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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9 [영화사 강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현대성 ❹
  2. 2011.08.02 오손 웰스의 '위대한 엠버슨가'

오손 웰즈와 아나크로니즘

지난 8월 21일 오손 웰즈의 <위대한 엠버슨가>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마지막 시간이 이어졌다. ‘오손 웰즈와 아나크로니즘’을 주제로 열린 아닐 강좌의 강사는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맡았다. 그날 현장을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지금 보신 <위대한 앰버슨가>는 오손 웰즈가 처음에 편집했던 버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오리지널 버전은 아직 볼 수가 없는 상태다. 오리지널 버전은 132분인데 지금 보신 버전은 88분이고, 심지어 몇 개의 장면은 웰즈가 연출하지조차 않았으며 그나마 웰즈가 연출한 장면들조차 순서가 많이 바뀌어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처음 공개된 이래로 지금까지 영화 비평가들에게 ‘어디까지가 영화 비평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해오고 있다. 삭제된 장면들은 볼 수 없지만 스크립트, 시나리오, 그리고 웰즈가 내렸던 연출 지침 등은 남아있기 때문에 원래의 영화를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사료들을 토대로 ‘이 장면은 원래 이런 것이었어, 몹시 탁월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영화 비평인가 하는 지점이다. 그런 면에서 먼저 이 영화에 얽힌 사건들을 말씀드리며 웰즈가 처음 만들려고 했던 것을 상상적으로라도 그려보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웰즈가 영화를 만들고 나서 개봉 이후에 다시 본 첫 번째 영화가 <위대한 앰버슨가>라고 하는데, 아주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차라리 이 영화에 가해진 일을 모르는 채로 죽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것이다. 웰즈는 자신 몰래 행해진 편집들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시민 케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렇게 불완전한 판본으로 남게 된 이유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텐데, 하나는 흔히 회자되는 대로 ‘뛰어난 예술가의 영혼을 억누른 사악한 헐리우드 제작사들’ 때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웰즈 자신의 심리적인 기벽과 성격적인 결함이 이 영화를 시작부터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이다. 찰스 히건 같은 평론가는 웰즈가 이 영화의 후반작업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것은 완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주장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로버트 캐링거라는 학자의 것으로, 그는 RKO에 남아있던 여러 자료들을 모아 <위대한 앰버슨가>의 일종의 텍스팅적인 복원을 시도하여 <위대한 앰버슨가의 복원>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에 실린 자료들 자체는 후에 평론가들이 많이 참조하게 되었지만, 그가 시도하는 오이디푸스적인 맵핑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엄청난 셰익스피어주의자였던 웰즈가 어떤식으로도 <햄릿>을 연출한 적이 없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고, <햄릿>이 그의 자전적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조너선 로젠봄은 캐링거의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 영화에 일어난 일은 당시 웰즈가 처해있던 제작 상황을 보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위대한 앰버슨가>의 촬영이 끝나고 바로 1주일 후에, 웰즈는 차기작으로 계획했던 <잇츠 올 트루>의 촬영을 위해 브라질로 떠나게 된다. 리오 카니발 장면이 꼭 필요했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당시 <위대한 앰버슨가>의 편집 담당은 로버트 와이즈였는데, 웰즈는 그와 전화와 전신으로 연락을 해가며 원격 편집 감독을 했다. 이런 방식은 한 달여 동안 순조롭게 이루어져 132분짜리 오리지널 판본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42년 3월, 당시 RKO의 수장이었던 조지 셰퍼는 와이즈에게 영화 길이를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 했고, 와이즈는 이를 웰즈에게 전한다. 웰즈가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사이, 무작위의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오리지널 판본의 첫 사전시사가 진행되었다. 관객들로부터 회수된 설문 결과는 그리 처참한 편이 아니었지만, 당시 참가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상영장의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경영진들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이틀 후에 임의로 17분을 단축시킨 115분 버전의 시사회를 한 것인데, 이번에는 설문 결과가 조금 더 호의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웰즈는 이후에 영화를 더 단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에 따라 웰즈는 여러 가지 수정안들을 미국으로 보내지만, 마침내 셰퍼는 웰즈의 동의 없이 재촬영을 결정한다. 결국 재촬영 분량들을 끼워 넣고 러닝타임을 단축시키고, 장면들의 순서를 바꾼 상태로 <위대한 앰버슨가>는 결국 42년 8월에 개봉했고, 처참히 실패했으며, 웰즈는 다시는 헐리우드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이런 대략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원래 웰즈가 만들려고 했던 <위대한 앰버슨가>를 상상적으로나마 그려보고 나서야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아나크로니즘, 시대착오적 감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웰즈의 몇몇 특이한 영화들, 대표작인 <시민 케인>이나 후기의 걸작 <한밤의 종소리>, 혹은 <위대한 앰버슨가> 못지 않게 수난을 겪다 결국 미완으로 남겨진 <돈키호테> 같은 영화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사라져간 귀족적 용맹함에 대한 송가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휄즈는 실제로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미덕들이라고 말했다. 이는 어떤 매너나 예법,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던 시대에 대하 향수가 아니라, 매너나 예법을 넘어서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고 그것이 생기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대한 향수다. 이 영화에서 어린 시절의 조지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소년이 마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사실 웰즈적 영웅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그들 모두가 자신의 시대에 충실한 채로 남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구식이 되었음을 알고도 그것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구식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구식으로 남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웰즈의 인물들은 전자다. 조지 역시 그런 사람이고, 심지어 유진조차도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자신이 예견했던 시대와 어긋난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유진이라는 캐릭터가 꽤 중요한데, 이 인물에게는 웰즈의 좀 다른 측면의 아나크로니즘이 투영되어 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이 흔히 뒤쳐진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나크로니즘이라면, 발명가인 유진은 자신의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불러들이는 사람이지만 정작 그 시대가 왔을 때는 그 시대와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사람이다. 사실 이 영화를 거듭 볼수록 가장 웰즈적이라고 느껴지는 인물은 조지가 아니라 오히려 유진이다. <위대한 앰버슨가> 같은 영화들을 만들던 시기에 웰즈는 혁신가였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길을 닦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들의 시대가 왔을 때 그는 구식 인물이 되어있었다. 예언적이라고까지 말하는 건 아니지만 유진이라는 인물은 웰즈가 느꼈을 시대에 대한 어긋남이나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인물들은 타임머신이 발명된다고 해도 자신과 맞는 시대를 발견할 수 없다. 오직 시대와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다. 남아있는 판본들과 사료들을 통해서 재구성해보면, 이러한 웰즈의 시대착오적 영웅들의 딜레마가 가장 잘 표현된 영화가 바로 <위대한 앰버슨가>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 박예하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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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의 두 번째 영화 <위대한 앰버슨가>(1942)는 가족 서사극이자 멜로드라마이며, 세기말 미국사에 대한 논평이고 문명사적 전환기에 대한 진단을 담은 대작이다. 비록 <시민 케인>(1941)의 후광에 가려 그만큼의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롯한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시민 케인>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풍부한 만듦새를 자랑한다. 스물일곱 살 천재 오슨 웰스는 브루스 타킹턴의 1918년 원작 소설을 각색하면서 한 가족을 통해 역사의 흐름과 미국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려는 야망을 가졌던 것 같다.

“앰버슨 가의 화려함은 187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오슨 웰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먼저 무대인 19세기 말 인디애나폴리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풍습과 관례, 미덕과 재미를 소소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민속지적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도입부는 주인공인 앰버슨 가의 대저택으로 이동하면서 한 가족의 역사를 훑는다. 메이저 앰버슨의 딸인 이사벨은 과거 유진이라는 청년을 사랑했으나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 조지를 낳는다. 천방지축으로 자란 조지가 대학을 다니던 즈음, 이사벨은 자동차 사업가이자 상처한 채 딸 루시를 홀로 기르고 있는 옛 연인 유진과 재회한다. 이사벨의 과묵한 남편 윌버가 타계하면서 앰버슨 가의 가세는 점차 기울어가고, 이사벨은 유진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아들 조지는 어머니의 새로운 사랑을 가로막으며 유진을 경계한다.

<위대한 앰버슨가>의 강한 흡인력은 무엇보다 생생한 캐릭터에서 나온다. 앰버슨 가의 망나니 아들 조지는 자신의 미래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이 부르주아적 삶의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 이사벨은 몰락해가는 가문의 과부이자 까탈스러운 아들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사랑을 되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여기에 자동차 사업가이자 사랑의 쟁취자로 야심을 드러내는 유진, 그리고 조지와 밀고 당기는 관계를 맺는 유진의 발랄한 딸 루시가 조화를 이룬다. 나아가 이 캐릭터들이 변화하는 시대의 어떤 경향들을 상징한다는 점 역시 <위대한 앰버슨가>의 결을 윤택하게 만든다. 앰버슨 가문의 화려한 저택, 대학을 다니던 조지의 귀향을 축하하기 위한 웅장한 무도회 시퀀스, 무도회 다음날 주인공들이 새로운 발명품인 ‘말 없는 마차’를 시승하는 눈밭 시퀀스 등은 영화 미학적으로도 뛰어난 성취로 인정받아왔다. 버나드 허먼의 영화음악과 어우러지는 음향 효과 역시 시각적인 장치들 못지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들어볼 가치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의 이야기는 자유와 절제, 부흥과 몰락, 사랑과 이별, 기억과 망각, 전통과 문명, 퇴보와 혁신 등의 대립쌍을 풍부히 채집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무도회 시퀀스의 한 대목에서 유진은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옛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시간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위대한 앰버슨가>에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오슨 웰스의 태도는 수긍이라기보다 연민이었던 것 같다. 제작사인 RKO가 최종편집권을 가져가는 바람에 1시간 가까운 분량을 잘라내고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만일 오슨 웰스의 디렉터스컷으로 완성되었더라면, 전환 시대에 대한 이 영화의 논평은 훨씬 씁쓸하고 데카당트한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글/한선희(아트하우스 모모 시네마테크 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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