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전쟁영화를 하나의 굳건한 장르로 규정하자면, 1970년대까지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세’였다. 그러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대전장>(1978), <3중대의 병사들>(1978)같은 베트남전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의 사소한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를 쓴 배리 랭포드는 <디어 헌터>가 “전쟁영화의 역사적 무게중심이 결정적으로 베트남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로 본다. 또한 미국영화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EMI가 당시 성공적인 출발을 하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배리 랭포드는 <디어 헌터>를 <지옥의 묵시록>(1979)과 함께 베트남전과 무관하게 ‘할리우드 르네상스 스타일의 실험’이 더해진 전쟁영화로 본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플래툰>(1986), <햄버거 힐>(1987), <7월4일생>(1989)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양상은 대부분 ‘액션오락영화’로 분류되던 2차 세계대전 영화들과 사뭇 달랐다. 배리 랭포드가 말하길 “전쟁의 격렬하고 지속적인 정치화와 더불어 현대 미국의 첫 패배 경험의 파장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디어 헌터>는 <모히칸족의 최후>를 쓴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사슴 사냥꾼 Deerslayer>으로부터 유래한 제목이다. 쿠퍼는 내티 범포라는 하층민 출신의 사냥꾼이 등장하는 5부작 소설을 통해 변경의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를 다채롭게 묘사, 탐색해왔는데 마이클 치미노는 그를 베트남전으로 치환하여 스러져가는 미국의 처참한 현실을 드러냈다. 영화가 시작하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클레어튼에 있는 제철소의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이후 베트남에서 겪게 되는 악몽과 연결되는 지옥으로의 입구다. 이곳에서 일하는 마이클(로버트 드니로)과 닉(크리스토퍼 워큰), 스티븐(존 세비지) 등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종종 산으로 사슴 사냥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가 베트남으로 파병된다. 하지만 그들은 베트콩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러시안 룰렛으로 대표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폐해져 간다. 그렇게 우정은 산산조각 나고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휴지조각이 된다. 그렇게 그 누구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 한다.


<디어 헌터>에 대해서는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를 통해 무려 30페이지 넘게 이 영화에 대해 할애한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의 분석이 압권이다. 그는 “사실주의적이라고 해서 많은 칭찬을 받았던 반면 한편으로는 반동적인 영화라고 가차 없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둘 중 어떤 반응도 정당하거나 유용한 것 같지는 않다”며 “정치학과 미학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베트콩의 러시안 룰렛 등 베트남전 묘사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형식적 측면에서는 이후 만들게 되는 <천국의 문>과 더불어 “미국영화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가장 멋진 형식의 혁신자”라고 추켜세운다.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가 함께 속해 있는 전통의 절정이자 그 전통에 대한 만가”라는 것. 그러면서 <디어 헌터>가 <수색자>(1956)와 <리오 브라보>(1959)와 맺고 있는 강한 대응관계에 대한 분석도 시도한다. 그가 보기에 <디어 헌터>는 “치미노의 이상주의가 만들어낸, 그러니까 현대문명이 폐기처분해버렸지만 여전히 숭고함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마이클)에 대한 탄식”이다. 물론 로빈 우드는 일방적 가치 찬양에 경도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영화에 대한 혼란을 긍정하면서 “<디어 헌터>의 위대함은 그러한 혼란의 풍부함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디어 헌터>는 과작(寡作)의 작가 마이클 치미노가 만들어낸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다.

글/주성철(씨네21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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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클럽] 존 포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지난 9월 19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인 ‘시네클럽’ 행사로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상영했다. 존 포드의 작품 세계와 웨스턴 장르의 창조, 변형, 발전을 주도한 그가 남긴 발자취를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된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시네클럽 상영작으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선택하게 된 건 추석을 맞이해서 고향이나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영화이고 잘 설명되어 있는 편이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볼 만한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수색자>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굉장히 비슷하면서도 반복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다. 또한 그 차이에는 수많은 변경들이 있다. 그런 점들을 간략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이 영화는 서부극으로 불리기엔 꽤나 심심한 영화이다. 일단 존 포드의 웨스턴 중에서 이렇게 말이 많은 영화는 드물다. 또한, 웨스턴의 주 무대인 공간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 등장하는 서부의 로케이션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실내극이라 불릴법하다. 그리고 남성적인 공간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된 공간은 부엌이다. 도박장이나 보안관 사무실, 바, 목장 같은 남성적 공간이 아닌 부엌이나 신문사 사무실이나 교실과 같은 공간들이 주로 등장하고, 이것은 웨스턴 영화에서는 보통 여성적 공간들이다. 바가 나오긴 하지만 그곳도 액션이 벌어지는 공간이 아닌 수다스러운 공간, 정치적 집회장이다. 유일하게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톰의 집만이 로케이션 촬영 된 예외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존 포드의 웨스턴으로서는 액션이 적고 말이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후반부쯤에서 존 웨인이 술에 취해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다. 집도 법도 없는 방랑자적 인물인 리버티 밸런스와는 달리 톰은 이미 집이 있고, 또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집을 불태워 버리는 장면의 느낌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었다. 왜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리는가.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 집은 자기가 살 집이 아니라 여자를 위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할리라는 여자가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아닌 랜섬에게로 떠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집이 필요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가 살 집 뿐만 아니라 자기 집까지 태워버리게 된다. 그 이후에 톰은 아무 곳에도 거주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집을 불태운다는 것은 <수색자>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훨씬 격렬한 감정의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기는 가장 큰 의문은 톰이 왜 집을 불태워버리는가 하는 지점이다. 그런 관점 안에서 이 영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기차의 도착과 랜섬은 거의 등치되어 표현된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의 도착이기도 한데, 그것이 조금 애매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를테면, 랜섬이 밤에 낡은 역마차를 타고 처음 서부에 도착할 때는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서부의 법과 충돌하게 되는 순간이다. 자기가 들고 온, 문자로 쓰여진 법전이 총과 채찍과 폭력으로 의해 진행되는 서부의 법과 혹독하게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법전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다. 리버티 밸런스는 영화 내내 문자에 대한 심각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의 행동의 상당수는 총질보다도 문자를 찢어버리는 일이다. 처음에는 법전을 찢어버리고, 다음에는 신문, 그리고 끝내는 신본 스타라는 신문사에 들어가서 모든 윤전기나, 조판기를 뒤집어엎고 신문으로 피바디의 얼굴을 덮어버리기까지 한다. 그것은 통설적으로 보자면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의 첫 부분에 랜섬에게 혹독한 서부의 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그가 벌이는 행위는 법전, 문자, 질서, 체계에 대한 공격이다.

흥미로운 것은, 랜섬이 쓰러져있을 때 그를 마을로 데려온 것이 톰이었다는 사실이다. 랜섬을 황야에 쓰러지게 한 인물이 리버티 밸런스라면, 방치된 그를 마을로 데려온 것이 톰이라는 점에서 톰과 리버티 밸런스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동시에 톰이 랜섬을 마을로 데려오는 과정 안에서 스스로 자기파괴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운명적 상황들이 있다. 톰이 랜섬을 맨 처음에 데려간 곳은 부엌이라는 공간이다. 그곳은 여자들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초반부 장면에서 특히 할리는 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에이프런을 한 남자가 나오는 것은 이 영화가 유일할 것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볼 수 있듯 존 포드의 영화에서는 에이프런이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모성적 소품이다. 제임스 스튜어트 자체가 웨스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가 에이프런을 두른 인물이라는 점이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다. 랜섬은 부엌이라는 여성적인 공간에서 친숙하게 에이프런을 두르고, 접시를 닦고, 웨이터 일을 하면서 지극히 여성화된 인물로 나타난다.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 보면 서부사나이의 여성화라고 볼 수 있다. 랜섬은 철저하게 여성화된 인물로 표현되어있고, 그것은 또한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기차의 도착, 문명화, 법과 관련된 부분들이 모두 여성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과 반대 위치에 있는 것이 무법적인 것, 혹은 바나 술집과 연결된 남성적 공간들이다. 그 두 가지가 충돌적인 방식으로 영화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의 설정은 일종의 삼각구도다. 할리라는 여자를 제외해놓고 보면, 랜섬과 톰과 리버티 밸런스라는 삼자의 관계가 이 마을 안에서 어떻게 벌어지는가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톰과 랜섬 간에는 빛과 어둠 같은, 일종의 그림자적인 관계의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그러나 유사성의 측면에서는 톰과 리버티 밸런스가 맺고 있는 관계가 더욱 강하다. 앞서 말했듯 조형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톰이 랜섬을 집에 데려가서 총질로 모욕을 주는 행위는 나중에 랜섬과 리버티가 벌이는 총격의 순간과도 굉장히 비슷하다. 랜섬이 진행하는 교육을 중단시키는 것 역시 리버티 밸런스와 톰이다. 결국 톰이라는 인물은 랜섬이 시도하고 있는 서부의 문명화와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부분은 리버티 밸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실상 리버티 밸런스가 서부에서 사라질 때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톰이라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톰과 <수색자>의 이단이라는 인물 간에는 유사관계가 있지만, 차이점 역시 갖고 있다. 그나마 수색자에서 이단이라는 인물은 마을에는 들어올 수 없지만 황야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톰은 황야로 떠날 수도 없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리버티 밸런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리버티 밸런스도 계약관계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관계에조차 소속되지 않은 황야의 인물로 설정된 것이 톰이고,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을의 변두리에 집을 짓고 할리를 맞아들여 아이를 낳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리를 데려올 수 없는 상태가 됨으로써 그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인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불태운다는 것은 마을의 외곽에서 서부의 사나이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며,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톰이 집을 불태우는 것과 리버티 밸런스를 죽이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 톰이 리버티 밸런스를 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리버티 밸런스만 없다면 영화에 후반에 그려지는 것과 같이 랜섬이 언설과 정치적 절차를 통해 충분히 대표자가 되어 법과 질서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톰의 존립 근거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인물이다. 그래서 리버티 밸런스를 죽인다는 것은 톰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톰은 첫 번째로 자기 집을 불태우고, 두 번째로 리버티 밸런스를 죽이고, 세 번째로 랜섬에게 리버티 밸런스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세 가지의 과정을 거치며 완벽하게 자기파괴적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수색자>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존 포드의 웨스턴은 여러 가지 형태의 국가 공동체의 건립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전체적으로 보면 법과 문명화와 교육을 통해 미국적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서부적 남성성이 철저하게 여성화 되는 것이다. 톰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적 공동체의 건립을 위해 총을 들었던 인물들이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톰이 영화의 후반에 드러내는 느낌은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느낌과 굉장히 비슷하다. 거기서 이스트우드는 총을 다시 들지만 쏘지는 않고 죽게 된다. 물론 이 영화에서 톰이 리버티 밸런스와 격돌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리버티를 죽임으로서 사실상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총과 폭력은 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었지만,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는 총을 들었던 사람들을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미국적 공동체가 진행될 수 없다는 맥락이다. 똑같은 관점에서 그것은 <미스틱 리버>와도 굉장히 비슷하다. 미국이라는 공동체가 성립되는 과정 안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폭력성이 있고,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으나 감춰지고 덮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덮어져야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편집장 피바디가 영화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집회가 열리는 바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피바디는 ‘자유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바에서 술을 마실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인 문제, 또 그것과 연결된 자유의 문제나 법과 질서 간에 이상한 충돌성을 보이고 있다. 리버티 밸런스와 피바디와 톰은 이 마을에서 가장 법과 질서를 무시하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톰은 동시에 제약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옛날의 방식대로 할리를 데려올 수도 없고, 이 마을을 끌어갈 수도 없다. 피바디라는 인물 역시 자유를 위해 글을 쓰고 활동하기는 하지만 제약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리버티 밸런스 역시 망나니처럼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제약되어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나 국가가 건립되는 과정, 그리고 법과 질서가 집행되는 과정은 개방되어있던 부분이 폐쇄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 밸런스의 이름 안에 리버티라는 단어가 들어있고 그를 죽인다는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법과 질서가 정립되며 자유를 죽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종합적인 측면들이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법과 질서, 충돌과 폭력 같은 문제들을 다룬 정치적인 우화 같기도 하다. 그런 정치적인 상황들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는 하나의 흥미로운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고향에 대한 이야기 혹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집을 잃어버린 사람과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리버티 밸런스라는 악당조차도 자족적일 수 없다. 무뢰한들의 세계가 끝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비극적이기도 하다. 무뢰한들의 세계가 사라지고, 동시에 영웅들의 세계마저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존 포드의 시선은 우울하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수색자>와 이 영화를 항상 함께 생각하게 되는데, 두 편의 영화에서 오는 슬픔이 약간 다른 것 같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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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평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존 포드 강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대미는 미국의 비평가인 크리스 후지와라가 장식했다. 지난 26일에 이어 27일 저녁에는 그의 두 번째 선택 작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 상영 후 후지와라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포드의 작품 중 가장 기이하다는 평가를 받은 <말 위의 두 사람>을 좋아한다는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은 <말 위의 두 사람> 팬들에게는 영화만큼 흥미로운 자리였으며, 존 포드 영화로는 이상하다고 여긴 관객들에게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과 존 포드란 인물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준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을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 씨께서 선택해주셨다. 이 영화는 몇 분의 열렬한 지지층이 있는 반면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심심한 영화 또는 <수색자>라는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상한 컬트영화에 속한다. 포드 영화 같지 않다는 평도 들은 바 있고 작품에 대한 애호가 유독 나뉘는 작품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선택하신 크리스 후지와라 씨를 모시고 존 포드와 <말 위의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美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좀 특이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포드 영화로는 마이너 영화로 간주되었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의 내용을 가지고 비슷하게 반복한 영화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영화라고도 하였고, 상반되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전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영화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과 개척사회, 백인들의 사회, 코만치 인디언들의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포드가 만든 이상적인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군대도 등장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의 많은 요소들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61년에 만들어졌는데 1956년에 만든 <수색자>와 굉장히 비슷하다. 두 영화 다 코만치 인디언들에 의해 잡혀간 백인 여성 또는 소녀들을 다시 찾아오려는 노력에 관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굉장히 다르다. <수색자>의 경우는 나탈리 우드가 열연했던 데비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굉장히 감동적으로 환영을 받게 돼서 나중에 적응을 하고 사회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엘레나는 거부당한다. 엘레나라는 캐릭터가 코만치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의해 정의 내려졌고 변절된 사람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수색자>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로 인디언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끝에서는 그마저도 ‘데비를 죽이지 않겠다’라며 인종차별주의자적인 생각을 초월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방금 본 영화에서 러닝울프라는 10대 소년은 사형을 당하는데, 이것이 마치 심판과 변호인이 있었다는 정의로운 재판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백인들 깊은 내면에 있는 폭력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의 타고난 폭력성이 발산된 장면에서 마치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가 된다. <수색자> 물론 무서운 영화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수색자>의 경우 최소한 같이 화합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반면에, 이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부 비평가들의 말처럼 포드의 이전 영화와 다른 더 어두워진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인종들이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포드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는 아니다. 거스리 맥케이브 역을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엘레나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끝 장면은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와 비슷하다. <역마차>는 이전에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가 버린 여자와 무법자 존 웨인이 마을을 떠나서 서부로 가는 모습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해진 마지막 대사가 있는데 ‘그래도 최소한 이 사람들은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를 받은 것이다’라는 말이다.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에서조차도 백인들이 서부에 와서 보여준 사회의 모습이 이미 부패된 사회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위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또 반복되는 요소가 있는데, 초반에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리를 난간에 올려서 꼬고 앉아 있는 거다. 이것은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로 나왔던 헨리 폰다의 모습과 비슷하다. 여기서 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64년에 만든 <샤이안>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가 했던 와이어트 어프 역을 맡은 바 있는데, 폰다와 굉장히 다른 것이, 폰다가 맡았던 와이어트 어프는 OK목장에 가서 적을 상대하고 서부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영웅이 되는 반면에, <샤이안>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는 행동을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냥 카드만 치고, 위기의 순간에는 떠나버려서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예전에 알려졌던 영웅이 아니고 이제는 안티-히어로 역할인 셈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그래서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뒤로 기대고 있는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되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맥케이브를 <황야의 결투>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와 비교해서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봐야 되는지, 포드가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지라는 의문이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영화 끝에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니라 좀 더 어리고 우스꽝스러운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로 나온 워드다. 워드가 이제 보안관이 된 상황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는데, 워드가 이 자세를 취한 것은 포드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에게 던진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포드가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포드는 이미지 그 자체로는 순수함이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언제든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보고 마음에 들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래서 행복하거나 만족한 상황에 머물길 원하는데, 포드는 이것을 거부하고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그런 것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꼭 필요한 이유는 다른 단계, 차원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손짓이나 몸짓, 행동, 언어, 언어의 실패 또는 문제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보면 내러티브 측면에서 몸짓이나 손짓, 행동 또는 언어에 있어서의 자유가 나타난다. 포드는 이전부터 추구하던 것들로 그의 초기 무성영화들에서도 특정 제스처가 나오는데 이 제스처들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반복 되서 나타난다. 마치 의식과도 같아 보인다. 갈수록 그의 영화에서 이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말 위에 두 사람>에서는 마치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과 캐릭터들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포드답고 순수한 영화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리처드 위드마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타사코사 마을을 떠나기 전 강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3분정도 컷 없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이 장면을 거론한다. 여기서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중요한 것은 위드마크가 스튜어트에게 결국은 왜 가기로 결정하기로 했냐는 질문이다. 스튜어트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장면 길이의 3분이 거의 다 지나서야 대답을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 방식이 굉장히 포드다운 방식이다. 직설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끊기고 끊기면서 대화가 진행된다. 결국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간에 끊기게 하는 것들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시가를 피운다든가 벨이 다리에 차고 다니는 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등 손짓, 몸동작, 겉으로 보기에는 즉흥적인 행동에 의해 계속 대화는 끊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대화 내용의 앞에 나서게 되면서, 스튜어트의 대답은 뒤로 밀려 끝에 나오게 된다. 이 장면이 대단한 것이 두 배우간의 리듬감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재즈 대가들이 같이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즈 뮤지션들처럼 각자의 스타일로 연주를 하면서도 화합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위드마크의 경우 굉장히 단절되어 짧게 말을 하고 스튜어트는 광범위하게 편하게 얘기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느낌을 주는데 그 둘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제목과 관련된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위드마크의 ‘왜 가기로 했냐’는 질문을 바꿔서 얘기하자면 ‘왜 우리 두 사람이 타고 가야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보면 말을 타고 어디로 간다는 것보다 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여정이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를 가진 서부영화들, 특히 포드가 만든 영화들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중요시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상징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나 <말 위의 두 사람>에서 여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풍경에 대한 강조도 없으면 오히려 영화 안에서 여정은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말을 타고 어디 간다는 것보다는 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리차드 위드마크를 커플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둘이 친구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서로 이미 알고 있던 사이고 어느 정도 서로 애착도 있는 사이로 나타나지만 둘에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변해서 우정이 계속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편에서 스튜어트가 겉치레식으로 경례를 하니까 위드마크가 그만하라고 하면서 우린 너무 오랫동안 친구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아니 도대체 우리가 친구라는 생각을 했냐고 반박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구나, 원래는 친구였지만 일어난 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 무도회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둘이 다시 친구가 되는데, 전에 싸웠던 것을 대화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것이 포드다운 방식이다. 문제가 있었을 때 얘기하거나 해결하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같기 때문에 다시 합칠 수밖에 없다. 둘의 우정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전에 강가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강은 둘의 우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포드가 갖고 있는 우정의 개념은 하워드 혹스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다르다. 혹스 같은 경우는 두 남자 사이의 우정에 관해서 직설적인 발언을 꼭 하게 된다. 그런 발언이 없을 경우에는 <스카페이스>처럼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이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반면에 포드는 우정이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둘이 스크린에 모습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우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어떤 대화나 의식이 전혀 없다. 그의 후기작인 <독수리의 날개>에서 존 웨인과 댄 데일리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우정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둘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친밀감은 직설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둘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만 묘사된다.

 

이제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많고 사랑받는 배우였다. 그렇지만 포드처럼 그의 연기를 지휘한 감독은 없었다. 그가 평상시에 말을 더듬고 주저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을 극에 달하게 해서 일종의 비주얼 패턴처럼 보이도록 한다. 포드는 그의 말에서 보이는 언어의 매너리즘 조차도 제스처로 보이게 한다. 언어도 제스처처럼 개인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부영화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이 냉소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오히려 저는 심오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포드가 이전의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의 발달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 영화가 실제 만들어진 60년대 초, 그 때 당시 미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그리고 사람들 간의 분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사실주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마을로 돌아온 다음에 존 맥킨타이어가 분한 프레이저가 말하기를 ‘내가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자네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라고 했다. 이 말은 ‘신만이 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대사를 듣고 떠오른 것이 <아파치 요새>에서 헨리 폰다가 말하길 ‘군대를 지휘하려면 제대로 지휘를 해라’라는 말인데, 말하자면 ‘신이 되려면, 신이 되어라’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중심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인 존 포드가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존 포드인 나도 신의 역할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거와 같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 초반 맥케이브가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맥케이브를 포드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포드는 30년 대부터 시력이 굉장히 나빴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60년대 가서는 거의 장님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못 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봤다고 얘기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장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봤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했다. 초반부 장면에 마을을 차지하러 온 두 도박사는 맥케이브를 무시하면서 ‘눈이 있지 않냐’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장님이냐 이 병신아’라는 심한 말을 하는거다. 맥케이브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다 알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맥케이브가 하는 행동은 마치 감독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맥케이브도 감독처럼 미션을 가지고 떠나는데 이것은 위험도가 높고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측불허의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에게 제시하듯이 이 영화 속에서 맥케이브는 두 명의 포로를 데리고 온다. 영화 속의 맥켄들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이 부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거짓말을 통한 위안이라고.” 부인에게 주는 것이 영화가 주는 거짓말과 같다. 특히 서부영화에서는. 그래서 관객이 받는 것 또한 거짓말 속의 위안이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포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중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거짓으로 재현한 것으로 위안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존 포드는 말하자면 의식의 대가이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역시 또한 의식이어서다. 이 의식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영화에서 재현되어서 잊을 수 있게끔 해주는 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 때 포드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존 포드 강연을 들어줘서 감사하다. (정리: 신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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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존 포드는 양친에게 물려받은 아일랜드인의 뜨거운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비록 미국에서 출생하긴 했지만 존 포드는 대다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21년에 존 포드는 오매불망하던 고국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과의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탓에 아일랜드는 정치적 긴장상태로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예술가에서 그런 사회적 격변은 종종 긍정적인 창작의 열정을 부추기곤 한다. 존 포드는 이 여행에서 민감하게 느꼈던 것들을 나중에 작품을 통해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41)와 <조용한 사나이>(52), 그리고 <긴 잿빛 선>(55)과 같은 작품은 고국 아일랜드에 바치는 찬가로 그가 이 시기에 겪었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 전통과 현대의 충돌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가버린 과거에의 노스탤지어를 종종 말하곤 하는데 이런 특징의 상당부분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로서가 그가 느낀 소수자, 국외자의 정서에서 기인한 것이다. 종종 그의 영화에서 통렬한 순간은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기 위해 가족과 작별을 고할 때에 발생한다. 19세기 아일랜드의 웰스 지방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의 가족사를 필연적인 해체의 과정으로 그려낸 걸작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탄광에서 해직된 두 아들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장면은 지극히 담담하게 묘사된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석별의 정을 토로하는 대신 성경의 구절을 읽어주고 어머니는 흔들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이 떠나는 두 아들을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마을을 등지면서 석양에 구부정한 그림자를 남기면서 저 멀리 두 아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부 저편으로 사라지는 존 웨인의 모습보다 더 통렬한 순간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성장한 주인공 휴 모건(Huw Morgan)이 어릴 적 시장에 갈 때 어머니가 두르던 숄에 소지품을 챙겨 고향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든 집을 떠나면서 그는 이제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결심 하는데 카메라는 이 때 집의 내부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거쳐 탄광촌 마을의 한적한 거리를 비춘다. 이미 폐광이 되어버린 탓인지 휑뎅그렁한 거리에는 오직 늙은 여인만이 누군가를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화면위로 ‘현재의 기억은 사라지지만 오래 전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하다’라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이내 화면은 과거 풍요롭고 초록이 무성했던 대지로 전환한다. 흑백영화이기에 휴가 기억하는 초록으로 가득한 계곡은 지각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흐릿한 기억처럼 추억과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또한 아일랜드의 대지를 감싸는 환경, 분위기, 숨결과도 같은 것이다. 존 포드가 그려내는 아일랜드인의 기질은 그런 초록의 대지와 호흡하며 탄생한다. 남성다움의 본성, 즉 의리와 자부심 말이다. 이는 남성들의 다툼과 싸움에서 드라마틱하게 표현된다. 이를테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휴는 저급한 탄광촌에서 왔다는 이유로 급우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데, 그는 동네 아저씨에게 익힌 권투기술로 괴롭히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인다. 이 때 싸움은 서로 주먹을 공평하게 교환하는 게임과도 같은 것으로 아일랜드계의 남자다움과 우정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순간을 표지한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긴 행렬을 이루어 함께 노래를 부르며 퇴근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꽤나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들은 모두 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대지의 신과도 같은 어머니의 에이프런 속에 하루 벌어온 돈을 꼬박 집어넣는다. 근면하고 억척스런 어머니는 아버지만큼이나 자부심과 의지가 강한 존재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마을 청년들이 완고한 아버지가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다며 비난을 퍼붓자 이에 참을 수 없었던 휴의 어머니는 파업참가자들의 회합에 참석해 수많은 사내들을 향해 ‘누구든 남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소’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어머니의 분노와 의지의 표명이 휘몰아치는 겨울의 매서운 눈발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가족애와 우애, 그들의 근면한 삶도 한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세상사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는 경제적 곤란 때문에 집을 떠나고 누구는 결혼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갱도에서 삶을 마감한다. 사건의 관찰자이기도 한 어린 휴의 순수성은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 성원들의 멸시와 조롱, 형제와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며 변모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휴의 어깨에 기대어 아버지가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이것의 정점에 해당한다. 이 순간 휴는 망연자실한 듯이 빈 시선을 허공에 던지는데, 이 때 모진 현실은 저편의 기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마치 꿈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아버지와 푸르른 계곡을 함께 거닐던 행복했던 순간, 이혼 때문에 완고한 마을주민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한 누나의 귀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형들이 저 멀리서 돌아온다. 행복한 기억이지만 동시에 비애로 가득한 숭고한 장면이 아일랜드의 거대한 하늘 아래에서 벌어진다.

존 포드는 거대한 하늘을 밑그림처럼 활용해 거기에 대지와 공동체, 인간사의 이야기를 숨결처럼 화면에 불어넣었던 영화작가로 서부극은 그런 에센스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였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 만든 서부극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46)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서부극에서 자주 회자되는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린다. 닷지 시티에서 유명했던 보안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형제들과 소를 몰고 떠돌아다니는 와이어트 어프(헨리 폰다)는 막내 동생이 톰스톤에서 클랜튼 일가의 습격으로 살해당하면서 복수를 결심한다. 서부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이 있는, 어둠과 타락의 마을인 톰스턴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다시 보안관 배지를 달고 도박장을 운영하는 닥 할러데이(빅터 마튜)와 연대해 클랜튼 일가와 전투를 벌인다. 이런 복수를 둘러싼 이야기에 동부에서 톰스톤을 찾아온 아름다운 클레멘타인과의 미묘한 사랑이야기가 함께 한다. 

평자들은 존 포드의 서부극을 호메로스가 그리스의 신을 노래하는 것처럼 미국 개척기의 영웅들을 찬미하는 일종의 역사극으로 평가한다. 그의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들은 서부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이민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공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미국 남서부의 모뉴먼트 밸리가 그가 만든 서부극의 주된 장소다. 거대한 메사와 이를 감싸는 무한과 숭고의 감정을 불러오는 하늘이 있다. 그 아래에서 인간들은 공동체를 건설해 거주하고 경작하고 또 신을 향해 예배와 찬양을 벌인다.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와 클레멘타인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들은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이제 막 건설 중이라 기둥만 세워져있는 교회에서 마을 주민들이 환호 가운데 조금은 어색하지만 흥겹게 춤을 춘다.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집합적인 상상력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영웅적이고 국민적인 통합의 신화는 공동체 내부에 내재한 갈등의 해소룰 통해 표현된다. 톰스톤에 처음 도착한 와이어트 어프는 총질이 난무하고 인디언이 바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을 묵도하며 연신 ‘도대체 뭐 이런 마을이 다 있냐’며 사람들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동생의 죽음 때문에 다시 보안관직을 맡아 마을에 머무는 것은 클랜튼 일가와의 최종적인 결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존 포드는 공동체 내부에 스며든 어둡고 곤혹스런 문제들을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해결해가는 과정을 외부의 적과의 단선적인 대결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다. 여기서 영웅은 한 명이 아니라 이중화되어 있다. 그 하나가 전통적인 관습을 중시하는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라면 다른 한 명은 리버럴한 독 할러데이다. 이 둘은 마을의 질서와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인다. 이는 법보다 도덕이 앞서는 다툼으로 증오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정과 연대를 위한 통과의례이다. 동부에서 온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과의 사랑 또한 이중화되어 있는데, 시간의 서로 다른 두 방향과 연결된다. 그것은 과거(예전 독 할러데이는 동부에서 그녀를 사랑했지만 이미 그녀를 두고 떠났다)와 미래(톰스턴의 교사로 정착한 그녀는 어프의 미래의 여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로 열려있는 시간의 이미지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막내 동생의 무덤가에서 묘비에 적힌 연도표기를 보며  짤막하게 한탄한다. ‘그래 18년을 살았구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났구나. 너 같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마을이 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란다.’ 어프의 다짐은 순수성을 지켜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다시 무기를 손에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종종 이 장면의 비극적인 정서를 두고 2차 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상처가 영화에 기입된 것이라 말해진다. 클랜튼 일가와의 전쟁이 끝난 뒤, 질서가 회복됐을 때 와이어트 어프는 학교의 새 선생이 된 클레멘타인에게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약속하고 다시 서부로 말을 타고 떠난다. 순수성과 미래의 희망을 간직한 클레멘타인은 떠나는 그를 저 멀리까지 쳐다본다. 역시 행복과 비애가 가득한 숭고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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