서 트로츠키와 조셉 로지는 상당부분 유사점이 있다(로지는 영국을 비롯해, 유럽각지를 돌며 영화 작업을 시작했으나 해외 배급 상의 문제를 고려해 한동안 여러 개의 가명ㅡAndrea Forzano, Victor Hanbury, Joseph Waltonㅡ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하기에 조셉 로지는 트로츠키의 말년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트로츠키 암살>은 한 순간에 느낌이 오는 영화는 아니다. 비장미를 고조시키거나 극적 스펙터클로 한 인물을 신화화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건대, 이 영화는 감각적으로 다가와 순식간에 파문을 일으키는 방식이 아닌, 여운과 파장을 오래 남기는 지각적인 영화이다. 카메라가 트로츠키라는 거인의 행적을 쫓기보다는 그와 그를 둘러싼 세상, 그가 속해있는 풍경을 관조하듯 훑어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뜻한 듯 나른하게 펼쳐지는 멕시코의 전원주택 풍경은 볼셰비키 혁명의 풍운아가 아닌 한 인간의 행복한 한 때를 보여주기에 더 없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야욕과 야만적 행위가 이러한 행복을 얼마나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어느 심약한 테러리스트를 통해 알려줌으로써, 비장미대신 무거운 숙제를 안겨주는 방법을 택한 조셉 로지의 연출은 적절하고 탁월했다. 우리는 살만한 세상을, 시대의 무수한 거인들을 얼마나 허무하게 잃었던가. 영화의 마지막 클로즈업 되는 인물은, 이 물음에 대한 간명한 대답이다.

(백건영_네오이마주 편집장, 영화평론가)
 

 ▶▶ 상영일정
1월 24일 (일) 13:00
1월 29일 (금) 19:00 상영후 시네토크_오승욱 감독
2월 4일 (목)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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