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정성일의 선택,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시네토크

2월 11일 특별섹션으로 마련된 카르트 블랑슈: 시네필의 선택작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상영 후 정성일 평론가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상영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는 말을 건네며,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와 시네필의 강령을 전달했다. 그는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만 할 것이라며 행동이 결여된 채 극장에 앉아있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은, 시네마테크가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선배 시네필’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찾는다면 호의적인 비평보다 비판적인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비판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연극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여기서 질문. 영화가 연극을, 영화가 회화를, 혹은 영화가 문학과 음악을 끌어안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문제. 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는 즉시 매혹되었다. 굉장한 걸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트리의 영화 13편 정도를 보았는데 당시 영화를 함께 보았던 친구들은 아무도 나의 기트리에 대한 방어를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세대에서 누구와도 기트리에 관한 사랑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눌 친구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내 방식으로 글을 읽고 영화들을 찾았다. 여전히 기트리에 대한 책들은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연구서적도 찾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조차 그에 대한 연구서적 2권과 자서전 1권, 연대기 1권 정도가 전부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목록을 정하면서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어쩌면 이번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다른 영화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만큼은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유는 세대를 건너뛰어 나의 친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8년 동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사샤 기트리의 영화가 단 한 편도 상영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올해 사샤 기트리의 상영계획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서울아트시네마는 계속되어야한다. (웃음)

 

기트리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했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감독이지만 프랑스바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연극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영화를 연출했지만 동시에 연극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감독이다. 연극은 프랑스영화사에서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연극배우들 대부분이 영화로 흘러들어왔으며 기트리도 그런 맥락에 놓여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기트리는 장 르느와르의 위대함에 비견할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그는 마르셀 까르네나 쥘리앵 뒤비비에가 아니었다. 나는 기트리가 까르네나 뒤비비에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기트리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다. 기트리를 비평의 범주에 놓이게 한 것은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세 사람이 기트리를 옹호했다. 한 사람은 고다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알렝 레네, 또 하나는 크리스 마르케였다. <사기꾼의 이야기>의 첫 장면, 제작과 음악감독 등을 소개하는 장면은 고다르의 <경멸>의 첫 장면과 동일하다. <경멸>은 프리츠 랑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트리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기트리의 영화가 발견된 건 시네마테크의 공로다”

 

기트리는 1895년 2월 21일에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뱀파이어> 상영 때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트리는 태어나서 영화의 탄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맑스주의의 보급이 진행된 시기를 말하며 볼세비키들의 활동이 조직화로 이어지는 초입의 시대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온 후 1차,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색출, 나치 승복 등 격정의 시기 속에 힘겹게 러시아인으로서의 생을 보냈다. 기트리는 연극에 매우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을 했다. 기트리는 연극에서 즉흥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느슨하게 구성된 연기의 가능성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트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5년, 그는 연극을 했던 사람답지 않게 <우리 집의 그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했다.

20세기 초 드가나 로댕, 마네와 같은 예술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곧 영화에 관심을 잃고 연극에 전념했다. 그는 토키영화(유성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1957년까지 기트리는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이것은 미완성된 영화들 포함한 것이다). 영화계로 복귀한 기트리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부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필름 다르(예술영화를 낮춰 부르는)’라는 치욕을 받았다. 하지만 알랭 레네는 가장 강력하게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했다. 레네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자기 생애의 베스트 중 하나로 뽑았고,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트리의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두 작품 사이의 친척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국 시네마테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에 상업극장에서는 볼 방법이 없었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시네마테크의 도움 때문이었고 랑글루아의 프로그래밍 덕분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랑글루아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을 감독, 배우, 장르 중심으로 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학교가 아니고 박물관이 아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들을 섞어서 상영하며 관객들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사를 만들고 연관성을 찾아내고 영화들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랑글루아는 졸작을 함께 상영할 때에 진정한 시네마테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네는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순수영화와 싸워라.’ 시네필이나 비평가들 혹은 감독들 중에서 영화만으로 순수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레네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한 영화는 순수한 영화 밖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영화 이전에 존재했던 긴 예술의 행적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다. 기트리는 기꺼이 그 순수의 논리에 반하여 연극과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시면 즉각적으로 발견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보이스내레이션. 토키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과거로만 넘어가면 모든 장면들이 단 한 번의 대사도 없이 보이스오버내레이션으로 찍혀진다. 틀림없이 브레송은 이걸 보았을 것이다(맹세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시골사제의 일기>를 찍으며 사샤 기트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내레이션도 역시 기트리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 영화가 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크레타인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의 부분과 전체집합, 발화와 언술의 전체와 부분집합의 논제가 이뤄지는 거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궁극적으로 모우리가 보았던 모든 말들이 사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사기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기트리의 영화 중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영화는 그의 필모 중 마지막 세 편의 것이다. 물론 기트리의 영화들 중에 여러분을 질겁하게 할 만한 위인전 시리즈가 있다. (웃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선입관을 주고 싶지 않으니, 그때까지 시네마테크가 버텨준다면 기트리의 회고전을 보며 다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트리를 방어한 레네의 이야기를 더 붙이면, 레네의 열렬한 팬들이라면 레네의 영화가 1970년대 중반이후 갑자기 전환점을 맞은 것처럼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네는 그때부터 연극처럼 영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네의 영화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이 영화들은 기트리가 만들었던 연극과 영화 사이의 우정관계에서 시네마틱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며 가장 감동받았던 건 사기를 치는 장면들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 영화를 보며 깨달은 사실, 영화 속의 사기행각은 단 하나도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 모두 영화적인 방법으로만 성립되는 사기라는 것이다. 카메라, 편집, 보이스오버내레이션 등이 있을 때 만 성립되는 사기, 기트리는 메소드 속에서 사기의 메소드가 어떻게 시네마를 성립하는 것인가. 순간 모든 것이 부서져버린 거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네마’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견디어진 영화들이 두 번 보고 DVD를 구입해서보고 그것이 세계 명작인양 소유하고 하는 유혹을 건네주는 것이다.


 

관객1: 영화의 연극적인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 부탁드린다. 그리고 어제 <뱀파이어>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스턴트들이 굉장히 과감하게 짜여진 것 같았다. 무성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인가.

정성일: 연극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세트 디자인과 클로즈업 씬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세트라는 공간이 정해지면 그 공간을 스테이지화하는 것이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특징이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없는데 당대 비평가들은 이런 영화 속 동선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무성영화에서 가장 중요한건 스펙타클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관객들을 매혹시킬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이 멜로드라마다. 당시에는 카메라와 인물사이의 거리를 관습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액션들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팡토마>를 보시게 된다면 재밌는 부분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관객2: 시네마테크를 얼마 다니지 않았는데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나 고민해야 할 때가 많다. 항상 그냥 영화를 보러 오곤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이나 태도나 접근방식을 가지고 오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과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달라.

정성일: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오는 게 맞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네마테크는 게토가 되는 것이다. 행여 이곳에 온다고 해서 선민의식을 갖고 내 안목은 훌륭하다 생각하는 건 참 웃기다. 상영하는 영화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아서 여기에 오는 것 뿐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의 목표는 영화 상영에 있어야 하고, 지금의 이 좌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거잖나.

관객3: 정성일 평론가가 관객들과 스크린 사이에서 말을 할 때 나에게는 그게 하나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시네필의 형님으로서 한 마디 한다면.

정성일: 마음 같아서는 시네필 소림사를 하고 싶다. (웃음) 하지만 지켜지지 못한 것이 많다. 일례로 키노는 100호를 만들지 못하고 끝났는데 중요한 교훈을 줬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들도 많았으나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시네마테크가 있을 때 잘하셔야한다는 것이다. 그때 시네마테크가 있었어, 이건 다 헛소리다.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된다.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시네필이다. 답을 가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사실 그 분이 시네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답을 갖고 행동하는 것 두 가지가 지금의 시네필 강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월이 좋아 태평성대 보내며 영화를 보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만일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에게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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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사샤 기트리 영화의 핵심은 ‘역설’에 있다. 역설은 기트리의 영화, 기트리와 영화의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데 근사하게 쓰이는 말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1912년, 연극에 주력하던 이십대의 기트리는 감히 ‘영화는 정점을 지나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감독이 되어서도 그는 영화를 얕보는 태도와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기존의 영화 관습과 약호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기트리의 독창성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고, 혹자는 그를 ‘모던 시네마의 아버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한편, 그를 옹호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단조로운 희극, 삼각관계 실내극 정도로 취급받는 기트리의 영화는 사실 반코미디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영화 <꿈을 꿉시다>(1936)에 나오는 두 노파는 “관객은 결혼 장면만 나오면 행복해져서 ‘좋은 코미디’로 평가하지. 그건 비극의 시작인데 말이야”라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다. 우디 앨런 이전에 과연 이런 톤의 코미디를 거침없이 창조한 작가가 있었을까 싶다. 기트리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지막(이자 궁극의) 코미디언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의 에른스트 루비치’라 칭한 기트리의 전공은 우아하고 화려한 계층의 러브스토리이지만, 그의 영화는 가족 같은 전통적인 관계의 유지보다 분열에 더 흥미를 느끼곤 한다. 기트리의 영화를 대표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위의 특성들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는 오십대의 남자가 카페에 앉아 쓰는 회고록에 맞춰 진행된다. 부모의 가게에서 돈을 훔친 12살 소년은 벌로 식사를 굶는데, 하필 그날 저녁에 독버섯이 든 음식을 먹은 나머지 11명의 가족이 모조리 죽고 만다. 성실한 자들의 죽음과 도둑의 생존이 불러일으킨 기묘한 의문은 주인공의 삶을 방향 짓는다. 호텔에서 일하며 부유한 삶이 찾아오길 바라던 소년은 성장의 단계마다 비슷한 일을 거듭 겪는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 처벌받는 것과 반대로, 사기가 매번 좋은 결과를 낳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로 한다. 20년 동안 국적, 이름, 외모, 직업을 수없이 바꾸며 부를 거머쥔 그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와 재회한 뒤 기로에 선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건 물론, 내레이션과 모든 출연자의 목소리까지 혼자 연기한 기트리는 완전작가의 영역을 탐한다. 사진과 다큐멘터리를 삽입하고, 상반된 연기를 대비시키며, 낯선 편집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등 기트리 특유의 스타일들이 빛나지만, 기트리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하겠다. 죽음, 만남, 이별의 과정과 살아온 길을 서술하는 남자의 내레이션에는 일체의 감정이나 낭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한 발짝 떨어져 주인공을 바라보는 영화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성큼성큼 넘나드는 삶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부한다. 거기에다 카드 테이블에 앉아 속임수를 연기하는 기트리가 사기와 기만을 몸소 가르치는가 하면, 영화 또한 사기의 종말 다음에 교훈극을 따로 펼칠 마음이 없다. 기트리는 ‘사기와 기만’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짜 규칙이 아니냐고 말하고, 사기꾼들이 훨씬 잘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앞세우는 현대인은 독단적인 의견을 눈치 보지 않고 술술 늘어놓는 기트리의 자세가 위험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괴변과 야유가 많은 만큼 지혜로운 경구와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이 푸짐하다. 앞에선 예의 바른 척하다 뒷자리에선 본심을 털어놓는 인간보다 언제나 유쾌하고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간을 지지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자들에게 기트리의 영화는 경전에 다름 아니다. (이용철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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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시네필의 선택: 정성일 평론가의 추천의 변   

첫 번째 (상황). 2008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내건 슬로건은 ‘영년(zero year)’이었다. 그건 마치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제로라는 무효의 선언.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 로셀리니가 영화 제목에 쓴 말. 그런 다음 고다르가 받아서 21세기에 반복했던 제목. 하지만 내게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진공상태. 단지 길을 잃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는 텅 빈 상태였었고,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것처럼 영화를 보았다. 너무 많이 보아서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종종 중간부터 보기도 하였고, 때로는 보다가 지쳐서 자기도 하였다. 나는 2008년 친구영화제에 슬픈 마음을 안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수라(修羅)>를 백지수표에 썼다. 그때 내 상황은 비유 없이 아수라장이었다. 그 해 내내 준비했던 영화는 잘되지 않았다. 나는 할복자살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그 자리에 온 영화의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아니, 그건 그냥 할복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츠모토 토시오라는 칼. 단숨에 창자까지 꺼내 들 수 있게 잘 만들어진 섬뜩한 날. 먹물처럼 배어 나올 피. 유혈 낭자한 소개. 나는 친구들이 모인 파티를 피바다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는 않았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 중 몇몇은 재미있게 보았다. 심지어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맙소사!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청하는 감사의 악수보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 있을까.


두 번째 (행동). 그 이듬해 다행히도 나는 친구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를 찍었다. 그건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나를 오해한 것이다. 나를 붙잡은 질문. 대답을 구하려는 간절한 노력. 내게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질문에 대답하는 활동이다. 말하자면 사랑의 다른 길.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길. 생각이 미리 자리 잡기 전에 작업하면서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개념을 부수는 방법. 내가 책에서 읽은 의심스러운 구절들. 우리는 책에서 읽은 상투적인 구절들과 싸워야 한다.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개념이 담긴 영화 책이라는 유리병을 세상 속으로 집어던져서 깨버려야 한다. 어떻게?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가 배움을 향해서 간절하게 집어던지는 액션이다. 로셀리니는 세상 속에서만 영화는 배움을 청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고 싶었다. 차라리 내 존경을 실천하고 싶었다. <카페 느와르>는 나의 영화 액션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시간이 올 것이다. 미래의 관객이라는 기대의 지평.


세 번째 (선택). 나는 올해 열 편의 영화 제목을 썼다. 그중에서 세 편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 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삼각형이 될 것이다. 대신 열 편을 고르면서 세운 원칙과 세 편에 대한 짧은 추억을 말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하겠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소개하다니! 그런 건 그냥 교과서에 맡겨놓으면 된다. 여기는 교실이 아니다. 우리가 구출해야 할 영화. 영화를 착취하는 기계들. 교실. 멀티플렉스. 아마도 그런 곳에서는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별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건 바보짓이다. 나의 호소. 우리는 영화를 소개하면 안 된다. 그저 그걸 보아야 한다. 보고 또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사를 창조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앙리 랑글루아의 목록에서 배웠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시간표를 매일매일 짜면서 그걸 작가별, 혹은 주제별, 또는 장르별, 배우별, 시대별로 구분되지 않게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는 슈퍼마켓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발명품 영화. 20세기의 타임머신.
 

변주곡, 혹은 엘레지. 김성욱 씨로부터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2010년 친구의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는 그대로이다.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정을 나눌 장소는 위기에 빠졌고, 아직 대안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예술과 정치의 수상쩍은 구별을 항상 의심한다. 물론 시네마테크 친구들의 희생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영화를 보았다. 여기서 방점은 불행히도 ‘그 동안’이다. 하지만 이제 그 희생의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의 투쟁전선은 고작 해야 방안의 홈 씨어터인가?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한 당신의 저항은 불법다운로드인가? 우리가 믿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을 결정해야 할 시간. 우리는 예술과 짝을 이루는 정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폭격. 점령구역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수방관. 당신은 영화를 본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장소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형식이건)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은 다시 입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입장의 효과(와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유명한 1902년의 정식. “막대가 나쁜 방향으로 구부러졌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즉 곧게 펴기 위해서는, 우선 막대를 반대방향으로 구부려야만 하며 따라서 그것을 쥐고 튼튼하게 반대방향으로 잡아당겨야 한다.” 누가 결정을 내리는가? 결정의 내용을 아무리 따져보아야 거기에는 대답이 없다. 핵심은 결정을 바꾸는 것이다. 혹은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바꾸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곧게 펴기.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이제 흐릿해진 생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세 편의 영화. 먼저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물론 이 영화는 ‘흡혈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연쇄극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어떤 버전이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될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 아무 정보도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이번 영화제에서 진심으로 ‘공유’하고 싶다. 다소 무모한 말이긴 하지만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생애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물론 이 영화 제목은 내일 바꿀 수도 있다. 원래 ‘한 편의 영화’라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1993년 1월 마지막 토요일 클레르몽페랑의 파스칼대학 강당에서 밤 10시에 시작해서 밤새도록 상영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처음 보았다. 그 전에 나는 이 영화를 책의 제목에서만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해주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홀렸다. 아니, 그냥 넋을 잃었다는 말이 맞다. 최면상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이건 위대하다거나 혹은 걸작이라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다. 그냥 영화 자체를 본 것 같았다. ‘아! 이것이 영화구나.’ 라는 탄식. 물론 그런 다음에도 쉬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놓친 영화들을 찾아보았고, 새로운 영화들을 보았다. 많은 복원판을 보았다. 추천작들도 보았다. 하지만 어떤 영화도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뿐 내게 지금 이것은 영화, 라고 선언하지 못했다. 나에게 영화는 결국 <뱀파이어>이다.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거의 십 년이 지났을 때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뉴욕에서 보았다. 그때 결론을 내렸다. 나는 결국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평생의 연인이 릴리안 기쉬인 것처럼. 그때 이 결정에서 릴리안 기쉬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느냐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당신이 동의하건 말건 그건 내 관심이 아니다. 아마도 당신에게 영화라고 선언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놓고 경쟁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이 자리에서 내 사랑을 고백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고백을 통해서 당신에게 내가 친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사샤 기트리. 아직 단 한 번도 여기서 사샤 기트리의 회고전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거의 이야기도 되지 않는다. 언제나 르누아르. 언제나 브레송. 언제나 고다르. 나는 사샤 기트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친구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친구를 찾는 나의 애절한 호소이다. 우리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 나는 사샤 기트리가 장 르누아르나 브레송만큼은 아니지만 마르셀 카르네나 줄리앙 뒤비비에보다는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장 콕토보다 본질적으로 시적이다. 사샤 기트리가 없었다면 장 으스타슈가 가능했을까. 앙리 랑글루아는 훨씬 더 확신을 갖고 프로그램을 썼다. “사샤 기트리는 미조구치 겐지, 빈센트 미넬리, 더글라스 서크, 로베르토 로셀리니처럼 중요하다. 이 말은 이상하다. 그렇다. 사샤 기트리는 영화사에서 그렇게 이상한 자리에 있다.” 내가 사샤 기트리를 처음 본 곳은 프랑스 문화원이었다. 그때 나는 사샤 기트리의 중요함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세대를 건너뛰어 이제 다시 당신에게 동의를 구한다. 하지만 사샤 기트리의 영화를 한 편 보고 그를 잘 알게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내 꿈 중의 하나는 살아생전 사샤 기트리의 전작 회고전을 보는 것이다.


세 번째. 카르멜로 베네를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였다. 파솔리니는 경외감을 안고 베네를 ‘나의 위대한 동지’라고 불렀다. 그 다음은 고다르이다. 고다르는 베네의 영화를 본 다음 달려가서 로마에서 그의 연극 무대를 보았다. 질 들뢰즈는 카르멜로 베네에 관해서 한 권의 책을 헌사 했다. 하지만 시네필 들뢰즈가 카르멜로 베네를 말하면서 연극에 한정 지어 설명한 것은 좀 의외이다. 들뢰즈가 카르멜로 베네에게 바친 한 권의 책 『중첩』은 들뢰즈의 유일한 연극에 대한 책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다음 영화에 관한 두 번째 책 『영화 2; 이미지-시간’의 제 8장 ‘영화, 신체, 그리고 뇌, 사유』에서 짧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카르멜로 베네가 이미지-수정체를 건설한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다음 들뢰즈는 여기서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 알랭 레네,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그리고 미래의 민중영화를 이야기한다. 카르멜로 베네의 위치. 나는 좀 더 많은 카르멜로 베네의 영화를 보고 싶다.


인사. 그렇다. 우리는 영화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더 많은 영화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우리들의 두 번째 십 년. 우리들의 21세기의 두 번째 시작. (정성일_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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