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렘 클리모프의 <안녕>

영화가 시작되면, 시커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들이 하나 둘 드러나다가 이어 카메라가 수직으로 빠르게 상승하면서 반짝임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 어둠 속에 잠긴 강물에서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안개 속에서 다섯 명의 이방인들이 마쪼라섬으로 들어오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 빛은 마치 마쪼라섬의 영혼인 듯 느껴진다. 영화는 사라져버린 마쪼라섬의 영혼이 스러져가고 저항해 온 과정을 느리고 긴 장송곡처럼 그린다. 영화 <안녕>은 그렇게 사실적이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이미지들 하나하나가 풍부한 감성과 삶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 이미지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 마쪼라섬의 장엄하고 신비로운 자연풍광은 인간의 말이나 행동보다도 더 강렬하게 삶과 죽음에 대해 보여준다. 극한적이고 힘든 상황에서도 인간성의 고양을 끈질기게 추구하려는 인물들의 태도는 얼굴과 눈동자의 클로즈업을 통해 끊임없이 부각된다.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은 섬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아름다운 초록 풍경들과 그 풍경 속에 어우러진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마치 축제와도 같이 그린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다



브레즈네프 시대 때 대표적인 농촌문학가인 발렌찐 라스푸찐의 <마쪼라의 이별>(1976)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라리사 셰피트코 감독이 각본을 쓰고 기획했던 영화다. 그녀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자 남편인 엘렘 클리모프 감독이 이어받아 완성했다. 영화는 두 감독의 미학적 스타일이 녹아들어가 인간에 대한 물음을 보다 끈질기고 강력하게 제기한다. 1부에서 마을 사람들 일상의 모습과 생동적인 순간들을, 2부에서는 생동하는 삶이 결국 서서히 스러져가는 모습, 그리고 끝까지 섬에 남아 죽음을 맞이하려는 듯한 태도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가장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는 다르야의 섬과 삶에 대한 태도를 주목할 만하다. 마을의 흔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묘지를 청소하려고 파헤쳤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다르야가 섬의 수몰을 걱정할 때는 항상 묘지를 걱정하고 돌본다. 그녀는 삶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 섬의 역사를 기억하려 한다. 다르야는 묘지가 파헤쳐진 후에 숲을 돌아본다.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르야는 ‘대자연의 어머니’를 계속 중얼거리며 숲속을 걸어 다닌다. 그리고 숲과 땅, 샘과 풀을 만지면서 기도한다. 태양을 향해서는 낯선 자들을 쫓아달라고 기도한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대지와 가장 가까이 호흡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르야가 묘지를 옮겨가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TV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들인 파벨에게 이야기할 때 나오는 TV장면은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그 우주선에서 비춘 지구의 모습이다. 또한 손자에게 말할 때는 춤을 추며 노래하는 여자가수가 오랫동안 비춰진다.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마을 모습의 생경함만큼이나 지구 밖의 우주와 지구상의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한 마쪼라섬의 대지에 묻힌 영혼과의 거리가 느껴진다. 또한, 기술의 발전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다르야 노인의 삶이 대비된다. 이러한 거리감과 간극은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다르야는 섬이 수몰되기 전까지 결국 끝까지 섬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묘지를 찾아간다. 거기서 그녀는 부모님이나 신의 목소리가 빙의된 듯,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다. 기억 없는 사람에겐 인생이 없다.” 그리고 지켜보는 일꾼들을 향해 “너희들은 너무 많은 걸 원한다. 너의 길을 끝까지 가거라. 살게 될 것이다”라고.

섬이 사라짐에 대한 저항

영화에서 섬의 수몰을 둘러싸고 보여지는 것은 인물들 간의 갈등이 아니라 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저항들이다. 섬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대왕나무)의 끈질긴 저항이 우리를 압도한다. 섬을 상징하는 이 나무는 영화에서 끝까지 섬의 파괴에 대해 저항하며,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과 섬이 안개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며 영화가 끝나갈 때 파란 가지를 드러낸다. 한편, 작은 저항의 모습은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제스처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맨 처음에 마을을 떠나는 여인은 집에서 나오는 걸 주저하면서 기르던 고양이를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돌보던 소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이 떠나자 갑자기 집밖에 쌓아둔 장작이 떨어지며 사람들이 이를 쳐다본다. 또한 마을의 집이 불태워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마을을 떠나는 또 다른 마을 주민은 집을 불태우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는 결국 엉뚱하게 장화에 불이 붙어서 집을 불태우고는 절뚝거리며 한 개의 장화를 신은 채로 걸어 나간다. 페트르카는 마을의 주정뱅이로 사람들이 있는 곳엔 언제나 나타나서 아코디언을 켠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는 기이한 행동들을 하고, 그가 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쪼라의 사라짐에 대해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한다. 섬의 수몰을 둘러싼 두 인물의 대비되는 태도는 인생에 대한 서로 다른 두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마을의 수몰문제를 총 관리하고 있는 보론조프는 다르야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저항할 때마다 인간답게 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중간에 마을을 불태우는 일을 그만두려는 다르야의 아들 파벨에게도 인간의 특권을 믿으라고,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마쪼라섬이 수몰되어 수력발전소가 세워지고 있는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 믿는다. 섬이 사라진다는 것은 섬에서의 삶(과 그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섬에서의 삶의 기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마쪼라섬이 안개 속에서 드러난 이후에 가장 먼저 보여지는 이미지는 아름답고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차 주전자인 사모바 주전자다. 사모바 주전자는 마쪼라 섬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물건이다. 그들은 고단한 삶에서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삶의 애환과 기쁨을 함께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모바 주전자는 여러 차례 클로즈업된다. 집을 떠날 때 한 여인은 이 주전자를 소중히 챙겨서 가며, 집이 불태워졌을 때 또 다른 여인은 폐허더미 속에서 이 찌그러진 이 주전자만큼은 고이 챙겨 나온다. 영화초반의 이 장면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말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차 주전자와 찻잔, 식탁위의 물건들이 번갈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물들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동등하게 마쪼라섬의 삶의 기억에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소극적인 저항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을 구성했던 집안의 일부인 이런 가재도구들마저도 섬의 사라짐에 저항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
섬의 파괴와 대비

이러한 저항의 모습 외에 영화 속에서 가장 평화롭고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두 장면도 인상 깊다. 하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건초를 베는 농촌의 공동체 문화를 보여줄 때고, 다른 하나는 라디오 소리에 맞춰 온 마을 사람들이 흥겹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출 때다. 이 장면을 보면 과연 이 섬이 정말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고 흥겨운 일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이어지게 될 섬의 파괴와 대비되면서 슬프고 아픈 느낌을 더 강조하게 되는 듯하다. 수몰이 예정되어 있고, 이제 곧 떠나야 하지만, 건초작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온다. 이 섬의 가장 아름다운 초록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아리따운 여인의 구성지고 신비로운 노랫소리가 한 동안 울려 퍼진다. 특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영화에서 카메라의 역동성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장면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춤추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밀착하여 보여준다. 춤의 속도와 리듬이 점점 더 빨라짐에 따라 카메라도 동시에 더 빠르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이들과 함께 즐기고 호흡하면서 집단적 문화와 그 문화의 흥겨움을 더 잘 보여주는 듯하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은 바닷가로 뛰쳐 가서 수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페트르카의 집이 불타고 마을은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지면서 불꽃같던 축제도 이제 끝나게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을의 백발영감의 슬픈 눈길이 클로즈업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축제를 즐길 수 없고, 집은 불태워질 것이며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론조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수몰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통보한다. 소년을 제외한 아이들은 “마쪼라 잘있어”를 외치면서 떠난다. 작별 인사가 화면 가득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배는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신음 소리 같고 장송곡 같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섬과 섬에 남은 사람들의 끈질기고 조용한 저항이 보여진다. 사람들은 거의 다 마을을 떠나고 대부분의 집들은 불태워진다. 지게차와 사투를 벌이던 대왕나무는 급기야 밧줄을 끊어버리며, 지게차가 돌진해 와도 끄떡하지 않는다. 결국 다른 집들처럼 불에 태워지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벨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보론조프와 페트르카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을에서는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면서 삶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다르야는 “누가 말거는 느낌을 느낀 적이 있느냐”며 “바로 여기서 누가 물어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노인은 자신이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말에 다르야는 “지금 사는 사람은 자네가 아닐지도 몰라. 나도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들이 하는 말은 과연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삶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이제, 결국 마을을 떠나야 하는(혹은 남아서 죽게 되는) 다르야는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어 왔던 자신이 살던 집을 깨끗이 청소한다. 카메라는 다르야가 의식을 치루듯 집안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커튼을 달고 마지막에 꽃으로 장식하는 장면까지를 길고도 상세하게 보여준다. 청소하는 다르야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리고 물을 퍼다주고 나중에 꽃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 모두 죽음 직전의 이 성스럽고 신비로운 의식에 함께 참여한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햇살과 창문이 닫히면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실내공간은 이 의식의 그러한 느낌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특히, 마지막에 비쳐지는 식탁에 놓인 꽃병은 영화초반의 사모바 주전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다르야는 불태워지는 집을 슬프게 응시하고 혼자서 풀숲을 걸어간다. 마지막 남은 이 집이 불태워지는 것은 마을의 소멸이자 섬의 소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르야가 풀숲을 걸어갈 때 순간적으로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은 영화의 시작에서 어둠속에서 반짝이던 빛을 연상시킨다. 여기서부터 이미 마쪼라는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후에 전개되는 영화 속 장면들은 그야말로 죽음 이후의 마쪼라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수륙양용차의 기이한 등장은 마쪼라 섬이 유령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파벨과 일행이 타고 온 배가 안개로 인해 강에서 길을 잃는 것은 마쪼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조용하고 느리게 전개되던 영화는 마치 장송곡의 클라이막스인듯 수륙양용차의 경보음과 바지선의 경보음, 그리고 마쪼라를 찾으며 울부짖는 페트르카의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바지선에 걸린 기이한 잠수복은 유령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마쪼라섬을 수평으로 길게 보여준 후 안개 속에 떠 있는 듯한 대왕나무의 가지 끝을 비춘다. 자신이 살던 터가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결국 떠나지 않고 남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죽음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삶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고 강력하게 질문하는 듯하다. (김수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특별 섹션

예술을 통해 교감했던 아름다운 부부,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는 60년대 소비에트 영화계의 해빙기(1957~67년 사이를 말하며 소비에트 예술계에 자유가 꽃핀 시기)에 뉴웨이브를 주도하던 매우 주목받는 부부 영화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거장 감독인 알렉산더 도브첸코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라리사 셰피트코는 장편 데뷔작 <날개>(1966)로 단숨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풍경과 인간의 얼굴을 담아내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러나 4편의 장편영화만을 남긴 채, 그녀는 1979년에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 클리모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며, 러시아 영화계에 있어서도 더 없이 큰 손실이었다. 이후 엘렘 클리모프는 아내를 추모하는 단편 <라리사>(1980)를 만들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기획했던 영화를 이어받아 <안녕>(1983)을 완성한다. 그의 대표작 <컴 앤 씨>(1985)는 분명 아내의 영화 <고양>(1977)의 세계와 공유하는 지점, 그녀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사별 후에도 그들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모프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혼재되어 있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시적리얼리즘의 거장이라 불렸다. 1980년대 중반 클리모프는 67년 이후로 강한 검열로 억압받던 영화계의 개방을 주도했고, 그동안의 금지작들이 공개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황제에 대한 동정적 묘사 때문에 금지되었던 클리모프의 <아고니>(1981)도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뒤늦게 대중에게 공개된 사례다. 이 영화는 198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기억을 승화시키고 다시 날아오르는 그녀의 비행, <날개>


라리사 셰피트코의 <날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 여성(학교 교장)인 나쟈가 느끼는 삶의 무상감과 고독을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포커스 아웃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곧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면 그것이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숏은 사실은 여주인공 나쟈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외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부에 갇혀있듯이, 그녀의 삶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갇혀있는 것이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박물관 원장도, 딸과의 소통 불능도, 학교의 문제아 소년과의 충돌도 그녀의 삶에 커다란 파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녀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갑자기 확 비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시점으로 구성된 숏은 보도바닥을 비추다가 서서히 상승해 하늘로 향하고, 전쟁 당시 영웅적인 파일럿이었던 나쟈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챠와의 추억의 단편들을 담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녀의 모든 슬픔은 그 남자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움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프로펠러를 작동시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에의 기억과 그 사람을 상실했던 슬픔과 온전히 조우하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행. 분출하는 삶의 열망. 영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 열망을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 <고양>과 <컴 앤 씨>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과 엘렘 클리모프의 <컴 앤 씨>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러시아의 작은 마을의 저항군과 민중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극한의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는가, 어디까지 버티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해 사고한다.

<고양>의 세계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속의 저항군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신체로 다가오는 즉각적인 고통, 먹을 것이 없는 사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계는 또한 경계가 무화된 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특정 지역 벨로루시라는 장소는 하얀 눈과 함께 비워지고, ‘어떤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성찰로 확장된다. 또한 눈 덮인 대지는 무언가 영적인 것이 깃든,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일컬었던 말을 빌리자면, ‘백색의 형이상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형을 이룬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밀고자가 되는 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독협력자인 러시아 고문기술자.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여준다. 모든 감정은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이 처한 극한적 상황은 순교가 더 인간적인지 밀고가 더 인간적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얀 대지는 신음한다. 이 고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컴 앤 씨>는 <고양>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어받아, 거기에 역사적 리얼리티를 가미한다. 이 영화는 ‘비엘로 러시아’ 마을의 민간인 628명이 독일군에 의해 불에 타 죽은 실제 역사를 재현한다. 저항군에 가입하려다가 쫓겨난 어린 소년은 마을 주변을 떠돌며 이 모든 사건들을 본다. 카메라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들을 탐사하고 바라보는 증인의 눈처럼 움직여간다. 영화의 배경은 리얼리티에 입각해 있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인 기묘한 느낌이 배어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을 사람 전체를 밀폐된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동안 보여준다. 카메라는 창고 내부에서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창고를 둘러싸고 하나의 축제처럼 즐기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어쩌면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과 눈동자를 본다. 소년이 겪는 극도의 공포감과 충격은 얼굴의 손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 학살의 축제가 끝날 때쯤이면 소년의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어낼 수 없을 법한 극한의 고통의 흔적이 소년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 인간의 얼굴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정을 놀랍게 묘사하는 면에서 셰피트코의 <고양>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소년은 물가에 잠긴 히틀러의 포스터에 총을 쏘기 시작한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거꾸로 돌아가는 뉴스릴의 영상이 몽타주 된다. 마치 역사를 되돌리고 싶다는 듯이. 역행하던 독일의 역사는 종국에는 히틀러라고 생각되는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자 소년은 아이의 얼굴을 향해서는 더 이상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앞서 독일의 파시스트는 “아이들이 있으면 다시 되살아난다. 너희들은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고, 소년은 이 말을 들었다. 아이를 향해서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 소년의 내면이 선택한 최후의 인간성일까. 이는 소년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역사를 홀로 마주했던 순간이다. 소년은 군대의 행렬에 합류하면서 다시 집단의 일원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그 행렬에서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행렬을 비추고 멈춰 선다. 그렇게 그 고통의 기억을, 오욕의 역사를 떠나보낸다.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재현하는 <아고니>

엘렘 클리모프의 <아고니>는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면서 제정정치가 끝나는, 20세기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일촉즉발 위기의 임계점에 처한 러시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릴 필름을 활용하며,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자막을 통해 이름과 직책을 소개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매우 정밀하게 표현한다. 황실의 무너짐의 중심에는 로마노프 왕족의 최후의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유약함과 황실 깊숙이 침투해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남자 라스퓨틴의 광기가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각료들로부터 혁명의 경과에 대해 보고받던 황제가 현실에서 도피하듯 회의실을 벗어나 비밀 통로로 보이는 복도를 지나 황후의 내실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라스퓨틴은 종교적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고 황후는 그를 숭배하듯 떠받든다. 황제는 거기서도 도피하여 사진현상실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라스퓨틴은 성자이자 예언자로서의 모습, 광인으로서의 모습, 현명한 책략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성은 점점 그가 성인인가 광인인가에서,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사회가 벌이는 행동과 인간성의 문제로 옮겨간다.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은 도저히 매워질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클리모프는 이 거대한 틈새를 흑백의 기록용 뉴스릴 영상과 컬러로 재현된 영상(픽션)의 몽타주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의 비극적 역사(전쟁, 폭동, 기아로 비롯된 고통)가 기록된 영상과 황실 내부의 동화적 공간에서 라스퓨틴이 이상한 향락의 쇼들을 벌이는 장면이 충돌하면서, 러시아 황실이 왜 무너졌으며, 왜 무너져야만 했는지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라스퓨틴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포한 영적인 면모에 대한 흥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황실과 라스퓨틴이 무너져 내릴수록, 흑백으로 표현되는 초현실적인 재현된 이미지가 다수 등장하면서, 컬러와 흑백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기록된 영상과 재현된 영상이 혼재되면서,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의 틈새도 좁혀진다. 즉 황실이 무너지고, 나라는 민중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변혁을 표상하는 영화적인 방식의 하나의 훌륭한 사례로 남아있다. (박영석)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오는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을 연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65주년을 맞아 여는 이번 행사에는 미하일 칼라토초프 감독의 <학이 난다>(1957), 게오르기 추흐라이 감독의 <병사의 발라드>(1960) 등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러시아 영화계에 찾아온 일명 '해빙기'를 대표하는 전쟁 영화 10편을 상영한다. 해빙기 이후에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당시 스탈린 시대의 가혹한 사회, 정치적인 상황을 벗어나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문화 예술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번 상영작에는 특별 섹션으로 1960년대 후반에 뛰어난 미학과 독특한 시각으로 러시아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유명한 부부영화인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의 대표작 6편도 포함되어 눈길을 모은다. 그리고 회고전 기간에는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 '러시아 전쟁영화의 서정성'을 주제로 한 경상대 러시아학과 홍상우 교수의 특별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상영 스케줄과 강연 일정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

한편 1923년에 설립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필름은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거대하고 생산적인 스튜디오로 약 3천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중요한 영화기관으로 남아 있다. (신선자)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