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당대의 공기를 올곧게 증명하는 것”

변영주 감독이 말하는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지난 1월 27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감독 변영주가 추천한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상영 후 시네토크가 열렸다. 어린 시절, 멜빌의 영화에 매혹되었던 기억을 비롯하여 <그림자 군단>에 대한 감흥, 멜빌 영화의 현대적 특징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이 날의 대화를 일부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추천할까를 고민하면서 영화적 매혹을 강렬하게 느꼈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 보시던 비디오를 통해 <암흑가의 세 사람>(1970)을 처음 접했었다. NHK에서 방영되었던 일본어 더빙판을 녹화한 비디오였기 때문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영화에 대한 느낌은 굉장히 강렬했다. 나중에서야 당시 보았던 영화가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멜빌의 영화 중 <암흑가의 세 사람>이나 <사무라이>(1967) 같은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훨씬 더 어울릴 영화가 <그림자 군단>(1969) 같다는 생각을 해서 추천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던 때 읽었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라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왜 나는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특정한 어떤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게 되는가. 반면 특정한 인물을 증오하고 혐오할수록 왜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깊어져 가는가.” 오늘 보신 <그림자 군단>과도 잘 맞는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폭압이나 독재와 싸우는 일은 멋진 일이 아니다.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영화 속 레지스탕스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계속해서 잡히거나 도망가거나,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죽일 수밖에 없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독일군에게 위협적인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이처럼 불의에 항거한다는 것이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이상과 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군단>은 실제 레지스탕스인물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원작이고, 멜빌 감독 자신도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었다. 마틸드 역을 연기한 시몬느 시뇨레은 부모가 유태인으로 독일에서 탈출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감독과 배우들이 그 때의 기억을 명백하게 갖고 있었고, 그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영화였다. 멜빌 감독의 영화는 다이렉트하면서도 굉장히 힘이 있다. 멜빌의 영화를 흔히 장르 영화라고 하지만, 단지 스타일로서의 장르가 아니라, 당대의 공기를 올곧게 증명하는 것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악의가 아니었건, 누군가가 겁에 질렸건 간에 ‘잘못된 일에 대해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굉장히 명백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건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대이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나의 아버지 세대를 이해해 본적이 없었다. 왜 아버지에게는 내 가족과 삶의 안정 이외에 보다 더 높은 가치, 이를테면 대의, 올바름, 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철이 든 이후에는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었고, 언제나 서로 굉장히 방어적이었다. 하지만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박완서 작가의 『그 남자네 집』을 읽다가, 청춘이라는 것이 살아야한다는 강박과 공포로 대치된 인생을 산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과 삶 외에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이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훨씬 역사의 과오에 대해 훨씬 더 냉정해지는 것, 그 앞에서 정말 명징해지는 것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 세대가 그 세대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사는가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1: <그림자 군단>이 주제적인 측면 외에, 스타일이나 형식, 연출에 있어서 현재에도 호소력을 갖고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 궁금하다.

변영주: 멜빌의 영화가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장르라는 것은 이미 관객에게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기가 쉬워진다. 장르로서의 완벽한 자기 구조를 갖게 되면 관객에게는 구조 자체가 낯설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보다 어려운 이야기, 어떤 심층의 이야기를 숨겨서라도 표현하고 싶을 때 장르라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한다. 멜빌은 <암흑가의 세 사람>이나 <사무라이>와 같이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느와르 장르의 이야기 구조를 가져오는데, 그러한 방식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고조된 감정과 상황에서 더욱더 당대의 향기를 맡기가 쉬워진다. 당대의 질서, 그 세대의 감정에 대해 알기 쉬워지는 부분이 있다. 멜빌의 영화는 미학적으로 현대적이라기보다는 영화에 담겨있는 시대적 공기라든가 하는 것들이 훨씬 현대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무엇보다 탁월하다. <그림자 군단>의 경우 실제 인물들을 참조해 캐릭터가 만들어짐으로써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최대치를 담을 수 있었고, 그래서 러닝타임이 긴 편임에도 매 순간 긴장감이 있다. 일본어 더빙판으로 멜빌의 영화를 보았던 어린 시절, 내용을 알 수는 없어도 영화에 매혹되었던 건, 쇼트와 쇼트를 연결하는 방식과 카메라의 움직임들에서의 김장감을 때문이었던 것 같다.

 

관객2: 멜빌의 영화 중 <그림자 군단>이 요즘 시대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변영주: 물론 지금의 우리가 레지스탕스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웃음) 우리가 어떤 것들을 바라고 꿈꿀 때 그것이 어느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경우는 없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필리핀 감독 닉 데오캄포의 <혁명은 유행가 가사의 마지막 후렴구처럼 다가온다>는 영화가 있다. 혁명이든 변화든 우리가 바라는 어떤 세상은 어느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굉장히 지지부진할 수 있고, 누군가를 의심하게 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유행가의 후렴구를 떠올리듯이 그렇게 혁명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자면, 올바르다는 것, 정의롭다는 것은 끊임없이 검증되어져야하고,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주인공이 내레이션을 통해 갈등하듯이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그 다음 걸음을 가기가 힘들다. 그런 면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정리: 장지혜(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문지현(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리뷰

한없이 건조한 레지스탕스 필름누아르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장 피에르 멜빌은 프랑스 영화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볼 때 비평가들이 정의하기 어려운 감독 중 하나이다. 그럴만한 사정은 있다. 미국영화를 추앙했던 누벨바그리언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영화들에 미국의 양식을 이식하는 것을 회피했던 것에 비해 멜빌은 미국식 장르를 프랑스 영화계에 전용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이었다. 멜빌의 노작들은 장르(필름 누아르나 하드보일드 범죄영화)에 대한 페티시즘이 미학의 경지로 승화된 사례를 제공한다. 차갑고 건조한 그의 범죄영화는 냉소주의와 비관주의, 어둠과 연결되는 장르의 특성을 양식화된 표현을 통해 제공(<바다의 침묵> <도박꾼 밥> <사무라이>)했다. 

 

<그림자 군단>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조셉 케셀의 1943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2차 대전 말기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필립 제르비에(리노 벤츄라)가 이끄는 조직의 요원들이 체포와 구금, 고문, 탈출을 반복하는 과정이 별 다른 사건없이 건조하게 묘사된다. 케셀의 소설이 레지스탕스에 대한 것이었다면 멜빌의 영화는 저항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다. 정치적 행위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실존적 양식으로서 저항 행위를 다룸으로써 그는 텍스트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삭제한다.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깔았지만 영화는 범죄 누아르와 스파이 영화를 교배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슈타포를 경찰, 레지스탕스들을 범죄조직이나 첩보원으로 바꾼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멜빌은 레지스탕스 스토리(멜빌 자신이 점령기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를 범죄 누아르의 자장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어떤 장면들은 흡사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타일에 대한 접근방식, 사운드, 특히 과묵한 인물들의 내면을 진술하는 나레이션은 노골적으로 브레송 풍이다. 극적이나 심리적이기를 거절하고 철저하게 현상적인 기술에 그치는 나레이션을 암송하는 인물들은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삶을 견디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림자 군단>에 만연한 것은 심리적 동기화나 감정을 배제한 냉혹한 묘사, 침묵, 생략이다. 이를테면 펠렉스나 장 프랑소와에게 행해지는 고문의 과정은 생략된다. 필립의 조직원들은 미래가 없을뿐더러 과거도 없다. 필립은 자신이 엔지니어라고 말하지만 직업은 그의 임무와 어떤 연관성도 맺지 않는다. 장르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따라 멜빌은 특정한 방식으로 입고, 말하고, 행동하고, 죽음을 맞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따라서 그들이 입는 옷과 중절모, 자동차, 총, 시가, 어둡고 한적한 거리에서의 달리기 따위가 더 중요하다. 

‘저항’이라는 세상의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이 영화가 유일하게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있다는 그것은 ‘죽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조직원 마틸드(시몬느 시뇨레)의 처형 장면에서 이런 사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장은 타살도 자살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으로 마틸드의 운명을 단정하고 그를 암살하지만 죽음의 순간 마틸드의 눈빛은 이와 같은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그녀는 정말 조직이 자신의 명줄을 끊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 순간 <그림자 군단>은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짊어진 실존의 부조리함을 다룬 영화가 된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베르코르의 소설로도 유명한 <바다의 침묵>은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 작가들이 발행한 지하출판 한 권으로 프랑스 저항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장 피에르 멜빌은 주저 없이 자신의 첫 영화로 만든 것을 결심하고 이는 1947년에 비로소 실현된다.
원작의 구성을 충실히 옮겨온 단순히 구성은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분법적 대립은 반복되는 행위들을 통해 이뤄지며 이는 충돌과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점령당한 프랑스와 점령한 독일, 문화와 무력, 노인/여자와 군인, 미녀와 야수, 침묵과 독백 식의 이분법적 대립은 등장인물의 관계를 대변해주고 있으며 극중 세 인물의 관계는 흑과 백의 강렬한 조명의 대비, 카메라의 움직임, 베르너가 걸어 다니는 소리 등을 통해서 디테일하게 연출된다.
영화에서는 노인이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조카가 바느질하는 모습, 그리고 매일 서재에 찾아와 독백을 계속하는 베르너의 모습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반복은 비를 막고 들어온 베르너가 군복이 아닌 사복으로 서재를 찾으면서 전환을 맞는다. 이들의 일관된 침묵과 계속되는 독백은 변함없지만, 평상복의 베르너는 무력으로 점령한 독일과 점령당한 프랑스의 대립적인 관계가 적어도 이집에서 만큼은 유효하지 않게 됨을 보여준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침묵은 대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조카딸이 침묵을 깨며 던지는 한 마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침묵은 영화라는 매체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과 그 인물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은 말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영화적인 영상과 주변의 소음이다. 정적이던 카메라는 세 인물이 한 자리에 모이는 서재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베르너의 등장은 그가 다리를 저는 소리나 노크 소리로 대신 된다. 또한 단호한 고집이 보이는 노인과 강인한 내면을 보여주는 조카딸과 이상의 좌절을 겪고 비통해 하는 독일장교 베르너의 섬세하게 연출된 모습은 제한된 장소의 실내극이 가질 수 있는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원작자인 베르코르의 고향 마을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촬영되었지만, 점령 초기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회유정책의 기만성, 전쟁의 부조리와 비인간성,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겪는 비극을 예리하게 고발하고 있다.
멜빌이 좋아했다던 니콜 스테판의 옆모습과 침착하지만 강인한 두 눈의 연기가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하워드 베르농의 온화하면서도 고뇌하는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글/ 박경미(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차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알베르 시모닌의 원작소설이 처음 나온 것이 1953년의 일이니, 자크 베케르가 <현금에 손대지 마라>를 영화화한 것은 꽤 재빠른 시도였다. 갈리마르의 ‘세리 누아르’에 실렸던 이 소설은 초판 20만부가 팔리는 인기를 얻었고 유명한 문학상인 되 마고 상(Prix des Deux Magots)을 수상했다. 은퇴를 앞둔 노년의 갱스터가 주인공들이다. 오랜 친구인 막스와 리톤은 마지막 노후를 편하게 보내려 공항에서 금괴를 강탈하는데, 계획과는 달리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정을 너무 과신했던 탓이고, 금괴 강탈에 야심을 보인 눈치 빠른 신흥 갱 안젤로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베케르가 이 소설에 관심을 보였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두 사내들의 우정과 배신의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게다가 은퇴를 앞둔 그들의 나이가 중요했다.

트뤼포의 찬사를 빌자면, 이 영화는 쉰을 넘긴 사내들의 우정의 이야기다. 시모닌과 자크 베케르는 쉰을 앞두고 있었고, 주인공인 막스 역의 장 가뱅이나 리톤 역의 르네 다리는 이제 막 쉰을 넘긴 나이였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들 각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사내들의 우정이라 말했지만, 막스와 리톤의 관계는 과장된 정념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과 제스처들의 느슨한 연결로 묘사된다. 금괴의 강탈, 갱들 간에 벌어지는 폭력적 행동과 결과보다는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위험에 처한 리톤이 막스의 아파트에 머무는 장면은 거의 10여 분간 지속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들이란 고작 그들이 포도주를 따서 잔에 따르고 빵에 치즈를 발라 먹거나 잠에 들기 위해 침대보를 정리하고 양치질을 하고 파자마를 갈아입는 장면들이다. 죽음의 리듬에 가까운 이 순간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할 지경이다. ‘곤충학자’처럼 인물의 행위와 제스처, 디테일에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베케르의 진면모가 이런 느슨한 장면들에서 엿보인다. ‘황혼의 프렌치 누아르’라 부르고 싶은 동시대 장 피에르 멜빌의 <도박꾼 밥>(1956)과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와 미적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크 베케르는 전후 프랑스 영화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였던 프렌치 누아르의 개척자였다. 194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에 명명된 ‘필름 누아르’란 프랑스식 표현은 정작 미국에서는 1950년대를 거치면서 소멸하기 시작하는데, 새롭게 베케르의 손을 거쳐 프랑스에서 생명력을 얻었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는 미국식 필름 누아르를 차용하면서도 프랑스적 기원의 독특성을 체현한 작품이다. 장 가뱅이 연기한 막스는 1950년대 프랑스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는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 전전과 전후 프랑스, 전후 프랑스와 미국의 격돌의 지대에서 고뇌한다. 그가 신흥 갱스터인 안젤로(이후 멜빌의 영화에서 두각을 보인 리노 벤투라가 이 영화로 처음 데뷔했다)와 다툼을 벌이는 것에서 팍스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세계질서에의 프랑스식 저항의 흔적이 느껴진다. 장 가뱅은 레지스탕스의 적임자였다. 라스트에서 그가 보여준 몸짓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과거와 작별하는 숭고하고도 엄숙한 의례이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멜빌이 여전히 레지스탕스 시절의 가명을 유지했던 것은 그가 또 다른 레지스탕스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다르가 찬사를 보냈던 열렬한 시네필이었지만 영화는 멜빌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즈네 거리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저항의 근거지를 삼았던 멜빌은 완고하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브레송, 타티와 더불어 그의 영화 속 인물들(레지스탕스, 경찰, 도박사, 갱스터들)이 과묵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레지스탕스로부터 차용한 행동의 코드를 규율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은밀함, 완강함, 도덕적 견고함, 희생적인 충성은 그들의 미덕이지만 전후의 프랑스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기도 했다. 멜빌의 인물들은 살아 있지만 절멸된 과거의 흔적을 상속받은 시대착오적인 이들이다. 그들은 상처의 치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확인하고 행동의 느슨한 절차를 제의적으로 밟아가는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들 모두는 하나의 서클로 연결되어 있다. 멜빌의 영화에서 ‘형사-범죄자’ 또는 ‘범죄자-범죄자’들 간에는 기묘한 동질성이 감지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기차에 오르는 두 명의 인물을 보게 된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옷을 입었다. 비슷한 표정에 서로 유사한 제스처를 취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인가, 친구인가, 형제인가? 이들이 침대칸에 들어서는 순간에야 우리는 둘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두 남성의 표면적인 우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엮여있음을 보여준다. 이 순간은 알랭 들롱과 지안 마리아 볼롱테가 황량한 벌판에서 서로의 연대를 확인하는 그 유명한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멜빌의 고독도 여기에 있다. ‘왜 고독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멜빌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람간의 거래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만일 두 명의 인간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늘 배신이 개입한다. 우정은 신성한 것이지만 멜빌은 사랑보다 배반이 인간행위의 근본적인 원동력으로 작동한다고 여겼다.


이 영화는 “석가모니께서 붉은 분필을 들어 원을 그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이 당장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때가 되면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갈라진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두는 붉은 원으로 맺어질 것이다”라는 라마 크리슈나의 경구로 시작한다. 숙명적인 유대와 비극, 도주의 불가능성이 처음부터 주어진다. 감옥에서 출소한 코레, 후송도중 탈주에 성공한 보젤, 알코올중독자인 왕년의 명사수 장센, 이들 셋은 운명적으로 서로 얽히면서 감옥, 길거리의 레스토랑, 상티의 지하세계의 암흑가 소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화 마지막의 시골의 외딴 별장에 모이게 된다. 그들의 우주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닫혀있다. 가령, 장센의 방은 여행용 트렁크들로 가득한데, 그가 밀실공포증을 유발하는 방에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피는 궁극적으로는 그가 꾸는 환각만큼이나 환상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라스트는 <그림자 군단>(1969)에서 ‘더 이상 도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라는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