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에른스트 루비치의 성공은 지속됐다. 도회풍의 세련된 코미디가 급격한 변화를 겪던 미국인, 미국 사회와 잘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자기 영화의 성향과 잘 어울리는 파라마운트사와 주로 관계를 유지했던 루비치는 1941년에 폭스 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발표한 <천국은 기다려준다>는 루비치의 유성영화 중 흥행에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헨리라는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상류층 뉴요커인 그는 죽은 뒤 지옥사자 앞에서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비치는 역사물을 다룰 때에도 시대와 무관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곤 했다. 사회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천국은 기다려준다>의 전작인 <죽느냐 사느냐>(1942)를 기억해보라). 그러한 점에서 <천국은 기다려준다>는 루비치 영화의 기념비에 해당한다. 영화는 19세기 말부터 이십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인물들의 삶은 역사와 무관하다(혹은 그렇게 보인다). 루비치는 당시 세계를 뒤흔든 전쟁과 공황의 흔적조차 깡그리 없애놓았다(인물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건 패션뿐이다). 아무리 한 개인의 기억을 반영했다 할지라도 바깥 세계와 단절돼 흘러가는 영화는 기이하다. 혹자는 루비치 영화의 이러한 경향을 ‘초월적인 성격’이라 일컫는다. 같은 해 나온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1943)과 비교해보면 루비치 영화의 색깔이 극명해진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남자의 회고담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의 출발점은 동일하지만, 인물과 전개 방향은 판이하다. 일종의 전기 영화이면서도 <천국은 기다려준다>는 장르의 룰을 뒤엎는다. 주인공은 딱히 주목할 인물이 아니며, 그의 삶 또한 교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시대를 대하는 흐릿한 시선은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년을 주기로 헨리의 생일마다 벌어지는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구성했는데, 헨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의 전후사정이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살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루비치는 70년에 걸쳐 인물을 배치했다 제거하기를 반복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영원한 사랑인 아내에 대해서도 유별난 결말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녀가 죽고 세월이 흐른 후, 영화는 자연스레 주인공의 원래 모습으로 옮아간다. 이렇게 어느 정도 무심한 태도는 루비치 영화의 도시적 우아함, 탈도덕성과 연결된다. 다소 뻔뻔한 루비치 영화의 인물들은 자기 길을 걸을 뿐 도덕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으니, 흡사 루비치는 영화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느냐고 따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 루비치는 ‘미국적인 것’에 양보하기를 거부하진 않았다. 이전 영화 같으면 바람둥이의 삶을 합리화했을 법한 헨리는 결혼과 가족에 충실한 삶에 자리를 내준다. 한때 바람둥이였던 남자는 결국 양처의 곁에 머물며, 저승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의 기억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는다. 헨리가 천국행을 부여받는 건, 저승사자가 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인정한 다음이다. 간통과 삼각관계의 제왕인 루비치에게 충실한 결혼생활의 영화라니 믿어지는가. 이전에도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감독 중 유일한 미국인으로 대우받았던 루비치는 <천국은 기다려준다>에서 드디어 완전한 미국인으로 변신한다. 정치사회적으로 미국과 유럽이 심각한 상태에 있을 즈음 루비치는 특유의 우아한 코미디에 어떤 변화를 추구해야 했을 것이고, 거꾸로 경박한 스크루볼 코미디에 몸을 던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국은 기다려준다>의 보수적인 성격은 그 결과다. 루비치의 영화가 히치콕의 영화보다 덜 알려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영화의 제목과 반대로 루비치가 더 오래 살도록 천국이 기다려주지 않은 탓이다. 천국마저 그의 이야기를 어서 빨리 들으며 웃고 싶었던 모양이다.

글/
이용철(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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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는 불가시의 영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작가 중 하나다. 빌리 와일더가 ‘루비치 터치’에 대해 설명하며 예로 들었던 <미소짓는 중위>(1931)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모든 상황을 시시콜콜 설명하는 대신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남겨 두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 불가시의 영역만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 놀라운 솜씨는 세련되고 우아한 루비치식 유머를 만들어나간다. 루비치 스스로가 “내가 살면서 만든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표현한 <모퉁이 가게>(1940)에서 또한 이러한 불가시성이 영화의 전체를 작동시켜나간다.

부다페스트의 작은 거리에 위치한 마더첵 상사는 그리 인기 있는 상점이 아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이 소담히 가게를 꾸려나가는 가운데, 크랄릭(제임스 스튜어트)은 사장인 마더첵(프랭크 모건)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사장과 크랄릭의 관계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때마침 들어온 노박(마가렛 설리번)이라는 새 직원은 크랄릭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크랄릭과 노박은 얼마 전부터 펜팔로 사랑을 키워오던 상대가 서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모퉁이 가게>에서 불가시성은 특정 장면이나 유머를 위해 사용되는 기술적 장치를 넘어서 플롯을 작동시키는 일관된 방식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불가시의 영역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극중 인물들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첵이 크랄릭과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역시 인물들 각자가 갖게 되는 서로에 대한 불가시성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그것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메인플롯에서 불가시성의 대상과 범위를 조율해나가는 루비치의 솜씨 또한 노련하다. 처음 노박이 마더첵 상사에 취직할 때까지는 관객조차도 그녀와 크랄릭의 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박과 크랄릭이 같은 시간에 잡힌 저녁 약속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가 주어지는 순간,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관객에게 노출된다.

루비치는 이때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유지하며 남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대신 크랄릭에게 노박이 그의 펜팔 상대임을 알려 준다. 이를 통해 인물들 간의 불가시의 영역이 불평등해지며,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한 사랑의 감정들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앙숙처럼 생각하던 직장 동료와 이상적인 여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크랄릭의 당황스러움, 그러나 점점 확신하게 되는 노박에 대한 사랑, 노박에게 선뜻 자신을 알릴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반면 이 상황을 까맣게 모르는 노박이 갖고 있는 펜팔 상대에 대한 기대와 애정, 동시에 영화의 후반에서 드러나는 크랄릭에 대한 끌림에서 복잡하게 교차되는 감정들 가운데 훨씬 더 깊고 애틋한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모든 오해와 불가시의 영역이 일순 명료해지고 잔뜩 엇갈린 채 미세하게 떨리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모퉁이 가게>의 라스트는 그 덕분에 가장 기적적이고 행복한 순간이 된다.(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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