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의를 지키는데 이유가 어딨어

-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지난해 <황야의 7인>이 톰 크루즈 주연으로 다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존 스터지스 감독이 만든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무엇보다 율 브리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등의 개성적인 배우들이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작품의 성공으로 이후 속편이 세편이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때마침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격자>가 개봉하는 즈음에 과거의 서부극과 새롭게 만날 좋은 기회다.

 

 

서부극에서 총싸움은 장르의 약속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총을 빼들고 상대와 싸워야 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보안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가장을 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인디언들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서, 잃어버린 조카를 찾기 위해서 등등. 이들은 결국 싸워야만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싸움의 이유다. 제대로 된 싸움의 이유만이 이들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역마차>의 키드(존 웨인)는 처음에 등장할 때만 해도 위험한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디언들과 싸우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총을 빼들 때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즉 왜 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 스터지스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해 만든  <황야의 7>은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세 번의 총격전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번째와 마지막 싸움인데 여기서 주인공들은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싸운다. 이를테면 마을 사람 모두가 죽은 사람의 장례를 거부하고 있을 때 크리스(율 브리너)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관이 실린 마차에 용감히 올라탄다. 그리고는 생명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싸움을 한바탕 벌인 뒤 결국 죽은 자를 땅에 묻어준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거기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옳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이 거침없는 행동이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마지막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악당은 의외로 이해심이 넓은 편이라서 힘들게 붙잡은 크리스 일행을 말까지 태워서 마을을 떠나게 해준다. 그러니 주인공들이 이대로 마을을 떠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처럼 악당에게 세금을 바치며 살았을 테고, 주인공들은 다시 자유로운 총잡이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말머리를 돌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떤 액션 장면보다 이 결심의 순간이 가장 큰 짜릿함을 준다. 꼭 싸워야 할 이유도 없고(배신은 마을 사람들이 먼저 했다) 수적으로도 불리하지만(“자네들 정말 미쳤군!”),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총을 함부로 다룬 악당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또는 마을에 숨겨 놓았다고 믿는 보물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관객의 짐작일 뿐이며 우리는 7인의 총잡이들의 속마음을 끝내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 조차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눈빛과 단호한 몸짓은 결국 관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설득시키고야 만다. 이보다 명쾌하고 매력적으로 싸움의 이유를 납득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글_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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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한 사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 이별주를 마시고 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그가 타고 떠날 백마가 한가로이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그를 전송하는 노인과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탄다. 사내는 암살자. 누군가를 죽이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드디어 사내가 암살을 할 표적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자 이제부터 피가 튀는 혈투가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사내는 싸울 생각은 안하고 또다시 악사를 들여 음악을 연주하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술타령이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는 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원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싸우면 깨워라” 하고는 잠을 자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던 아저씨가 “뭔 놈에 무협 영화가 주구장창 술타령만 해?” 분노에 찬 한마디를 하고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하하. 장철의 영화 <대자객>이 상영되던 9년 전 부천 영화제의 극장 안 풍경이다. 이미 영화를 보았던 나는 폭풍 같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라스트 혈투 시퀀스의 감동을 친구가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 깨워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영화 보기는 뒷전이었다.


<대자객>은 사미천의 사기. 자객열전의 수많은 주인공들 중 섭정이란 주인공을 선택하여 만든 영화이다.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멋진 자객들 중 왜 하필이면 섭정인가? 영화 <영웅>의 주인공 형가는 생선 속에 칼을 숨겨 진시황을 암살 하려다 실패한 비운의 자객으로 자객열전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자객이다. 장철은 왜 형가가 아니라 섭정을 선택 했을까? 섭정이란 자객은 조말처럼 장군 출신도 아니다. 섭정은 시장 통의 개고기 장사치이니 비천한 신분이다. 형가처럼 폭군 진시황을 처단하려는 대의를 명분으로 삼지도 않고, 예양처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칼을 잡은 자도 아니다. 그가 칼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개고기 장사치인 비천한 자신. 장전된 채로 구석에 놓여있는 총이었던(에밀리 디킨스의 시) 자신을 알아보고 불러내 준 이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충의 때문도, 정의를 위한 대의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간파한 자를 위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소진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재능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 병졸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이니 하늘에 별 따기다. 섭정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재능을 꽃 피울 전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개고기 장사치로 늙어 죽어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이가 나타나 가난한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살펴 준다. 의리를 맺은 것이다. 의리는 갚아야한다. 섭정이 의리를 갚을 길은 단 하나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다.



장철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칼을 잡은 주인공을 선택한다. 관객들이 지금 보는 이 영화가 무협영화인가? 의심할 정도로 영화는 암살을 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는 섭정의 모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누이를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사를 미뤄 자신의 암살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남은 것. 사랑하는 연인이다. 섭정은 연인과 이별을 하고,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서야 암살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장이모우의 <영웅>에서 형가와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은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국가와 개인 간의 문제에 대한 파시즘의 혐의가 다분한 긴 대화 신이 있듯이, <대자객>에서는 섭정이 애인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과 빛나는 한순간을 위한 무모한 삶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80년대 고우영은 만화 <초한지>의 한 에피소드에서 섭정을 우매한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정도, 대의명분도 없이 개죽음을 한 자객이라 평한다. 사바 료타로는 막말의 암살자들에서 자신은 암살자들을 혐오한다고 한다. 암살자들이란 그들의 대의명분이 무엇이건 거래에 의해 타깃이 정해지고, 뒤에서 소리 없이 표적을 제거해야 하니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란 말이다. 장철이 <대자객>을 촬영하기 위해 쇼 브라더스의 스튜디오로 출근을 할 때, 거리에서는 학생들의 데모 대문에 최류탄 연기가 자욱했었다고 한다. 그 때는 1967년이었다. 장철은 이런 시대에 이런 영화를 보러 누가 올 것인가? 한숨을 쉬며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항거하던 플라워 무브먼트의 젊은이들은 장철의 주인공 섭정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자객>의 라스트. 섭정을 연기한 왕우는 라스트 대혈투 신을 촬영하기에 앞서 장철에게서 “네가 최고다. 너는 슈퍼맨이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걸어라!”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일백여명의 적군들이 도사린 적진에서 왕우는 강철로 만든 보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나는 슈퍼맨이다”를 되뇌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라스트 혈투 시퀀스가 시작되면 왕우는 단호한 걸음걸이를 너무 과도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뒤뚱거려 관객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가 싸움을 시작하고, 그의 하얀 옷이 적들의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왕우는 섭정의 원념을 고스란히 빙한 것처럼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드디어 <대자객>의 가장 빛나는 장면. 암살에 성공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칼로 자신의 얼굴 껍질을 도려내는 섭정의 시점 쇼트. 이 단호한 한 쇼트를 위해 장철은 90분을 끌어온 것이다.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자취를 지워버리려는 자. 의협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모든 것을 무화 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 장철은 자객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국충정과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주인공들 보다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의 울분과 뜻하지 않게 맺어진 함정과 같은 의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사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파시즘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니힐리즘적인 자객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시대 무협 영화를 만든 호금전이 액션 장면을 우아한 수평이동 롱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여 중국 무협의 아취를 보여주었고, 서양의 추리소설 줄거리처럼 치밀한 복선과 주인공들의 암투에 주목하여 신 무협을 만들어 냈다면, 장철은 주인공의 원념을 일직선으로 투박하게 그리는 것에만 전념한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수호지의 무송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쾌활림>과 <복수>가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무송 에피소드는 반금련과 무대. 그리고 서문경의 불륜과 치정 살인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거두절미. 장철은 서문경과 반금련의 불륜 에피소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tv의 아침 연속극 팬이라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영화라 분노 할 것이다. <쾌활림>이 시작되자마자 무송은 벌써 반금련의 목을 잘라 서문경이 있는 술집으로 간다. 반금련의 목을 서문경에게 던지며 두 사람의 혈투가 시작되고, 서문경은 무송에게 박살이 난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 분이 넘지 않아 모두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장철의 관심은 무대의 복수를 한 무송의 유배를 떠나 쾌활림에 이르러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를 죽이는 피의 잔치를 벌이고 피에 젖은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벽에 “무송이 살인하다”라 쓰는 무뢰한의 원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 했던 것이다.

<복수>는 무송 에피소드를 현대로 옮겨 만든 것인데, 반푼 짜리 인간 무대를 멋진 외모와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졌지만, 아내를 만족 시키지 못하는 성급하고, 폭력적인 적룡으로 변모시켜 그를 영화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사기그릇이 깨어진 바닥을 맨몸으로 뒹굴다 죽어 버리게 한다. 장철에게는 적룡을 속여서 살해 한 파렴치한 간부들의 불륜과 음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의 내용을 파악하게끔 아주 최소한의 이삼 분만 그들의 음모 장면에 할애하고, 나머지 80여분은 복수를 하는 적룡의 동생 깡따위(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하면 안 되듯 깡따위를 강대위라 하면 왠지 섭섭하다)의 몫으로 만든다. 누가 형을 죽였는지 알아내는 수사와 추리 따위 역시 장철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형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동생 깡 따위의 분노만이 중요하다. 그 분노는 깡 따위가 혈투 끝에 몸은 죽었는데도 정신만이 살아나 좀비처럼 원수를 갚게 만든다. 영화의 라스트에 깡따위가 난간에 기대어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 죽어 있는 긴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 몇 초간 깡따위가 죽은 척 했다가 적이 다가오자 기습을 하는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깡따위는 죽은 것이다.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그 원념이 너무나 사무쳐 그는 살아나 원수를 갚고서야 죽는 것이다. 왕우가 <금연자>에서 라스트 혈투 장면을 찍을 때 장철은 “너는 죽었다. 그러나 원념 때문에 부활 해야한다”고 주문을 했다고 한다. 왕우는 “이거 정말.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투덜댔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들에게 사지가 묶이고 가슴에 네 개의 말뚝이 박히는 장면을 촬영하며 스스로 광기에 휩싸여 촬영 전까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잊고 다시 살아나 칼을 들었다고 한다. 장철은 그런 감독이다.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 그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다. 결국 그들은 항상 파멸의 길을 선택하고 원념을 내뿜고 죽는다. 말이 되고 안 되고 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내는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지만 장철이 원하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왜 이런 남성 영화가 만들어 졌을까? 왜 이런 남성 영화가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2012년 한국의 시네마 데끄에서 상영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런 종류의 액션 영화들은 비웃음거리가 되는 남성 판타지들이다. 비웃음은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비웃음도 여러 가지 종류다. 나는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 중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의리. 대의 따위를 맹목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설파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장철이 만든 자기도취 때문에 교만한 주인공들이 기득권자들이 지들 편리한 대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대의. 의리 따위를 무화시키며 파멸하고, 말도 안 되지만 원념 때문에 되살아나 피를 뿌리는 이런 불손한 영화들에게는 반가운 비웃음을 보낸다.

(by
오승욱_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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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는 사람 2012.03.09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단을 나눠주시고 글씨 크기를 좀 키워주시다면 가독성이 훨씬 좋아질 것 같습니다. ^^;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7일 오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피닉스>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두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를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 강사는 오승욱 감독이 자리하였고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함께 진행하며 흥미로운 대담을 펼쳤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진행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맡았다. 남성 영화에 대한 애호와 <피닉스>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앞 다투어 이야기하며 열띤 대화의 장을 펼친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올해 초에도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 <북극의 제왕>을 추천해서 상영했고 <피닉스>도 함께 추천해주셨지만 당시에는 상영하지 못했다. 대신 여름에 <피닉스>가 걸맞을 것 같아 이번에 틀게 되었다. 오승욱 감독을 소개한다. 말씀하신 대로 정말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셨는지?
오승욱(영화감독): AFKN에서 봤고, 김산이라는 만화가가 있는데 이걸 ‘불사조 날아오르다’라는 제목으로 만화화하기도 했다. 주인공 소년이 헹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탈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성욱: 영화는 남성의 몰락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과 사막이라는 공간이 흥미로웠는데 어떠셨는지?
오승욱: ‘남성의 허세와 유희’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60년대 중반 이후 알드리치의 영화는 50년대 영화와 다르게 ‘남성들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남성을 얘기하는 미국 영화감독이 둘 있다. 물론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남성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감독들도 있다. 하워드 혹스와 존 포드가 대표적인데 존 포드는 남성들의 얘기를 할 때 그들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그는 결정적인 클로즈업을 한두 번 밖에 안 쓴다. 남성이 윤리적 결단을 내렸을 때 그 존엄성에 대한 존경을 담으려 한다. 한편 하워드 혹스는 주인공들의 관계 속에서 남성의 섬세한 면을 다룬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담아낸다. 50년대까지 미국영화의 이러한 남성상을 샘 페킨파와 로버트 알드리치가 바꿔놓는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클로즈업은 부조종사인 리처드 아덴보로가 기장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싸우면서 무식함을 지적할 때 쓰인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알드리치의 남성상에 방점을 찍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알드리치는 남성으로서 버텨왔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 남성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 것 같다. 페킨파의 경우 남자를 아름답게 보여줄 때는 남성들이 제정신이라면 도망가야 하는데 무언가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죽으러 갈 때다. 용기 있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게 아니라 바보짓하는 남성들에게 만가를 바친다고 해야 할까. 알드리치와 페킨파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남성들의 비애를 담았던 것 같다.

김성욱:
이 남성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에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후반부에 신기루처럼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리를 부상당했던 친구가 부인 사진 한 장을 떨어뜨리고 죽는 장면과 더불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부인 사진 가졌던 사람이 죽고 중사는 여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고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던 사람과 기타 치던 사람은 초반에 죽어버린다. 이런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승욱: 남성 얘기를 하다보면 여성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남성 영화들에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그 여성이 언제든지 자신을 박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남성의 동력이 되고 폭발한다. 레오네와 페킨파, 마틴 스콜세지의 70~90년대 영화가 그렇다. 여성에 대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다룬 이들 작품들에서 여성이 부재하더라도 그 여성의 귀기라는 것이 남성들을 계속 괴롭힌다.

김성욱:
몇몇 배우들은 그들의 내력과 영화가 연동되는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어릴 때 히틀러 소년단이었고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영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2차 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로 활약했고 초반에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나오다가 나중에 안소니 만이나 히치콕의 영화에서 굉장히 히스테릭한 인물로 등장한다. 또 젊은 세대인 크루거를 보면서 “앞일을 이끌어가겠지만 미래를 못 볼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중사는 이런 식의 재난 영화에선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다. 내러티브의 도덕적 논리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중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위를 아버지로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가 생일에 팬케이크을 만들어줄 때 아버지는 자기를 군대에 보냈다. 그래서 중사가 대위 앞에서 가부장성에 대한 반항을 표출한다고 보았다. 군인으로서는 비겁하지만, 아버지에 반항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강한 모습이다. 속 내용은 결국 자기 죽기 싫다는 건데, 다른 한편으론 ‘그 때는 반항 못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오승욱:
50년대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남성을 얘기할 때 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얘기한다. 60년대 들어서 알드리치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도 없다. 알드리치도 자기 아들을 플레이보이 보는 배우로 출연시켜서 곧바로 죽이지 않나. (웃음) 아버지 아들 손자 이 얘기는 60년대 남성을 다룬 영화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알드리치나 페킨파에서 남성들의 관계는 일 때문에 혹은 싸움 때문에 전장에서 맺는 관계이다. 횡적인 관계다. 70년대에 보수로 돌아선 영화가 <대부>이다. 코폴라는 아버지 세대를 복원한다. 관계 속에서 남자를 다루는 것이 진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버지 없고 아들한테 물려주는 것 없고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기들끼리 폭사하는 것이 <대부>나 폰다 가족들이 찍은 <황금 연못>보다 인상적이다. 알드리치의 이 영화도 그런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허세라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온갖 허세가 총출동한다. 대표적인 것이 ‘괜찮아 잘 될 거야’ 식이다. (웃음) 위기를 위트 있게 표현한다. 리처드 아덴보로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싸우는 장면이 있다. 서로 삐지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 루... 루... 미안해’ 하면서 후회하고, 루는 축 처진 어깨로 가고 있고, 그 다음 혼자 있는 아덴보로한테 스튜어트가 가서 아무도 안 웃을 농담 하면 서로 용서하는. 이 영화는 그런 것의 총집합이다. 지금 봐서는 비웃음 밖에 안 된다. 싸우면 그 다음날 안 보지 않나. 상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진 않지 않나. 알드리치 영화에선 둘이 힘을 합쳐서 가야하니까 그렇게 한 거고 또 그런 식의 화해 직후에 안 좋은 일들이 터진다. 서푼짜리 위안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는 것을 곳곳에 배치한 게 좋았다. 특히 영화 다 끝날 때 와서야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을 하디 크루거가 모형 비행기 만들던 사람이라는 말로 다 무너뜨려버린다. 노동자들도 비웃음거리로 그려지는데, 남성이 노동으로 존재한다는 가치가 일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없어져버렸다. 남성 노동의 가치가 당대 미국에서 의심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이천 년대 들어서 계속 해서 의심받고 있지 않나. 자본가와 서비스하는 사람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흙을 파내고 엎는 것과 무엇을 만드는 것에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당시 미국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다. 다들 구조되고 나서도 특별히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중사는 구속될 것이고 하디 크루거는 앞으로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여태 그나마 가치 있었던 노동 역시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렸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은 살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물을 향해 찾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놈들 술 처먹었냐’고 한다. 알드리치가 생각하는 갱생을 해봤자 술주정뱅이로 살거나 요행히도 육백 미터 가서 살고, 그러고 나서도 물 먹는 것 말고 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감동적이기도 하고.


김성욱: 그 부분을 보고 유희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탈출 후를 과장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들이 큰일이지만 하나의 장난을 치렀던 정도의 수준으로 담백하게 뽑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존자들이 특이한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새로운 것 창조해낼 수 잇는 사람이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과거의 전투 조종사인데 리처드 아덴보로는 이 둘을 엄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또 다른 한 명, 회계사는 신실한 종교심이 있는데 자비심이 없다. 두 명의 건달 같은 노동자들은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대위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탈영병에 가까운 중사가 살아남는다. 거기에다 조그만 하천 같은 것에도 기뻐하는 그 정도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알드리치식의 미국의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오승욱: 이후의 영화 <더티 더즌(1967)>을 봐도 정상인이 하나도 없다. 미국이라는 가치가 진짜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프런티어 정신, 청교도 정신, 남자의 명예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이 대위가 죽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에선 그들의 죽음에 값진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다리를 절어 쓸데없기 때문에 놔둔 낙타만 있고 그것을 향해 제임스 스튜어트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무덤에 묻어주지도 않고. 어네스트 보그나인도 막노동으로 쓰이지만 쓸모없어지자 버려진다. 왜 버려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버려지고, 이 사회에 대해서 뭔가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고장 나서 버려진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남자로 산 것에 프라이드를 가지는 것이 별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남성의 명예, 프라이드, 관계 돈독하기 위해 농담 던지고 받아주고 서로 웃고 떠드는 것은 사막의 일이 벌어지고 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가치를 다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들의 영화는 많지 않다. 몰락해가는 남성의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소니 만도 보여주고는 있지만 남성들을 아예 집단으로 절망하게 만들고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최용혁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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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드리치는 반골기질로 똘똘 뭉친 할리우드의 이단아였다. 무엇보다 착상하는 소재부터 남달랐고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캐릭터들은 마치 감독의 디렉팅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늘 흥행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영화에는 불균질한 요소들이 넘쳐났다. 2차 대전 중 무능한 상관을 사살하면서까지 미군 내부의 항명을 다뤘던 <어택!>(1956), 역시 2차 대전 중 12명의 서로 다른 죄수가 독일군 기지를 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더티 더즌>(1967), 일련의 집단이 핵미사일 기지를 점령하고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저질렀던 비리와 잘못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위기의 백악관>(1977) 등 그는 철저히 스튜디오에 종속된 상업영화 감독이었음에도 자기만의 확고하고 독특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택!>처럼 비판적 묘사로 인해 상영이 금지되는 일도 있었고 악당을 공공연히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경우도 흔했다. <북극의 제왕>에도 개 짖는 소리로 경찰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1970년대 알드리치의 후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극의 제왕> 역시 마찬가지다. 19번 열차에는 샤크(어네스트 보그나인)라는 악명 높은 차장이 상주하며 무임승차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잔인하게 처리한다. 망치는 물론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잔인하게 죽이기까지 한다. 한편, A 넘버원(리 마빈)이라 불리는 한 부랑자는 무임승차에 관한 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샤크에 의해 기차 칸에 갇혔다가 아예 불을 지르고 달아나버린다. 소식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결에 돈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자존심이 상한 샤크는 다시 증기기관차를 달려 A 넘버원과의 재대결을 준비한다. 그리고 얼떨결에 A 넘버원과 여정을 함께 하게 된 시가렛(키스 캐러딘)이 그 대결의 관찰자가 된다.

<더티 더즌>과 <위기의 백악관>은 물론 <울자나의 습격>(1972)이 미국의 서부 개척기를 배경으로 한 것처럼 <북극의 제왕> 역시 명쾌한 시대 배경으로부터 출발한다. 대공황이 휩쓴 1930년대 미국, 집과 직장을 잃고 떠돌던 부랑자들은 기차에 무임승차를 하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이러한 차장과 부랑자의 실제 대결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는 아니지만 알드리치의 관심사는 사실상 그를 통한 풍자다. 기차에 매달려야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려야 하는 차장의 모습은 얼핏 과장되고 농담처럼 느껴지지만 여느 알드리치의 영화가 그러하듯 세상에 대한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 냉소가 담겨있다. 그렇게 <북극의 제왕>은 서로 모순된 요소들이 끝없이 충돌하면서 묘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물론 열차의 좌우, 위아래,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펼쳐지는 하드보일드한 두 남자의 대결이라는 장르적 흥분도 빼어나다. 달리는 열차 위에서 그들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한데, 그 상황에서 뛰어다니며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에너지와 스턴트의 수준은 놀랍다. 게다가 열차 아래 몸을 의지해 이동하는 리 마빈을 처리하려고 기상천외한 도구를 사용하는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알드리치의 영화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 전개의 순간, 혹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일탈의 디테일이 등장한다. 영화 도입부부터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망치로 사람을 내려치고, 리 마빈이 닭으로 사람을 후려갈길 때 이미 영화의 야수적 성격은 규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쥐새끼처럼 들러붙는 부랑자들을 망치로 후려치는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모습, 그 어떤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열차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리 마빈의 모습은 그야말로 당시 할리우드 마초 스릴러 영화의 ‘진경’이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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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오승욱 감독이 추천한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

지난 15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는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언제나 영화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들려주는 오승욱 감독이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굉장한 영화를 한 편 보셨다. 이유도 맥락도 알 수 없이, 그저 무임승차하겠다는 사람과 그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이 벌이는 일종의 ‘다이 하드’이다. 이 영화는 역시 이런 분이 소개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오승욱 감독님을 모시겠다.

오승욱(영화감독):
사실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고, 중학생인가 고등학생 때 AFKN에서 하는 걸 봤었다. 기억나는 건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독수리 같은 부리부리한 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몽키 스패너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커다란 망치, 그리고 쇠몽둥이 같은 것을 기차 밑으로 보내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은 지금 봐도 정말 무섭다. 사실 한 4년 전부터 <북극의 제왕>을 보고 싶어서 친구들 영화제 때마다 틀어보려고 했는데, 저작권 문제 때문에 상영이 어려웠다. 올해는 이 영화 안하면 ‘친구들 영화제 안 한다’고 했다. (웃음) 그래서 그런지 운 좋게도 올해 수급이 되었고, 프린트 상태도 정말 좋다. 이 영화는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흠모하는 악역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 때 봤던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어네스트 보그나인과 <젊은 사자들>의 리 반 클리프를 어마어마한 악역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워하면서도 보그나인을 정말 좋아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도 무서웠고, <배드 데이 블랙 록>이라는 영화에서도 리 마빈과 조를 이루어서 뒤에서 스펜서 트레이시를 굉장히 괴롭힌다. 서있기만 해도 무서운 사람이다. <자니 기타>에서도 그렇다. 언제나 뒤에서 나와서 사람을 괴롭히는 역할이었던 것 같다. 1917년생인데 지금도 살아있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에도 잠깐 나왔다.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오늘 큰 화면으로 보면서 정말 감탄했다. 보그나인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배우 보는 맛이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도 처음에는 리 마빈이나 키스 캐러딘의 클로즈업이 없는데 보그나인에게 클로즈업을 준다. 전체적으로 감독보다 배우가 더 멋있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찍을 때 보그나인은 50대 후반, 리 마빈은 50대 초반 가량이었을 것이다. 보기에는 그리 빨라보이지도 않고, 상판을 깔아두기도 했지만 달리는 기차 위에서 뛰어다닌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보는 내내 ‘저 나이에 저렇게 뛰어다니다니, 미쳤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 사실 어느 영화든 영화에 따라 스태프들과 현장의 모든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광기가 넘쳐흐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광기가 넘쳐흐르게 되는 영화가 썩 많지 않은 것 같고, 그걸 담아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성욱:
9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하이컨셉 무비라는 일련의 영화들이 나오게 되는데, <북극의 제왕>은 그런 영화들의 전조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두 사람의 격돌만으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영화를 끌고 간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이 가진 긴장성과 느낌이 엄청나다.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적 유희성이 뛰어나다. 기차에 타려는 사람과 그를 떨어트리려는 자, 둘이 모두 그 공간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둘 중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는데, 거기에 따른 일종의 원칙을 갖고 있는 인물들의 격돌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오승욱:
그런 영화가 재미있는 것 같다. 왜 싸우는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싸우는 거다. 그런데 사실 이유는 있다. 나보다 더 센 놈이 있고 그것을 꺾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찍으면서나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굉장히 힘들다. 그런데 알드리치는 굉장히 잘 해낸 것 같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에게는 일종의 허세가 있다. 그것은 어떤 시대에서건 남자들이 버티는 힘 같은 것인 것 같다. 게다가 이 영화의 인물들은 50년 전에만 태어났다면 서부에서 총질하며 살았을 텐데 시대를 잘못타서 30년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사회가 되면서 결국 남성들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30년대는 그런 것의 징후들이 나타났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남자들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농장을 하고 있었는데 점점 부채가 늘어가더니 차압이 들어와 모든 것이 없어져버렸다’는 식이다. 그들은 결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보그나인 역시 자본주의 속에서 하나의 부품이며, 언제든 부랑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이렇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라는 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야성을 가진 남성들이 시스템에 똥칠하는 영화. 그리고 시스템에 소속되어 있지만 역시 야성을 가진 남자가 덤비는 부랑자들과 서로 똥칠하면서 대결하는 영화. 그런데 이런 대결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대결하는 두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를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준다. 동시에 잘 만든 대결영화에서는 둘은 맞으면서 서로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서로 싸우면서 존경하는구나, 하는 디테일들을 확실하게 심어준다. 그 덕분에 영화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영화를 보면서 70년대의 알드리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 이 사람이 60이 되면서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장르 영화들에서 보이는 정석들을 절대 거스르지 않게 된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도 이야기의 측면을 포함해서, 씬이나 시나리오 구조들 역시 절대 거스르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 흥행 잘되는 영화처럼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하면서 껄껄껄 웃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웃음) 좀 도가 지나치다. 할리우드 영화 같으면 라스트에서 시가렛과 에이 넘버 원의 우정을 집어넣어서 기분 좋게 끝냈을 텐데, 이 사람은 거기서 심술이 발동했는지 조금 더 가거나, 뒤틀어버린다. 분명 정석적인 영화인데 아이러니가 숨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굉장히 찝찝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굉장히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더티 더즌> 무렵부터 그런 것 같다. <울자나의 습격>, <허슬>, <롱기스트 야드> 모두 그렇다. 누가 말려주지 않으면 폭주기관차처럼 간다. 50년대 알드리치 영화는 씬의 지속 시간 등을 통해서 조금 더 가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막가는 것과 더 가는 것은 다르다. 이를테면 <키스 미 데들리> 같은 것은 막가는 영화다. (웃음) 그런데 70년대 영화들은 도를 넘어서서 조금 더 간다는 느낌이 있다. <캘리포니아 돌스>의 마지막 장면도 막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가는 것이다. 알드리치는 마지막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알드리치가 너무 건조하고 투박해서 조금 더 갈 때 감동을 일으키는 부분은 딱히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감동까지 준다. 50년대에는 영화가 여기에서 끝나겠지, 하면 거기에서 10분 15분 정도를 더 나아가는 시간과 이야기의 연장이 있었다. 그런데 70년대가 되면서 원숙해진 탓인지, 이제 그런 부분들을 연장시키기 보다는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감정이나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조금 더 진전시키고 확장시키는 것 같다. 알드리치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고 모범으로 삼고 싶은 감독인데, 이건 어마어마한 재주인 것 같고 이 사람 말고는 아무도 하지 못할 일인 것 같다.


김성욱: 그런데 마지막에 리 마빈이 기차에 우뚝 섰다 할지언정 사실 그건 무임승차한 것일 뿐인데,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물리적인 움직임과, 장비를 챙길 때의 진지함과, 조그만 것들을 들 때의 디테일 같은 것들,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들이 전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그런 느낌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쓰레기 더미들도 인상적인데, 마치 SF 영화 같다. 핵폭탄 투하 후에 남은 것은 기차 하나 밖에 없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꾸역꾸역 올라서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인데,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3년 무렵 또한 미국이 경제 위기에 처해있던 시기였다. 여러 가지 부분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관객 1: 신체적으로 굉장히 강한 자극을 주는 영화였던 것 같다. 초반에 보면 기차에서 싸우는 장면에서 안개가 굉장히 짙다. 다른 신들과 그 신의 느낌이 다른 것 같다. 그 부분의 느낌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오승욱: 1960년대 말부터 알드리치 영화가 굉장히 점액질이 된다. 점액질의 것들을 계속 등장시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돌스>에서도 마지막 경기는 진흙탕에서 엉망진창이 된 채로 벌어진다. 50년대까지 알드리치 영화에서는 감독의 의도가 보일 정도로 배우의 몸을 더럽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영화 자체도 점액질의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는 것 같다. 피나 땀 같은 것들을 굉장히 정성들여 묘사하는 감독들이 있다. 액션영화를 볼 때 이 감독은 점액질류고 이 감독은 아니다, 하는 식으로 구분해보시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웃음) 알드리치의 경우에는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이 부분이 변해간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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