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밤과 안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7.24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적 유언장
  2. 2010.07.23 오시마 나기사 정치영화의 원점
  3. 2010.07.21 오시마 나기사라는 운동체 - ATG시대

[영화사 강좌3] '이후'의 영화의 핵심 영화전사, 오시마를 말한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21일 저녁 <도쿄전쟁전후비화> 상영 후에는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이자 부산시네마테크를 맡고 있는 허문영 원장이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적 유언장’이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허문영(부산시네마테크 원장, 영화평론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영상자료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하고 있다. 저도 구로사와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봤습니다만 여전히 압도적이다. 이 압도성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서사, 대사, 인물, 연기, 사운드, 편집, 그 모든 점에서 최소한의 가장 적절한 수준의 도구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장인적인 면이 구로사와 영화의 힘을 만든다고 본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구로사와의 영화를 자꾸 말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전전 일본영화의 거장과 전후 일본영화 감독 두 사람의 회고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역시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볼 필요가 있고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본 후에야 모던시네마를 더 잘 받아들이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가지다. 왜냐하면 오시마 나기사 역시 ‘이후’를 그린 ‘이후’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모던시네마의 출발을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잡든 아니면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잡든, 50년대에 시작된 모던시네마는 ‘이후’의 영화다. 무엇의 이후인가를 따져 물으면 고전기의 이후이기도 하고 2차 대전 전후 세계대란의 이후이기도 하고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후’의 영화다. ‘이후’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전의 고전적인 시기, 고전적인 상태, 고전적인 의식에 대한 심취와 매혹을 이해하지 않고 과연 ‘이후’를 제대로 즐기고 감각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기사 나기사는 일본영화사에서 전후의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2차 대전 이후만이 아니라, 영화의 사조와 경향에서 2차 대전 이후 큰 힘을 발휘한 쇼치쿠 누벨바그(일본 뉴웨이브)의 선구자이자 대표자이며 가장 전투적인 영화전사라는 점에서 일본의 ‘이후’의 영화, 단순히 전후의 영화가 아니라 ‘이후’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후라는 의미에 익숙하실 텐데, 오시마 나기사를 말할 때의 ‘이후’는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이후. 포스트, 포스트 고전기, 모던시네마 등 형식으로서의 이후의 측면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고전기 영화는 내러티브의 경제를 완성한 시대의 영화이다. 모던시네마는 고전기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성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서 특히 데드타임을 중심으로 한 잉여들을 통해서 시네마를 다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일본영화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이후 번성한 모던시네마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물론 오늘 보신 <도쿄전쟁전후비화>에도 엄청나게 많은 데드타임이 등장하는데, 모토키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긴 장면을 포함해서 구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텅 빈 장면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연결들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오시마에게는 또 다른 ‘이후’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영화외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오시마를 일본의 국가주의와 맹렬히 싸운 정치적인 감독으로 이야기한다. 이상한 것은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를 다룰 때 현장 안으로 직접 들어가 주인공을 그 현장 속에서 시작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시마의 영화에서 정치적 이슈는 항상 ‘이후’에서 그려진다. 이를테면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1960년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조차 50년대 일본 공산당계 좌파운동과 반공산당계의 학생운동 양진영의 싸움이 끝난 다음 여전히 둘의 싸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배자는 마지막에 일본의 밤과 안개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여기에는 정치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전망을 찾으려고 애쓰는 전사나 투사의 모습이 없다. 1960년이면 오시마 나기사가 우리 나이로 불과 스물아홉인데, 20대의 나이에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세 번째 영화에서조차 오시마의 정치적 회상은 이상하게도 정치투쟁의 한가운데로 가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후’에서 이전을 바라보면서 실패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정치영화를 만들었다.

오시마의 영화 중 제가 좋아하는 <백주의 살인마>(1966)는 살인범의 이야기다. 주인공 그룹이 농촌에 가서 공동체를 만들고 실패한 이후에야 살인범이 등장하고, 무엇인가 실패한 이후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실패한 이후에 그 실패를 안에서 복구하려는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 이후에 오시마의 주인공들은 자꾸 범죄와 섹스, 강간, 절도에 빠져든다. 오시마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고다르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와는 매우 다른 차원의 비관적이고 회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와도 비교했지만, 6·8을 스무 살에 맞았던 필립 가렐과 비슷한 시기의 장 으스타슈, 이들은 죽을 때까지 6·8을 잊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그 쪽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그것이 끝나고 나서 자신들의 인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끝난 이후로 모든 것이 끝났고 살아있는 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굉장히 차갑지만 집요한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있다. 그런데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나 50~60년대 일본사회의 정치투쟁을 다룰 때에 노스탤지어적인 정서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항상 그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속에서 정의된다. 결국 오시마가 담고자 했던 것은 스스로 몸담았던 50년대 좌파운동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목격했던 60년대 좌파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진단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실패하게끔 운명 지어진 것처럼 그려지고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한다. 이런 점이 오시마를 60년대 세대로 부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차라리 오시마 나기사적인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60년대 세대 혹은 쇼치쿠 누벨바그 세대가 아닌 다른 각도로 오시마 나기사를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도쿄전쟁전후비화> 여기서 말하는 도쿄전쟁은 영화의 내용상 60년대 학생운동 특히 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이나 좌파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경향일 것이다. 그리고 전후비화라는 제목에서부터 ‘이후’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시마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는 <신주쿠 도둑일기>와 함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롭고 난해하고 비관습적인 영화이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시마의 다른 영화들이 주지 못한 절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절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소감과 제가 이 영화를 보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이 될 것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는 말씀드릴 생각이 별로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말이 안 되게 만들어져 있다. 아방가르드 형식을 취한 영화들이 자기 영화의 독법을 넌지시 일러주듯 이 영화도 나름대로 알려주는 것 같다. 영사기와 전등의 전원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그 부분이다.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유서로 남긴 필름을 누가 찍었는가라는 질문과 그 유서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불균질하게 내뱉는다. 두개의 질문을 하나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일종의 독법을 이 장면이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시마는 쉽게 단번에 자신의 질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결국 오시마 나기사가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길 바란다.

첫 장면에서 모토키는 뺏긴 카메라를 찾으러 경찰차를 쫒아간다. 거기에서 오시마의 영화에서는 듣기 힘든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된다. 이 테마음악은 유언필름이 상영될 때도 흘러나온다. 오시마가 영화에서 이렇게 음악을 정서적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영화가 거칠고 차갑고 형식주의적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지식을 동원해서 영화를 이해해야겠다는 긴장된 자세를 풀어주는 휴식처가 된다. 유언필름의 첫 상영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철길 너머의 작은 가게들, 사람들, 풍경들이 보이자 한 여학생이 무섭다는 말을 한다. 사실 무섭지는 않지만 60년대 세대를 생각하면 그 느낌이 이해된다. 영화에도 나왔다시피 영화를 현실변혁의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모든 인간이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시대에, 유언필름은 모든 사건, 역사를 멈춰 세우고 시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상주의가 포괄하는 역사적 시간이 포섭할 수 없는 절대적 시간, 자연의 시간일 수도 있고 우주의 시간일 수도 있고 아주 일상적인 순환의 시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다른 시간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상징적인 것은 오시마가 60년대의 마지막, 70년대의 출발선에 서서 자신의 새로운 출발이 과연 이 형식으로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안고 만든 것 같다는 점이다. 모토키가 자신을 던졌듯이 혹은 유언장으로 영화를 만들고 죽었듯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새로운 도약이고 투쟁이자 오시마 자신의 질문, 다짐, 느낌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였다. 60년대에 정말 미친 사람처럼 거칠고 격렬한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이렇게 뭉클한 느낌을 주는 영화를 만들어서 이것이 오시마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후의 영화들에서는 이 영화의 질문이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시마의 필모에서 이 영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오시마가 좋아했던 장 마리 스트라우프의 시간에 대한 오시마의 인상이 이 영화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는데, 여인의 몸을 스크린으로 삼아 상영하는 장면에 대해서 이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가 자기의 전존재를 걸고 새로운 영화적 시간 혹은 새로운 영화적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오시마의 시도라면, 오시마가 이전까지 다뤘던 육체 그러니까 정치에 실패한 이후에 학대의 대상으로서의 육체와는 다른, 진정으로 자신의 몸이 체감하는 새로운 시간을 몸을 스크린 삼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몸과 시네마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굉장히 위태로운 결단인데 그런 의지, 욕망, 갈망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다시 유언필름을 상영할 때도 역시 그 앞에서 야스코가 옷을 벗는데, 이번에는 야스코의 몸에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뒤의 벽에 영사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인데, 고전기 영화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자주 썼던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몸에 새겨진 영화, 몸에 새겨지고 싶었던 영화, 몸이 스크린 · 시네마가 되고자 했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불가능성, 죽음에 가까운 예감과 좌절이 두 번째의 분리된 스크린 프로세스 영사 장면에서 느껴진다. 실제로 그 장면은 서로 나체로 섹스를 하면서 목을 조르는 것으로 끝난다. 다가갈수록 스크린 혹은 시네마의 새로운 시간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그 것을 무릅쓰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긴장이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정리: 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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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강좌2] 오시마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화적 화두, ‘정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20일 저녁, <일본의 밤과 안개> 상영 후에는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변성찬 영화평론가의 ‘오시마 나기사 정치영화의 원점’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 현장의 일부를 이곳에 옮겨본다.


변성찬(영화평론가):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를 처음 본 것은 2003년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때였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기사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매우 생경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관능성을 쉽게 느낄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기 힘들었다. 인물들이 치열하게 사상 투쟁을 하는 것은 알겠지만, 왜 저렇게까지 치열한지도 의문이 들었다. 당사자들만이 가지는 근본적인 위화감이 있었지만, 그런 격렬함이나 이런 활동들에 대한 시대적 배경의 이해가 안 되어 감정이입이 힘들었고, 더욱이 근본적으로 나기사 감독은 수많은 쟁점들이 쏟아지는 것 속에 어디에 위치한 것인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경험이 생각난다.

나기사 감독 개인을 놓고 보면 세대적으로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구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초반에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일공이 무장투쟁노선을 취하던 시기이다. 나기사는 노선전환시점에서 졸업해서 쇼치쿠영화사에 들어갔는데, 구세대였고 학생운동을 했지만 정작 <일본의 밤과 안개>의 전체적 관점은 신 좌파학생 쪽에 있다. 사토 다다오라는 평론가는 나기사의 영화에 대해 신좌파입장에서 구좌파를 비판하며 신좌파에 힘을 싣는다는 평가를 했는데, 저는 이런 것이 ‘절반의 진실’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의 밤과 안개>를 본 것은 세 번째지만, 나기사 감독은 수많은 문제제기 입장들 속에서 어디에 자신을 위치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안보투쟁세대에 등장하는 오타라는 인물이 공감이 잘 안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타라는 학생이 주류파라면 비주류파인 다른 학생들이 오타라는 인물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다 옳고 다 맞는 것 같게도 보이고, 좀 혼란스러운 지점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영화 마지막 장면, <일본의 밤과 안개>는 나까야마라는 인물의 일장연설로 영화를 끝맺는데, 그 순간 문제제기하던 모든 인물들이 정지된 동작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까야마라는 인물의 사운드가 약해지며 묻혀지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영화에서 나기사가 하고 싶었던 것은 신좌파에 힘을 싣는 것보다 영화 마지막에 보여주는 나까야마같은 인물, 그러니까 공허한 일장연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욕망이 아닐까 생각된다. 욕망의 정치에 관한 이야기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나까야마의 주변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욕망의 공허성이다. 나기사는 운동을 했지만 비주체성 또는 공허성, 이런 것들에 거리를 두고 지내었고 결국 이것들을 그려내는 것이 영화에서 나기사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측면에서 60년대 나기사의 다른 영화들, <교사형>, <백주의 살인마>에서 보여주는 욕망과는 상충적이면서도 보안적 관계에 있다 생각한다. <백주의 살인마>에서는 빈농출신 의 병적욕망, <교사형>에서는 일본서는 소수자인 남성주체의 욕망, 둘 다 강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로 하층계급출신들의 병적욕망을 그린다. <일본의 밤과 안개>는 거리두기와 냉정한 방식으로 인물을 묘사한다면 <백주의 살인마>나 <교사형>은 병적 섹슈얼리티를 굉장히 공감하고 최대한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간다. 나기사 감독의 영화를 욕망의 정치학이라 할 때, 그는 영화에서 이것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이 놓인 위치에 따라, 혹은 개인은 사회나 국가체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거다. 이게 오시마 나기사의 전체 영화를 관통하는 영화적 화두라 생각한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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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일본영화연구자 히라사와 고 특별 강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이자 '오시마 나기사 저작집'의 공동편집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특별 강연 및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7일 오후 <신주쿠의 도둑일기> 상영 후에 오시마 나기사라는 운동체 - ATG시대란 제목으로 히라사와 고가 들려준 오시마의 세계에 대한 강연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감독으로 오시마 나기사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한 뒤, 일본 영화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오시마 나기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8 <교사형>이후에는 해외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무대에서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졌음에도 작가주의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독도 드물다. 물론 오시마 나기사라는 존재 없이는 어느 영화도 성립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들을 보면 특이하고 걸출한 한 작가의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오시마 나기사를 하나의 매개체로 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겨난 큰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오시마는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었는데, 이것을 이론적, 실존적인 배경으로 하면서 쇼치쿠 시절에 조감독 그룹에서 시나리오집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쇼치쿠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어떤 집단에서의 창조성을 그 기반으로 삼아왔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영화라는 것은 집단적인 작업이 필요한 미디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영화도 집단 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시마는 기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주제, 내용, 사상까지 포함해서 스태프들, 배우들, 또는 친한 비평가들, 문학자, 예술가들과 논의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작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ATG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ATG
에 대해서 먼저 설명드리자면, 1961 11월 상업적으로는 힘들었던 세계 예술영화 실험 영화를 배급하는 아트하우스 조직으로서 결성되었다. 전국에 10군데의 전문 극장을 설립하고 30년 이상에 걸쳐서 수 많은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 생긴 것은 그때까지 상업 영화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일본의 영화 산업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시도의 배경에는 영화 산업 전체의 변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58년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동원된 한 해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TV가 출연해서 관객수도 극장수도 줄어갔다. 그래서 대형 영화사들은 경영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런 과정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19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하게 된다. 요시다 요시게는 <몹쓸 놈>으로 1962년에 데뷔를 한다. 이들은 조감독 시절부터 동인지를 내면서 스스로의 시나리오를 발표하고 전위적인 영화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기존의 영화 시스템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런 활동을 가리켜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따와 쇼치쿠 누벨바그라고 부르게 된다. 오시마와 요시다는 스스로 그런 호칭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원래 대형 영화사였던 쇼치쿠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오시마 같은 사람과 독립 영화를 하고 있는 고다르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식으로 본인들은 호칭을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오시마와 요시다는 압도적이 지지를 얻어내게 된다. 그런 것들 속에서 일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쇼치쿠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이와 유사한 대형 영화사들도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데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 뉴웨이브라는 것은 경영이 힘들어졌던 대형 영화사들에서 영화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했던 상업주의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운동이었다. 그런 상업주의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1960년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나 자주영화, 실험영화와 같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1950년대 후반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뉴웨이브는 영화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연극이나 미술,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일어났던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오시마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 혹은 ATG와 같은 조직이 생겨난 것은 이 때가 전환기였기 때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춘 잔혹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청춘극이라는 것과 실재성을 강조하는데, 저 같은 경우 여기서 주인공들이 목도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한국의 4.19 혁명, 일본의 안보투쟁과 같은 주제들을 대형 영화사의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면 계속 오시마가 중심적으로 생각했던 것 동아시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의 맹아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일본 학생 운동에서는 4.19혁명을 이끈 한국의 학생들을 따르라는 구호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혁명과 안보투쟁을 연결하는 것은 오시마가 특별히 작가주의적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영화에서 그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는 부분은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시장이었던 가마가사키를 무대로 해서 하층 노동자들의 폭동을 보여주고 있는 <태양의 묘지>같은 작품은 68적인 상황을 예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보여드린 <일본의 밤과 안개>같은 작품은 안보투쟁 패배 이후에 공산당과 신좌파 사이의 대립을 군상극으로 그려낸 것인데, 여기서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면서, 특유의 롱테이크를 사용해 오시마 특유의 영화 세계를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일본의 밤과 안개는 개봉 직후에 정치적인 탄압에 의해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오시마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동지들이 함께 쇼치쿠를 그만두고 독립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대형영화사들끼리 협정을 맺어 여타 영화사들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자기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영화를 찍는다는 게 영화사에 취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영화를 못 찍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활로를 찾게 된다. 다음에 소개할 몇 개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그런 한편 대형 영화사나 TV에 의지하지 않는 자주 영화 상영 시스템의 확립을 목표로 해서 활동하면서 TV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에서 찍어두었던 아이들의 스틸을 통해 단편영화 <윤복이의 일기>를 완성시킨다. ATG의 중심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긴시로는 극장 개봉이 필요했던 오시마와의 얘기를 해서 상영이 끝난 뒤, 밤에 극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레드쇼를 기획하게 되었고, 신주쿠 문화 레드쇼에서 오시마의 강연까지 해서 <윤복이의 일기>를 상영했다. 이후 영화를 오래 틀 수만 있다면 레드쇼만 해도 충분히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났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ATG를 통해서 배급을 한다는 루트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오시마가 다양한 시행착오를 하는 가운데 ATG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한 편에서 오시마와 쇼치쿠의 관계도 개선되면서 외주라는 형태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들었던 영화들은 당시의 스타들을 배우로 기용함으로써 상업성을 확보하면서 내용에서는 정치적인 특이성이 포함되어 있는 <일본 춘가고> <돌아온 주정뱅이>같은 영화다. 1963년에 <잊혀진 황금>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지는 전쟁에서의 일본의 책임, 한반도와 관련한 질문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영화는 쇼치쿠의 아이돌 영화이면서도, 당시에 일본의 기원절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것에 반대를 하고 검은 일장기를 등장시키고, 종군 위안부의 노래를 부르는 재일 조선인의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밀항해온 군인들과 학생들의 영화인 <돌아온 술주정뱅이>를 통해 동아시아, 일본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전을 결합시켜보여 주었고, 이들을 거쳐서 ATG 시절의 절정을 보여주는 <교사형>까지 이르게 된다. 그 영화는 68년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1968년의 상황에서 지지를 받으면서 칸에서도 상영되기로 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상영하면서도 높이 평가 받고 배급도 된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감독들을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러한 액츄얼하고 동시대적인 영화라는 맥락에서 오시마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세계적으로 오시마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실험적,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는 것, 일본에서 한국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컸던 것 같다.


프랑스의 뉴웨이브가 알제리를 다루었고, 각국의 뉴웨이브가 식민지 문제 혹은 베트남의 문제를 그렸듯이 오시마는 한반도 문제, 그리고 동아시아의 문제를 그려냈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교사형>이후에도 오시마는 이러한 횡단적인 실험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영화가 <신주쿠의 도둑일기>. 이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은 모두 실제의 인물들이었다. 학생 운동, 패션, 문화 등이 뒤섞여서 신주쿠라는 도시의 카오스를 필름을 통해서 표현해냈다. 세계적인 시간을 동시에 보여주면서도, 마지막에 실제 파출소 습격 장면, 이것은 실제 기록영상인데 이런 것을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그 뒤에 오는 68, 69년의 폭동을 예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시마 스스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했었는데, 이 영화에 앞선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과 더불어 봉기를 예감하고 이로써 봉기를 호소하는 영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는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를 그대로 출연시켰고,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로 잘 알려져 있던 하라 마사토를 등용시켜서 포스트 68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풍경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뒤에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일본의 권력 구조의 부조리를 보여준 <소년>이라는 작품도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족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해 쇼와시대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의식>,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로드무비 <그 여름날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오시마는 창조사를 해산하고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거기서 함께 싸웠던 감독들이 고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오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68이라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오시마, 창조사라는 것이 변형하게 되면서 그는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 새로운 영화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작가, 오시마 영화들은 작가주의, 혹은 영화사라는 관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만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역설적으로 운동의 결과를 그려내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것이고 영화를 통해서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오시마 영화를 통해서 동아시아를, 전후 영화를, 일본을, 세계영화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마를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에도 동시대적이고 자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 우혜경)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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