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다른 엔딩


1942년, 찰리 채플린은 애초에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황금광 시대>에 자신의 내레이션과 그가 작곡한 음악을 삽입했다. 이 때 몇몇 장면들이 삭제되거나 수정되면서 재개봉 버전의 러닝타임은 오리지널보다 20여 분 짧아진 형태로 완성되었다.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영화의 엔딩이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1942년의 재개봉 버전의 엔딩은 다음과 같다. 떠돌이 찰리는 금광을 찾아내 백만장자가 되고, 그가 탄 배에서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와 우연히 재회한다. 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갑판의 계단을 오르고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엔딩이 숨겨져 있다. 1925년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른 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사진 기자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행복한 키스를 나누며 영화는 끝난다. 그로부터 17년 후, 재개봉을 위한 편집 과정에서 채플린은 이 장면을 삭제해 버린다. 대신 그는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함께 ‘해피엔딩’이라고 읊조리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본래의 엔딩에 비하면 재편집된 버전의 엔딩은 내러티브나 화면 구도에 있어서 조금은 어색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어째서 채플린은 이 마지막 키스 씬을 잘라낸 걸까?

찰리 이후의 채플린


그의 영화에서 희극과 비극은 늘 맞물려 있지만, <황금광 시대>에는 분명 어떤 낙관주의가 남아있다. 당시 채플린은 당대의 스타 배우들, 감독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영화사를 창립했는데, 이로써 그는 기존 스튜디오와의 착취적인 계약관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황금광 시대>는 그가 바로 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절에 감독과 주연을 겸하여 만든 첫 영화이다. 채플린은 종종 이 영화로 자신이 기억될 거라 말하곤 했다고 한다.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미국의 20년대, 채플린 역시 어떤 기대와 믿음, 낙관의 정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황금과 여인, 모두를 얻는 <황금광 시대>의 이야기는 그의 영화에서 유일한 키스 씬으로 행복하게 끝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영화들에서 ‘해피엔딩’은 점차 사라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결국 모두가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지거나(<서커스>(1928)), 시력을 되찾은 소녀의 앞에서 깨어진 꿈으로 남거나(<시티 라이트>(1931)), 애잔한 뒷모습으로 멀어져만 간다(<모던 타임즈>(1936)). 특히 떠돌이 찰리 캐릭터와 작별한 이후, 그의 영화는 더욱 어두워진다.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는 고통 받는 연인에게 목소리만이 간신히 가닿을 뿐이고, <살인광 시대>(1946)에서는 ‘살인이 사업의 연장’인 베르두 씨로 등장해 무심히 교수대에 오른다. 대공황, 산업화, 전쟁, 학살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의 영화는 점점 세상을 향해 비판과 근심, 냉소를 내비치고 있었다. <황금광 시대>가 처음 만들어진 1925년의 채플린과 재편집된 1942년의 채플린, 이 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간극의 흔적이 이 영화의 삭제된 엔딩에 남아있는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삭제된 장면 그 자체보다, 그러한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한 예술가의 ‘선택’이다. 당시 채플린은 이미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가 <황금광 시대>가 재개봉하던 1942년에도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대중 집회에서 연설하는 등 사회적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화사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을 창조해낸 그는 어느 순간 영화가 단지 대중의 꿈이 투사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고서, 이 통렬한 과정을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채플린의 후기 영화들은 보는 것은 작품들 하나하나가 지닌 흥미와 놀라움 뿐 아니라, 용기 있고, 열정적인 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를 예민하게 바라보는 방식과 만나는 것이며, ‘찰리’ 이후의 시기에 재편집된 버전의 <황금광 시대> 역시 미묘하게나마 그러한 과정 안에 있다.

by 장지혜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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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광대들>


<광대들>(1970)은 1970년에 제작된 TV용 영화로 광대와 서커스에 관한 매혹을 다룬다. 본래 60분 길이의 크리스마스 특집 프로그램이었던 <광대들>은 이탈리아 방송국 RAI의 동의를 얻어 방송 이튿날인 12월 26일에 연장된 버전으로 극장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광대정신에 대한 펠리니의 개인적인 에세이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활용해서 그의 공상과 실제 기억들을 직조한다. <광대들>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펠리니는 먼저 서커스단이 집 근처에 도착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회상하며 서커스의 신비한 매력과 광대들의 기이한 신체가 주는 두려움을 고백한다. 뒤이어 서커스 광대의 역사와 그들의 현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정한 펠리니가 소수의 스텝과 함께 위대한 광대들의 자취를 쫒는 여정이 이어진다. 서커스 연구자가 주선한 모임에 참석하지만 관계자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광대들의 공연을 기록한 8mm 필름이 프로젝터에서 녹아버리는 등 펠리니의 작업은 난항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펠리니는 광대와 서커스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무대에 올린 가짜 장례식이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축하 공연으로 바뀌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광대들>은 다큐멘터리의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면서도 전형적인 펠리니 영화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상태로 나타나는데, <광대들>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기형인간으로 가득한 거대한 쇼를 제공한다. 유리병에 든 샴쌍둥이의 태아, 살아있는 금붕어를 먹는 여자, 쇠꼬챙이에 구워지는 난쟁이, 거인 같은 육중한 여자 레슬러, 그리고 도끼와 망치로 서로를 반복해서 때리는 그로테스크한 광대들. 펠리니는 이들의 기괴한 신체와 괴상한 몸짓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사라진 순수한 시대의 상징으로 그들을 찬양한다.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Dario Fo)가 아이 같은 천진한 감성을 광대와 동일시했던 것처럼, 광대의 순수함에 매료당한 펠리니는 광대를 위한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냉소적이고 불순한 세계를 한탄한다. 물론 펠리니 특유의 과장되고 불경하며 저속한 유머를 사용해서 말이다.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풍자였던 펠리니의 광대들은 후기 영화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표상한다. <광대들> 역시 광대의 이미지를 통해 지나간 삶의 방식을 애도하고 있다. (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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