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자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3.21 루키노 비스콘티의 세계 [2] - 내부의 매혹
  2. 2011.03.14 진정한 리얼리즘의 재발견
  3. 2011.03.14 [리뷰] 저주받은 자들

[강연]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본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

지난 13일 비스콘티 독일3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저주받은 자들>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흔히 많이 거론되는 데카당스적 미학보다는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았다. 흥미진진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은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미학적 성격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비스콘티의 데카당스적 미학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강렬함 때문인지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문맥들이 덜 얘기되는 것 같다. <저주받은 자들>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크게 보자면 마틴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더 넓게는 마틴이 에센벡 가문 전체를 궤멸시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살해와 대학살의 범죄가 면책되었던 시기가 나치즘의 태동기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가계 살해와 나치의 대량 학살은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1933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종결되고, 비스콘티의 표현을 빌자면 살인국가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귀족과 자본가들이 나치에 협력하기 시작하고, 영화에서 보자면 도착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크게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막에서는 에센벡 가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당시 독일의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막에 해당하는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는 1933년에 있었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언급되며, 3막에서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돌격대원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인 '장검의 밤'이 묘사되고 있다. 4막에서는 다시 돌아온 헤르베르트의 이야기에서 다카우 수용소가 환기되는데, 이는 히틀러 집권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처음에는 반나치 정치인들을 수감하는 곳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수감하는 수용소로 변했다. 결국 이 영화는 2년 정도의 시기에 걸쳐 나치즘의 발현과 가계 내의 권력적 이동의 여러 양상들을 같은 맥락으로 다루고 있다.

4막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보게 되는 곳이 1막과 4막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저택에서의 저녁식사라는 가족의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가족의례는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동시에 1막은 장례식으로, 4막은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소피와 프레드리히의 결혼식 역시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둘 모두 죽음의 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스콘티는 귀족들의 양식화되고 의례적인, 제의적인 행사들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레오파드>가 그러한데, 그런 장면들이 비스콘티 영화를 보는 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저주받은 자들>에서의 의식은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그 안의 부패나 죽음, 타락이라는 면이 훨씬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스콘티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런 의례들이 이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향취를 의미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의례 자체가 내부에서 부패하고 썩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귀족사회의 몰락과 죽음으로 연결되는데, 어떤 점에서 이런 몰락이 재촉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첫 번째로 보자면 외부적인 침입이 있다. 1막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프레드리히와 아센바흐는 차를 타고 저택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데, 그들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둘의 결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후에 벌어지는 '장검의 밤' 시퀀스에서도 둘은 함께 등장한다. 즉, 이들은 에센벡 가와 구 돌격대(SA)를 궤멸시키는 사건에 동시에 연루되어있다. 결국 둘의 연대가 외부적 침입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침입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내부적인 부패와 궤멸의 지점이다. 침입이 진행되기 이전부터 이미 내부에서는 타락과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계나 귀족 계급의 몰락은 구시대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시간성이 내부적 부식과 부패로 이어지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의 필연적인 부패는 그 집단이 밀실처럼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부패나 쇠락은 비스콘티 영화의 내적 공간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간의 밀폐가 시간의 부패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스콘티 영화의 대부분은 밀실적인 폐쇄적 공간이 주를 이룬다. 후기 작품들로 가면 갈수록 내부 공간과 바깥을 연결하는 통로가 없어진다. 밀실의 공간, 완전히 닫힌 세계에서 시간은 부패하고 쇠락한다. 이런 점이 관객들에게 강한 매혹을 주고 있다. 인물들은 결국 쇠락의 길로 빠져들겠지만, 폐쇄된 공간 안에서 과거의 추억과 이미지와 기억들이 인물의 몸에 거주하고, 이를 통해 그 인물의 고고함과 귀족성이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에서 그것은 굉장히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틴이라는 인물의 행태를 주목하게 된다.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 어린 아이들은 시를 낭송하고 귄터는 바흐의 사라방드를 연주하는 가운데 마틴은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 내는 드랙쇼를 벌인다. 이 공연 장면은 몇 가지 층위로 읽어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틴이 에센벡가 안에서 굉장히 반항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성적 도착을 보여주는데, 이는 1930년대 독일 사회의 변화라는 맥락내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연은 애매한 구석들을 갖고 있다. 마틴이 가게 되는 경로와 귀결점을 보았을 때 비스콘티는 마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마틴의 모습이 주는 관능성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처하는 자가당착적 문제가 있는데, 어떤 인물의 폭력이나 도착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이 지닌 폭력과 도착에의 관능성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관능성을 가진 헬무트 베르거 같은 인물이 아니라, 조금 더 거리두기가 가능한 배우를 설정했다면 손쉽게 비판적 층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체로 그가 지닌 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후에 만들어진 밥 포시의 <캬바레>를 들 수 있다.

마틴의 쇼에는 다른 뉘앙스도 있다. 고전적인 귀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첼로의 고귀한 선율에 비해 바로 이어지는 마틴의 쇼는 굉장히 쾌락적이고 쇼비즈니스적이다. 그것이 가문에서 거부당할 때, 그가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치즘과의 결탁이며 그것은 결국 가계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모호한 것은 그래서 비스콘티가 정치적 변절과 성적 변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성적 변화는 나중에 발생하게 될 그의 정치적 변질의 징조와 의미로 표현된다. 처음에는 여장을 하고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내는 드랙쇼를 벌이지만, 나중에는 나치즘의 제복을 입고 또 다른 의미의 쇼를 벌인다. 이 둘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정치사회적 부분과 성적 도착을 연결시키는 맥락에서 이 영화는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 병적이라 할 만한 정치적인 힘 아래서 인간성의 영역이 도리어 성적인 변질을 겪는 인물들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3막에서 벌어지는 '장검의 밤'에 등장하는 돌격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마틴과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에 비해 아센바흐라는 인물은 한 치의 변형성도 없는 냉철한 인물로 묘사되며 나치의 악과 미,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마틴의 성적 도착이라기보다는 굳건하게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아센바흐의 존재감일 것이다. 이 인물은 사실상 프레드리히가 요아힘을 죽이게 만들고, 이어 마틴이 프레드리히를 죽이게 만든다. 두 아버지의 살해에 이어,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또 다른 아버지의 초상, 즉 히틀러가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루드비히>와 <순수한 사람들>로 이어지는 독일 3부작의 시작을 이루고 있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필연적으로 상실된 것, 그리고 상실 이후에 이해될 수 있는 과거의 시간, 그 과거의 시간을 되찾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보다 부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애매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동시에 1970년대에 등장하는 유럽의 역사 영화들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 정권의 도래와 나치즘, 그것의 가장 극악한 표현으로서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이후의 역사 영화들이 고민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나치 집권 사회 안에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인간 내부의 문제 등이 간과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신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는 병리학적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동시에 독일 파시즘이 갖고 있었던 매혹을 어떻게 내부의 시선에서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회피하지 않고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지의 고민이 이 영화에서부터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이후에 만들어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같은 영화는 매혹이나 섹스, 죽음, 폭력, 멜로드라마와 같은 소재로 파시즘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적, 위장된 형태로서의 자아의 병리적인 현상에 근거해 파시즘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이 갖고 있는 내부적 매혹이라는 문제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본격화되는데,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나 파스빈더의 <릴리 마를린>, <절망> 등의 영화들이 그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역사영화, 새로운 방식의 파시즘에 대한 미학적 표상을 이루어낸 선구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


최근 이탈리아영화의 약진을 보면 이미지의 힘과 우아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탈리아 특유의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아름답게 잡아낸 일련의 영화 속 아름다운 화면들은 일정 부분 루키노 비스콘티의 미학적 성취에 빚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루키노 비스콘티는 리얼리스트이다. 단지 그가 네오리얼리즘의 태동을 알린 <강박관념>(1943)의 감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후기 대표작으로 익히 알려진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화면들을 떠올려볼 때, 이러한 선언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 리얼리스트인 까닭은 영화에 자신을 온전히 투영해냈기 때문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에서 출발하여 극단적 탐미주의까지, 작품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스스로의 삶이자 인생 그 자체이다. 낭만과 퇴폐에 익숙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행동하는 공산주의자로서, 그리고 솔직했던 동성애자로서, 타인도 자신도 속이지 않았던 그의 정직함이야말로 그를 모든 리얼리스트들의 위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한다. 오는 3월10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을 통해 이러한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지난해 가을 있었던 비스콘티 특별전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6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리얼리즘 형식 안에 존재하는 인간적 감성의 실재를 포착한 비스콘티의 진정한 미학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안나 마냐니의 극성스런 모성연기가 돋보이는 <벨리시마>(1951)는 어린 연기자 딸을 둔 엄마 막달레아를 통해 영화산업의 생리를 비판하는 네오리얼리즘 색채의 영화이다. 비교적 단순한 모녀간 멜로드라마를 흥미로운 현실비판으로 이끄는 것은 쇼비즈니스의 추악한 현장의 생생함을 잡아낸 비스콘티의 세밀한 관찰력이다. <흔들리는 대지> <레오파드>와 함께 시칠리아 삼부작 중 하나로 불리는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은 핍박받는 노동자 계급의 악순환을 담담히 포착한 네오리얼리즘의 걸작이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부 시칠리아로 이주한 가족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단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름다울 준비를 마친 화면들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탐미주의로 나아갈 징후들을 드러낸다.

독일 삼부작으로 불리는 <저주받은 자들>(1969),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루드비히>(1972)는 이번에 모두 상영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탐미주의로 전환한 비스콘티 극적인 변화의 끝에 있는 이 세 작품은 비스콘티의 인생, 취향, 문화적 자의식을 모두 투영한 비스콘티 미학의 완성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의 미학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4시간에 걸쳐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룬 대작 <루드비히>는 실로 극단적 유미주의의 절정을 이룬다. 실제 그의 마지막 연인이기도 했던 헬무트 그리엠이 출연한 <저주받은 자들>은 1930년대 독일의 재벌 에센벡가의 비극적 사건에 대해 다루는데,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 나치가 배경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순수한 사람들>(1976) 역시 비스콘티 스스로 끝내 공개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유작이라는 주목할 만한 사실 이외에도 최근 이탈리아영화의 화려함과 가장 밀접한 감성을 보여주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글: 송경원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 794호에 실린 기사를 발췌 게재한 것입니다. 원본은 씨네21 794호 96p나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5&article_id=65127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젊은 시절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불리던 루키노 비스콘티는 50년대 무렵 멜로드라마에 심취하는데, 이런 경향은 말년에 이르러 탐미주의로 치닫는다. 이러한 비스콘티의 탐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독일 3부작의 서두를 여는 작품이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다. 특유의 멜로드라마 연출과 연극적 특징, 동성애적 성향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 한 편의 대작에 농도 짙게 뒤엉켜있다. 나치가 차츰 그 세를 불려나가던 1933년 독일. 루르 지방의 세도가 요하임 폰 에센벡이 운영하는 철강회사는 나치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회사를 넘겨받은 SA의 일원 콘스탄틴, 진보적이고 반나치적인 아들 허버트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촌 아셴바흐(헬무트 그리엠), 에센벡 철강을 관리하고 있는 프레드릭(더크 보가드)과 그의 연인 소피(잉그리드 툴린), 그리고 그녀의 아들 마틴(헬무트 베르거)은 각자의 욕망을 안고 골육상쟁을 벌인다.


비스콘티는 <레오파드>에서처럼 역사의 격변기에 놓인 거대 세도가의 파멸을 그려내는데, 여기서는 나치즘의 도래였다. 나치즘의 불꽃을 일으킨 것은 에센벡 가문의 권력과 돈이었지만 여기에 풀무질을 하는 것은 인물들의 사적 욕망이다. 프레드릭의 소피에 대한 욕망, 소피와 마틴 간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은 모든 인물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그와 동시에 이 사적 욕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욕과 경계가 모호해지며 더 많은 인물들이 나치에 가담하도록 만들어간다. 마틴이 연인의 어린 딸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페도필리아는 소피로 인해 비뚤어진 그의 성적 욕망을 대변하고, 밤에 벌어지는 SA대원들의 남색의 향연은 영화 초반에 드러난 콘스탄틴의 동성애적 욕망과 이어진다. 이 모든 것들이 뒤엉킨 채 굴러가는 골육상쟁의 아수라에서 모든 욕망은 과장된 조명과 세트, 화려한 편집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극도로 탐미적이고 아름답게 흘러넘친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움은 파멸로 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그러하다.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철강회사의 용광로 위로 떠오르는 영화의 제목은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이 모두 일종의 지옥에서 허덕이리라는 것, 더 나아가 이들이 이미 모두 죽은 것과 다름없으리라는 것을 은유한다. 요하임의 생일파티에서 콘스탄틴의 아들 귄터가 첼로를 연주하는 순간 차례로 보이는 인물들의 얼굴은 흡사 데드마스크와 같으며, 바흐의 사라방드를 일종의 진혼곡처럼 들리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이 타고 남은 폐허의 광경에 느리고 단호하게 경례를 붙이는 헬무트 베르거의 모습에는 피할 길 없이 도래하게 될 잔혹한 시대를 되돌아보는 비스콘티의 슬픔에 찬 시선이 있다.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