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멜로물이 지닌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만을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영화 같다”

- 김태용 감독이 말하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지난 1월 26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김태용 감독이 추천한 <세이사쿠의 아내> 상영 후 시네토크가 열렸다. 김태용 감독은 필름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보다는 영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재미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준 강렬함에 탄력을 받은 듯 영화와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김태용 감독이 친구들 영화제 때 처음으로 추천한 영화가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지난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이번에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추천하고, <만추>도 만들었는데,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념이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김태용(영화감독):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영웅 이야기를 보고 싶었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영웅 신화가 다 깨져가고, 멜로적인 감수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여전히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에게 ‘영웅’들이다. 멜로영화 안에서는 두 세계가 부딪친다. 사실은 살면서 약간 비겁하게 부딪칠 때가 많은데, 영웅들의 신화를 보다보면 얼마나 용기 있게 두 세계가 정면 돌파 하는가에 대해서 느끼지 않나. 그런데 사실 사랑은 두 세계가 맞부딪치는 그 용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두 세계를 하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다른 외부의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두 사람 자체도 부딪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외부의 힘 때문에 하나처럼 되는 느낌이 있어야 ‘우리’가 유지된다고 본다. 사랑은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유지가 안 되고, 다른 세계의 공격이 없어도 유지가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비극처럼,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액기스로 뽑아서 이 영화에서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얼마나 자기를 감정에 내던지고 우리 둘이 만들어낸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맞부딪칠 때도 얼마나 용기 있게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영화다. 그런 생각에서 이 아름다운 멜로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노출신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물리적인 특성이랄까, 정신적이거나 감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이 갖고 있는 물리성의 느낌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 인물에 대한 것과 사랑에 대한 감정을 물성으로 표현해내는 영화의 방식들이 와 닿았다.

김태용: 어떤 영화를 볼 때 첫 컷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이 여배우는 일단은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위태로움이 약함이 아니라 어떤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를 내던질 줄 아는 느낌도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여배우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구조적으로 영화에 접근했기 때문에 인물이 와 닿지는 않았는데, 다시 봤을 때 여배우의 힘이 많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가 에로틱하다고 하는데, 마스무라 야스조의 다른 영화들, <문신>이라던가 <붉은 천사> 등을 보면 훨씬 더 노출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도 이 영화가 가장 야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웃음)

 

 

김성욱: 이 영화에서 사람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갖는 사랑의 정념의 표현과 전쟁에서 죽은 자에 대한 칭송, 이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찌른 것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표현 자체가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결과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의미 없이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그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 오늘 다시 보니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면과 환영하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굉장히 길게 느껴지더라.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장면들과 남편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연결되고 대비되면서 (여배우의) 고립된 느낌이 많이 부각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김태용: 오늘 영화를 보면서 유난히 재미있게 봤던 지점들이 마을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무성영화 변사처럼 계속 설명을 해준다. 그 지점이 '눈'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라,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등의 대사에서 ‘시선’이라는 표현으로 타자라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다. 드라마 내적으로 본다면, 이 남자가 명예를 잃은 뒤에 여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굉장히 감정적인 비약이 있다. 이 감정적인 비약을 이야기적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지는데, 영화 안에서는 ‘눈’이라고 하는 매개 자체가 이 남자를 비약적으로 확 발전시키는 계기를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눈과 관계 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짐승>이 촉각적인 사랑과 정념, 욕망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욕망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편견과의 싸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욕망을 직접적으로 본다면 에로틱하지 않은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정서와 부딪칠 때 에로틱한 느낌이 더 드는 것 같다. 여배우가 더 많이 노출하고, 성적학대를 당해도 에로틱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자의 정서와 의지가 맞닿아서, 더 에로틱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1: 영화 속에서 세이사쿠는 전적인 피해자이다. 부인은 세이사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다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세이사쿠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도하고 백안시한다. 그런 소름끼치는 집단성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태용: 말씀하신 대로 (집단의) 잔혹함이라고 하는 게 영화의 기본 베이스인데, 세이사쿠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의지와 이성적인 결정에 대해 여자는 조롱을 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에 위협을 느끼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을 때 개인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들이 생기는데, 이 영화는 정확하게 그 폭력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하나의) 세상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 다루는 영화는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을 세상으로 보고 난 후에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폭력의 무자비함, 무지몽매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 앞에서 외롭게 서 있는 두 개인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폭력에 대해서 훨씬 윤리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2: 영화를 보는 도중 헤이스케(오카네의 사촌)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맨스 중간에 껴 있는 제 3자의 역할, 즉 관객의 눈이 되어주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 관객의 눈과 일치하는 변두리의 인물이 더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김태용: 굉장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그의 기능에 대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회적인 약자나 사랑을 지켜봐주는 친구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약속과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동체나 국가와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개인과 개인이 맺는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 내에서 밀도 높은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한 국가 혹은 어떤 가치에 이르려는 개인의 약속에 대해서는 조롱하지만, 각각의 개인들이 해왔던 약속에 대해서는 지켜야하는 주인공들 같은 느낌이다. 어떤 가치와 개인 간 약속과의 대립 혹은 차이. 어떤 인간이 더 솔직한가, 더 용감한가,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 이런 의문을 던져주게 했던 기능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관객3: 작년에 <부운>을 추천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계속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영화들을 추천하셨다. 감독님도 사랑을 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실 텐데, 이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개인적인 영감을 많이 얻으시는지.

김태용: 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좋아하는 건 어떤 장르영화든, 어떤 멜로영화를 통해서든 어릴 때 영화를 보고 나오면 달라진 나를 느끼는 게 좋았다. 왜소한 나에서 변화하는 느낌. 최초의 영화는 <킹콩>이었다. 홍콩 영화나 어떤 멜로 영화도 그렇고, <랜드 앤 프리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래,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해"라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 관객으로서 좋아했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멜로 영화들이 삶에 용기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다.

 

관객4: 이 영화가 멜로라고 하기에는 두 남녀 간의 감정이 비약적으로 넘어간 부분이 있고, 기대했던 감정적인 수위보다 묘사가 덜 된 것 같다. 또, 두 세계의 충돌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어떤 아름다운 충돌의 경험이 있으신지. 예를 들면 다른 직업이라던가, 다른 나라라던가. (웃음)

김태용: 멜로의 영역을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둘러싼 또다른 사람과 우리는 얼마나 닮아있는가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집중하는 게 멜로영화라고 크게 개념을 정한다면 이 영화만큼 그걸 정면 돌파하고 있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 가장 강한 멜로 영화이다. 멜로적인 로맨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면 아닐 수 있다. 두 세계의 충돌의 경험은 많이 가지고 있다. (웃음)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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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는 단순하게 말해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다. 아들(하나오카 세이슈)과 며느리(카에), 그리고 시어머니(오츠기)의 관계를 통해 그러한 삶을 보여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시네마스코프를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통해 세 사람의 관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적 심리를 묘사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개가 되는 만다라게꽃은 여성의 삶의 고통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는 오츠기에 대해 카에가 품었던 존경심이 애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나오카 세이슈가 외과수술에 필요한 마취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이 마취제의 실험대상이 되려고 경쟁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에서 아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삼각관계가 첨예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아내인 카에가 시어머니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츠기의 삶을 흠모하고 존경하여 그녀의 삶을 따라 배우려 했던 것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얻기 위해 남편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은 표면에 불과했다. 오츠기가 만다라꽃밭에서 물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와 같은 삶을 꿈꿨던 카에는 결국 눈이 먼 가운데 남편의 성공을 확인하고는 만다라꽃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자의 일생’은 만다라게꽃이 만발한 모습에서 시작해서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을 거쳐 다시 만다라꽃밭에서 마감된다.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마스무라 야스조는 그의 다른 영화에 달리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과감한 편집을 통해 속도감 있게 영화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내공간을 보여줄 때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화면과 같은 절제나 담담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와 카메라의 특이한 앵글의 결합으로 인해 공간은 미스테리하고 꽉 찬 밀실처럼 변모한다. 인물들의 감정은 다소 자제된 채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이 옥죄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간결한 디테일 속에서 인물들이 시네마스코프화면에 배치되는 방식 및 카메라의 독특한 시선과 위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도가 시간적인 느낌을 준다면, 카메라의 연출법은 시스템의 숨막히는 억압감을 강조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모른 채 이용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붉은 천사>에서와 비슷한 내적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꽉 찬 화면의 특이한 공간감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처럼 광각렌즈가 만들어내는 원근법적인 깊이감과도 다르다. 그 깊이감과 인물들의 특이한 배치는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폐쇄된 밀실에서 역적모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인물들의 역적모의를 숨어서 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들의 관계나 심리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편, 이 영화는 한 화면 내에서 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과 그것을 엿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카에의 집에서 조부와 장차 시아버지가 될 세이슈의 대화가 한 켠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것을 엿보는 카에의 모습이 그러하고,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 장면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여자들은 엿보면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거나 각자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만든다. 여기서의 엿봄은 연극에서의 ‘방백’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엿보고 있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녀들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켜보고 관찰하던 사람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오카의 제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속상해 하면서 오츠기가 울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화면의 중심에 주로 배치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모른 채한다. 지켜보고 관찰한 자들만이 결국 시스템의 비밀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엿보고 있는 그녀들은 시스템 속에 있는 또 다른 관객과 같은 위치다.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몇 마디의 말들을 내뱉는 순간들이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관객과 화면 속 인물에 동시에 향한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에서 교차되면서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며 밀실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관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만다라게꽃 역시 여성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만다라게꽃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의 고통을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장치다. 영화에서 여성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말에 의해 드러난다. 카에와 오츠기의 삶을 지켜봤던 시누이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 당대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고통을 감추고 경쟁하듯 하나오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들의 삶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며느리로도 시어머니로도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카에의 삶(과 시어머니의 삶)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의 삶은 만다라게꽃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꽃의 기능은 적절한 양으로 환부를 치유하는 데 있고, 그 꽃을 사용할 때는 정신을 잃게 되며 과다한 사용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결혼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러한 자신의 삶을 감지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만다라게는 집 밖의 약초밭에 활짝 피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또한 오츠기와 카에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다. 고통없이 수술하기 위해 쓰이는 만다라게꽃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마취제로 쓰여서 정신을 잃게 만들듯이 그녀들은 남자의 사랑과 성공의 매개물이 되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카에는 마취제의 과다사용으로 결국 눈이 멀게 된다. 만다라게꽃의 독이 그녀의 삶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애증의 감정으로 인해 시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카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눈이 멀고 나서야 그녀는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어머니를 닮은 아들을 낳는다. 영화에서 하나오카 세이슈는 화면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취약을 개발하고 실제로 성공했던 당대 시스템의 핵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주변적인 여성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그녀들의 삶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그녀들의 고통스런 삶은 당대의 사회구조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가운데, 다른 여성의 삶을 모방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마치 만다라게꽃처럼. 세 번 정도 등장하는 활짝 핀 만다라게의 아름다움과 그 만다라게가 집안의 성공을 위해 마취약이 되는 모습이 밀실같은 집안을 표현한 미장센과 대비된다. 마지막에 카에가 만다라게 꽃밭에서 죽는 장면은 오츠기의 삶을 반복한 후에 밀실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카에의 운명을 아프게 보여준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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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닌 2010.04.22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5.asp?lessonidx=off_snHong03 여기서 평론가 홍성남 선생님이 미조구치 겐지 강의를 하시네요

[현장중계] 홍성남 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 강연

지난 11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첫 프로그램으로 열리고 있는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작품 중 <붉은 천사> 상영 후 일본영화 전문가인 홍성남 영화평론가의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 뉴웨이브에 전조가 되었다고 뒤늦게 재평가된 마스무라 야스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강연 일부를 옮긴다.


홍성남(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한국에서 스크린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2005년이었고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눈 먼 짐승>이다. <눈 먼 짐승>이나 <붉은 천사> 등은 너무 센세이션해서 간혹 그의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색깔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칫 잘못 이해하면 어떤 엽기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닌가 착각할 수 도 있는데, 그 엽기적인 측면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야스조만의 상상이 담긴 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시스템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영화를 만들었다. 총 58편의 영화를 만든 야스조의 영화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미국에서 마스무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평론가 조너던 로젠봄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거인과 완구>, <검정 테스트카>, 반전영화는 <붉은 천사>와 <세이사쿠의 아내>, <야쿠자 군대>, 변태적인 섹스영화는 <만지>, <붉은 사랑>, <눈 먼 짐승> 등이고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내는 고백한다>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문신> 등이 있다고 분류했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예전에 마스무라를 높게 평가하며 ‘마스무라 야스조는 대표작이 없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비평가로도 활동한 야스조는 아키라의 이미지와 구도, 그리고 편집능력을 호평하며 아키라를 지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의 편집방식이 빠르고 리드미컬하지 않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야스조는 편집리듬이 강렬하고 빠르며 이것에 플러스해서 사회를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지성을 가진 감독을 원했고 당시 이런 마스무라의 이야기가 앞으로 그가 영화를 만들며 추구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탁월한 시각적 능력을 스크린에 구사할 줄 아는 감독이었고 냉철한 분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로 간 야스조는 그곳에서 유명한 영화학교를 다녔고 이탈리아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글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잡지 등에 일본영화에 대한 평도 썼는데 항상 마지막에 ‘왜 서구는 일본의 한 측면, 특히 정련되고 오밀조밀하고 서구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미학에만 열광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오즈의 영화에 반하는 것으로 굉장히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일본 다이에이사에 들어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처음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을 지냈는데 야스조의 영화는 어떤 면으로는 이찌가와 곤과 맞닿아있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 사회 상층에 있는 집단보다 아래, 주변인들에 대해 공감했다는 측면이 그렇다.


마스무라 감독은 시스템에 대한 반대, 특히 인간을 억누르고 질식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가 자주 보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붉은 천사>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듯 욕망이 이상 분출된다. 하지만 선정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것을 비판적시선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마스무라는 가지고 있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되 그것을 현실적 욕망, 일상에서 보는 욕망보다 과도하게 표출하고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미친 사람들’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마스무라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고 자체가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리얼 재팬’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강인하고 늠름하고 그 이전의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던, 예전에는 일본에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사라져버린 새로운 일본인상의 모색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론 마스무라는 일본 뉴웨이브 그룹에게 감화를 주고 호의를 받고 작업할 바탕을 마련해준 뉴웨이브 이전의 뉴웨이브-‘프리 뉴웨이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뉴웨이브와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었으며 모더니즘적 태도의 미세한 위치에 놓였던 감독이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분류들이 마스무라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주기 어려우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매혹을 주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는 역할을 했던 그는 계속해서 탐구할 가치를 생성시켜주는 자원이 풍부한 시네아스트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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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붉은 천사>

<붉은 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 중에 하나는 영화가 사진들(정지 화면)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상당한 군인들 혹은 널 부러진 시체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제공하고, 전쟁의 분위기는 총소리와 대포소리로 청각화 한다. 일종의 역사적 상흔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붉은 천사>가 전쟁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사건의 시작과 끝에 대해 파헤치기 보다는, 참전자들의 참혹한 모습, 즉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모순적인 거대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전쟁이 인간을 억압하는 지를 드러낸다.

또한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되어 한 인물의 주관적인 회상과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영화가 끝나고 나면 화자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회상의 영화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다 싶은 정도로 카메라와 인물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시점 숏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객관성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 가려진 여주인공의 심리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처럼 <붉은 천사>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 사이로 사쿠라라는 회상 주체의 내레이션이 개입하면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대변한다. 즉 일어나는 사건사고에는 객관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물의 감정적 상태가 부연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가령, 후반부에서 동료 간호사가 참호 바깥으로 나갔을 때 '이로써 나는 세 명을 죽였다'라는 말을 한다. 이 대사는 죽었던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간호사로서 사람들 살리긴 커녕 오히려 죽게 했다는 점에 대해 자책하는 사쿠라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사람을 살리는 직업으로서의 간호사와 의사, 사람을 죽이는 직업으로서의 군인이 대립하고 충돌하지만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서는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붉은 천사>는 (이미지로만 드러나는) 외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억압이 발생한다. 부상으로 인해 잘린 다리와 팔 등이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숏들도 있으며, 심지어 절단하는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정상적인 육체가 절단되고 잘려서 이 숏, 저 숏에서 던져진다. <붉은 천사>라는 제목과 다르게 붉은색의 피는 등장하지 않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비록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육체가 파편화되는 것도 있지만, 영화가 갖고 있는 프레임이라는 경계에서 인물들의 육체가 잘려나가는 상황도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내적으로 인물들은 심리적인 억압을 당한다. 예컨대 사쿠라와 와카베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만 꽃피울 수 있었지만, 결국 그 한계 속에서 죽음으로 좌절된다(이렇게 심리적인 억압은 육체적인 억압과 함께 얼개를 이룬다). 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클로즈업 장면에서, 그들을 둘러싼 침대 망이 마치 그들을 가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붉은 천사>는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고 좌절시키는지, 다시 말해 생에 대한 인간의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욕망과 그것을 좌절시키는 전쟁(과 그로 인한 질병)이라는 억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와카베가 죽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쟁터를 보여주는 엔딩 씬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것이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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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일의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3월 9일부터 24일까지 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일본의 위대한 영화감독 마스무라 야스조(1924~1986)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을 개최한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며, 일본 뉴웨이브의 전조로 평가받는 인물로, 인간의 마성을 극한까지 탐구한 위대한 시네아스트다. 그는 1959년 <입맞춤>으로 데뷔한 후 1982년까지 모두 57편의 작품을 남겼고, 전통적인 일본이 아닌 내면에 감춰진 일본성을 감각적이고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하고 사회 비판적린 내용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의 예술성은 오랜 세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 비로소 발견되어 재평가되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여성의 욕망을 충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표현해낸 <아내는 고백한다>(1961)에서부터 완벽한 예술에 대한 열망과 성적 욕구를 밀도 있게 보여주는 <눈먼 짐승>(1969), 여성의 동성애를 감독 특유의 독특한 시선으로 보여준 대표작 <만지>(1964), 그리고 <훔친 욕정>(1962), <문신>(1966), <세이사쿠의 아내>(1965) 등 60년대에 만든 대표작 10편이 상영된다.

한편 이번 회고전에서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와 미학’에 관한 두 차례의 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상영 및 강연일정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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