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은 카르멘의 전성시대였다. 프란체스코 로지, 카를로스 사우라, 피터 브룩이 마치 경연이라도 하듯이 카르멘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은 당시 비제의 오페라가 저작권 소멸상태가 됐기 때문이었다. 고다르 또한 작업에 착수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비제의 오페라를 느슨하게 차용만 했을 뿐 그 유명한 음악을 쓸 생각이 없었다. 오토 프레민저의 <카르멘 존스>(1954)처럼 이야기를 현대로 옮겨왔고, 처음엔 이자벨 아자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다. 아자니의 바쁜 일정 탓에 당시 신인이었던 마루츠카 데트메르스가 최종적으로 카르멘 역에 캐스팅되었다(그녀는 국내에는 <한나의 전쟁>(1989)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고다르의 계획은 급진적이었다. 그는 음악을 따라가는 이야기, 혹은 음악이 이야기의 전체가 되는 영화를 구상했다. 카르멘은 음악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악이 카르멘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비제의 음악을 대신한 것은 엉뚱하게도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이다. 고다르는 비제의 음악이 바다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중해의 음악이라 여겼고, 자신에게는 그 바다가 브르타뉴의 해변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현악 4중주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합은 작위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1980년대 고다르의 성과중의 하나는 독창적인 사운드 몽타주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다이얼로그, 모놀로그, 음악, 효과음, 소음 등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과격하게 콜라주하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영화사>(1998)라는 작품에서 사운드의 거대한 리믹스 실험으로 만개한다.


이 영화는 사실상 내러티브나 주제와는 하등의 상관없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과 두 공간이 밧줄의 매듭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야기의 층위를 그나마 가늠할 수 있는 카르멘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가들이 베토벤 현악 4중주곡을 연주하는 장면들인데, 사실 연주장소가 어디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베토벤의 음악은 거의 맥락 없이 몇 번이나 흘러나오다 끊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소리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은 이미지와 불협화음을 만들고 오페라의 음악과 달리 이러한 음악은 극적인 상황과 필연적인 연결점이 없다. 인물과 그들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행 강도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의 진행과 강탈 시퀀스 간에는 기묘한 결합의 원리가 숨어있다(고다르는 배우의 연기지도를 하면서 언제나 ‘음악을 들으면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다양한 소리들, 특히 타이프를 치는 소리, 인간의 몸이 사물에 부딪혀 발생하는 소리, 다양한 소음들이 음악 이상의 빈도로 영화에 출몰한다. ‘이것은 정당한 이미지가 아니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 말하는 고다르에게 소리의 레벨에도 서열은 없고 중요한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중심 소리란 없다. 모든 소리는 이미지와 더불어 동등한 권리로 작품 내부에 삽입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이러한 소리들은 불협화음이나 변박자로 하모니와 리듬이 깨져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배치의 중심은 비어 있다. 이는 영화의 제목이 상기시키듯이 ‘이름 이전에 무엇이 존재 하는가’라는 고다르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름이 주어지기 전의 사물의 모습, 혹은 카르멘이라는 여성의 위대한 신화가 주어지기 전에 여자와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장 지로두의 ‘일렉트라’에서 빌려온 말인데, 그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워뮤직>(2004)에서 고다르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빛으로 향해 그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음악이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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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오페라 연출가이기도 했던 비스콘티는 거의 평생 동안 멜로드라마에 탐닉했다. 유작인 <순수한 사람들>에서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상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륜과 정조의 문제를 다루며 다시 한 번 멜로드라마로 돌아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사교계의 살롱과 귀족들의 저택인 실내 공간들로, 소품들의 화려함과 다채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인공들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의상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장면이 바뀔 때, 동일한 공간이나 의상이 다시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사물들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정점에 달한 영화미술, 숏 하나하나가 회화 작품과도 같은 프레이밍으로 이뤄진 미장센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극 전체의 분위기와 상황, 인물들의 감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정열적인 애정, 격정적 질투의 감정을 발현하는 주인공들의 얼굴과 눈빛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은 그 자체가 최고의 미장센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식의 4막 구성을 따라 진행된다. 훤칠한 미남 주인공 툴리오(지안카를로 지안니니)가 정숙하고 순진한 아내 줄리아나(로라 안토넬리)를 버려두고,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으며 사교계의 여왕처럼 군림하는 테레사(제니퍼 오닐)와 정분을 나누는 격정과 질투의 이야기가 영화의 1막이다. 테레사와 줄리아나를 연기한 두 배우의 외모가 무척 닮았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캐스팅으로 보인다. 많은 남자와 정분을 뿌리고 다니는 테레사와 정숙한 아내인 줄리아나는 툴리오에게 욕정과 순수라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을 대변한다. 그러나 줄리아나의 순수함이 깨어져나가면서 두 여인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며, 그들의 외모 또한 더욱 더 닮아간다.


툴리오가 줄리아나에게 돌아오면서 부부는 행복을 되찾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처럼 밝은 분위기의 2막은 싱그러운 자연의 실외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평화는 너무도 짧다. 줄리아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뀐다. 그리고 줄리아나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영화는 파멸과 죽음의 4막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툴리오와 테레사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이 검은색은 줄리아나의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툴리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비스콘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데카당스의 미학에 매혹된 사람이었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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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강좌4] 한창호 평론가가 본 펠리니와 오페라의 관계

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이 한창인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펠리니의 작품세계를 보다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펠리니의 달콤한 영화읽기'란 영화사 강좌가 열리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3시 30분, 그 네 번째 시간에는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죽음 : 페데리코 펠리니와 오페라'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펼쳤다. 펠리니의 영화세계에 대해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에 등장하는 오페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들려준 한창호 평론가의 강연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한창호(영화평론가): 제가 오늘 준비한 내용은 펠리니 영화와 관련해서 오페라의 역할에 대한 내용입니다. 방금 보신 영화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오페라가 등장한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펠리니는 이탈리아인 치고는 오페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합니다.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 장르라면, 오페라를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는 1983년에 펠리니 말년에 할아버지가 되어 만든 작품인데도 평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페라를 많이 사용한 작품입니다. 그 계기가 된 모티프는 마리아 칼라스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1977년에 생을 마감했는데 말년에 대략 10년 정도를 파리에서 하녀랑 둘이 살며 은둔하다시피 하다가 생을 다했다고 합니다.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그것은 ‘화장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카톨릭에 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화장을 한 후에는 고국 그리스의 에게해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그리스 문화부에서 주관하여 에게해 바다에서 그 행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펠리니로서는 재를 뿌리는 행사를 보고, 마리아 칼라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그녀의 죽음이 상정하는 오페라라는 예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80년대 들어 펠리니는 영화의 운명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많이 염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영화의 운명이 빨리 종결될 수 있다는 염려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80년대 영화들에는 TV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염려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진저와 프레드>는 물론이고 <달의 목소리>에도 말입니다. 영화도 오페라와 같은 운명이 멀지 않았다는 애도의 태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관련된 테마가 나온 것입니다.

영화는 나폴리에 큰 배가 정박돼 있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거기에 지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는 전설적인 소프라노라고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에드메아 테투아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영매가 나오는 장면에서 에드메아의 제스처를 흉내 내는 인사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마리아 칼라스의 인사법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는 마리아 칼라스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서 재를 뿌린다는 것은 유럽, 특히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너무도 강력한 죽음에 대한 은유입니다. 저승의 섬으로 간다는 것의 은유는 아놀드 베크린의 그림을 더불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얀 배가 저 앞에 있는 섬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갈 것인가? 죽음에 관련된 은유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도, 에드메아 테투아 같은 운명에 곧 놓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동일한 모티프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배는 에드메아 테투아의 장례식을 위한 배면서, 동시에 그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는 비스콘티적인 주제를 많이 베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비스콘티와 펠리니는 평생의 라이벌이었으며, 따라서 비교하는 게 두 사람의 영화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스콘티는 늘 죽는 이야기를 했고, 펠리니는 늘 코미디를 만들었습니다. 비스콘티는 공산주의자, 펠리니는 중도파이며 자유주의자입니다. 비스콘티에게는 이탈리아 사회 전반의 전망이, 펠리니에게는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만 보면, 역설적으로 비스콘티는 멜로드라마를 만들었으므로 개인의 비극적 고통이 더 강조되어 있고, 펠리니가 만든 코미디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더 잘 드러납니다. 영화적으로만 보면 펠리니가 더 정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역설이 존재하게 됐습니다. 음악과 시나리오의 측면에서도 비스콘티는 귀족적, 펠리니는 서민적입니다. 비스콘티는 특별한 환경에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성질의 음악과 시나리오였고, 펠리니는 일반적인 환경에서 일반적 교육을 받은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감성적이고 대중적인 니노 로타의 음악도 펠리니의 이러한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비스콘티는 클래식이었고 굉장히 비극적인 음악을 썼습니다. 비스콘티가 베토벤이라면, 펠리니는 모차르트 같습니다. 제 생각에, 그러한 라이벌 의식이 오페라에서 펠리니가 멀어지도록 하는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에서 누가 보더라도 오페라는 비스콘티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티리콘>, <여인의 도시>, <카사노바> 등을 보면 에피소드가 파편화돼 있습니다. 사실상 <사티리콘> 이후의 영화는 처음에 보기에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번 다가온 후에는 오히려 <달콤한 인생>이전의 영화가 순진하게 느껴집니다. 펠리니 영화에서는 대사에 대해서도 특정한 논리성이 없습니다. 두서없이 나옵니다. 오페라에서도 4중창, 5중창을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화의 대사도 그런 식입니다. 펠리니는 <그리고 배를 항해한다>를 비교적 쉽게 만들었습니다. 장례식 하러 간다는 메인 테마가 있고, 내러티브가 완전히 파편화되어있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냉대하던 장르였던 오페라를 썼습니다. 너무나 많은 오페라가 등장해서 다 정리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세 가지 정도를 강조했습니다. 전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작품입니다.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의 서곡, <리골레토 (Rigoletto)>, <아이다 (Aida)>입니다. 이 세 개의 오페라가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의 도입부, 중간, 종결부에서 각자 강조되어 있습니다. 펠리니는 비스콘티처럼 오페라의 비장함과 아름다움을 쭉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 개는 강조되어 있습니다. 나폴리 항구에서 재가 도착해서 배에 올라갈 때, 어떤 남자가 손가락으로 딱 가리킬 때, 나오는 음악이 <운명의 힘>의 서곡입니다. 기악곡이 연주되고 가사도 나옵니다. <운명의 힘>이라는 멜로드라마는, 주세페 베르디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입니다. 삼각관계,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여동생을 사랑하는 것, 원수인 오빠가 그 사랑을 방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결말은 베토벤적인 음악입니다. 마치 <운명>처럼 불안하고 비극적인 운명이 다가옴을 암시합니다. 본래 오페라의 서곡이라는 것은 다 그런 식으로 기능합니다. 오페라의 진행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배가 출발할 때, 불길하게 마치 운명이 나를 두드리듯이 그 기악곡이 들립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숭고한 목적을 갖고 탑승한 사람들, 즉 필멸의 존재들이 죽음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상징으로 그 음악을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참고로 <운명의 힘>의 서곡은 원래 기악곡인데, 이 영화에서는 죽은 사람을 구해주자는 내용의 가사가 조금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펠리니의 친구였고 이탈리아 문화계에서 대표적 시인이었던 안드레아 잔조토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습니다. 펠리니는 베르디를 그대로 가져와 쓰지 않고 변경을 가한 것입니다. 아름답게 잘 찍힌 도입부 시퀀스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펠리니 식의 오마주가 있었던 장면입니다. 흑백, 세피아, 컬러로의 색깔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고 뤼미에르 형제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며, 나폴리 항구의 큰 배는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나온 본론 부분의 선상 오페라도 강조된 부분이다. 선장이 가수들을 데리고 기관실 구경을 시켜줍니다. 노동자들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중 하나가 노래를 요구하고, 자연스럽게 가수들 사이에 목소리의 경연이 벌어집니다. 전형적인 테너인 살찐 남자로부터 시작하여, 자신들의 음역을 자랑합니다. 마지막에는 여자 가수가 <리골레토>에 나오는 부분인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를 부르며, 다른 가수들도 계속 그 부분을 부릅니다. 그 노래는 내러티브나 컨택스트 상에서 큰 의미를 부여한 거 같진 않습니다. 선원들이 오페라를 만나기란, 그리고 일반 관객도 오페라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 장면은 오페라의 무대처럼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 무대를 변형시켜서 오페라 극장의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치 비스콘티를 비꼬는 것처럼 분명히 상하관계가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펠리니는 코미디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영화 내부적으로 보면 비스콘티보다 더 정치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종결부에서 쓰인 음악은 <아이다>입니다. 아이다가 부른 아리아인 <다시는 고국을 보지 못하리라> 부분입니다. 선상에서 장례식이 진행될 때, 재가 바람에 불려 날아가고, 이 때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음악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에드메아 테투아가 부르는 설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 녹음은 그렇게 유명한 가수의 노래는 아닙니다. 이 아리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진혼하는 레퀴엠처럼 쓰기에는 매우 적절했던 음악이었으며, 의미도 좋았다고 봅니다. 실제 오페라의 내용은 이집트에게 패해 속국이 된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가 이집트 황실의 시녀가 되었다가 이집트의 개선장군 라다메스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는 멜로드라마입니다. 3막에서는 밤에 나일강변에 아이다가 도착하여 나일강변에 투신해서 죽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하니 갑자기 자기연민이 몰려옵니다. 아이다는 아름다운 조국을 추억합니다. 푸른 하늘, 녹색의 숲, 맑은 아침, 그 조국을 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겠구나, 라는 한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다시는 고국을 보지 못하리라> 부분입니다. 에드메아 테투아도 마리아 칼라스도 죽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가는 운명이기에, 이들의 죽음을 위무하기에 굉장히 적절한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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