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은 계약결혼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남자 호빈(안성기)과, 그런 남자들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돈을 챙기는 닳고 닳은 여자 제인(장미희)의 욕망이 상호 배치되면서 만들어지는 권력게임의 과정을 좇아간다. 영화의 첫 시작에서부터 우리는 두 인물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에피소드들과 만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없이 비열하고 사악한 남자와 더없이 냉소적이고 차가운 여자의 쓸쓸하고 황량한 내면을 상대 캐릭터의 눈을 통해 엿보며 연민을 갖게 된다. 이후 제인은 호빈과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호빈이 욕망하는 미래는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함께 하는 미국시민으로서의 삶이다. 애초 돈과 시민권의 교환이라는, 상호 윈윈 게임에서 시작된 이들의 욕망은 공존할 수 없는 충돌로 나아가며 결국 거대한 파멸을 맞는다.


'미국 올 로케'로 이루어진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1983), 그리고 뒤에 만들어진 <젊은 남자>(1994)와 함께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영화들이 대체로 착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닌 인물들을 낙천적이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에서도 장미희가 연기했던 선영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순수한 면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깊고 푸른 밤>의 제인은, <적도의 꽃>의 선영이 살아 계속된 배신과 상처를 겪으며 인간과 사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채 냉소와 이해타산을 철갑처럼 몸에 두르게 된 인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깊고 푸른 밤>에서의 안성기의 모습은 이후 <젊은 남자>에서의 이한(이정재)을 예고한다.

무수한 감독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좌절을 대체로 누아르와 갱스터 장르를 통해 그려왔고, 특히 ‘그린카드’를 둘러싼 갈등들은 대체로 로맨틱코미디를 통해 순화해 표현해왔다. 그러나 배창호 감독이 선택한 장르는 치정극이다. 남녀 간 끈적한 욕망과 배신, 그리고 비루한 삶과 그로 인한 파멸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죽음’은, 한미 FTA 비준이 통과된 현재 또 다른 의미를 곰씹게 한다. 이 ‘치정’을 더없이 설득력 있게 받쳐주고 있는 것이 바로 안성기의 존재다. 차이나타운을 걷는 영화 속 안성기의 이미지는 <택시 드라이버>(1976)의 오리지널 포스터에서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젠틀하고 부드러우며 다소 수줍고, 언제나 타에 모범이 되는 안성기가 통상적인 이미지라면, 이 영화에서는 젊고 치명적이며 위험한 안성기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안성기는 놀랍도록 섹시하다.

(by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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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은 동명 소설 <깊고 푸른 밤>에서 뼈대를, <물 위의 사막>에서 내용을 빌려온 영화로 원작자인 소설가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에도 참여했다.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로스앤젤레스로 온 한국인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빈은 임신한 아내를 한국에서 데려오기 위하여 영주권을 얻으려 한다. 가장 빠른 방법이 바로 영주권자와의 계약 결혼이다. 제인과 호빈의 인연은 이렇게 성사 된다. 계약이 끝날 쯤 제인은 호빈의 다정한 모습에 사랑을 느끼지만, 호빈은 제인을 계약 관계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었을 뿐인 두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점점 스스로와 상대방까지도 파괴해간다.


<깊고 푸른 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와 그 안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여 이 영화는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개인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착과 안정을 쫓아 머나먼 이국땅까지 왔지만 광활한 대지에서 어느 곳도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깊고 푸른 밤>은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이 ‘집’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정 머물러 살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간 말이다. 그 ‘공간’은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대치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영주권은 표면적인 장치일 뿐,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없이 이방인이다. 영화는 사막에서 호기롭던 호빈으로 시작하여 그 끝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집을 떠난 그들은 가야할 방향을 잃었고 광활한 사막 위에서 영영 멈추어 버린다. “당신이 갖는 꿈은 이 사막과도 같은 거예요.” 라는 한마디가 영화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관통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올 로케이션 촬영을 했고, 동시대 영화들에 비하여 화려한 영상미를 뽐내고 있다. 더불어 1985년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을 휩쓸었다. 1980년대 서울 지역 극장 흥행 1위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과거 어떤 요소 때문에 사람들이 이 영화를 가장 좋아했는지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덧붙여 섹스어필을 한껏 하는 배우 안성기와 장미희의 젊은 날의 모습을 즐기는 것도 재미 요소 중 하나이다. (김휴리 | 에디터)

1.15(일) 18:30 상영 후 안성기, 배창호 시네토크
2.15(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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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작가를 만나다 -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

올해 첫 ‘작가를 만나다’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 가운데 좀 특별한 시간으로 마련되었다. 주로 고전영화를 틀고 즐기는 이곳에서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의 프리미어 상영이 있었던 것. 올해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열정적인 축사로 관객들을 감동에 빠지게 만들었던 배창호 감독이기에 이 시간은 더 각별했다. 배창호 감독은 “2008년에 특별전을 하면서 다음 작품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첫 시사를 했으면 했는데, 원한바대로 여기서 상영하게 되어 기쁘고 첫 데뷔처럼 가슴이 설렌다”며,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작고 소박한 이야기가 담긴 제주도로의 즐거운 여행을 같이 떠나자”고 말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펼쳐진 배창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 짧아 아쉬웠으나 진실한 감동으로 교감했던 그 만남의 순간들을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를 보면서 세 편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했다. 한편으로 보면 제주도가 삼다도라 돌, 여자, 바람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구성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면서 어떤 점에 착안하셨는지, 그리고 영화를 만든 배경도 간략히 밝혀주신다면.

배창호(영화감독): 우선 좋은 기획을 해준 오동진 대표, 회사 분들, 무엇보다도 내 짜증을 묵묵히 받아준 스텝들의 노고가 아주 컸다. 지난 3월에 영화사 대표로부터 한국의 자연이 소개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원래 나는 자연을 넣는 것을 좋아해서 흔쾌히 받아들였고, 두 사람의 상의 끝에 제주도로 의견이 모아졌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자연 중에서 가장 독특하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다. 곧 여행이라는 제목과 가장 보편성 있게 제주도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첨엔 세 편을 다 여행이야기로 구성할까도 했다. 세대를 달리하여 20대의 여행, 신혼부부의 여행, 중년여성의 여행으로. 그러나 1부를 찍고 나서, 세 편 다 여행이면 모두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2부는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부는 같이 각본을 썼던 제자들의 체험이 바탕이다. 제목처럼 큰 욕심 없이 산뜻한 제주도의 경관을 보면서 추억도 남기고, 티격태격 싸움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는 과정을 만들자는 거였다. 2부는 아침 촬영 전 산책을 하다가 한 해녀가 물질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여기 사람들을 찍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2부 여중생의 대사는 딸의 상상력을 통해 썼고, 3부는 나의 아내 김유미 씨랑 같이 썼다.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다!

김성욱: 시간이 짧게 준비돼 있으니, 곧바로 영화를 보신 관객 분들의 이야기와 질문을 받아보도록 하겠다.

관객1: 영화 너무 잘 봤다. 1부에 스쿠터 여인이 나온다.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여인이 나타나서, 그녀가 3부에서 김유미 씨가 연기한 여인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맥거핀 효과를 노린 것인가.

배창호: 맥거핀적인 효과를 주려고 한 것에 대해서라면 반은 맞다. 남녀 둘만 가면 밋밋한 구조니까 궁금증을 주려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가 있는 여자는 아니지만, 그런 여자의 삶을 우리가 가까이 들여다보면 3부의 여인 같은 삶처럼 될 것이다. 만약 프리프로덕션을 1년 정도 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했더라면 그렇게 출연이 겹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2부와 3부는 은희가 빵집에서 울고 있는 여중생을 만나는 장면을 통해 연결하려 했는데, 너무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될 것 같아 뺐다. 우리가 여행 중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느끼면 그러한 삶이 있고, 우리가 수수께끼로 여기는 여자의 삶도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쓴 거다.

 

관객2: 와 닿는 대사가 많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자는 디카를, 여자는 필카를 가지고 사진을 찍는데, 그렇게 나눈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여자가 디카, 남자가 필카의 감성이 더 잘 어울린다 생각 했는데. 그리고 한 가지 영화 속 인물들이 전부 전문 배우들 같지는 않은데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제주도 현지 사람 얘기라 제주도 출신 비전문 배우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떻게 캐스팅을 한 건지.

배창호: 디카와 필카의 문제는 많은 회의 끝에, 젊은 스텝들의 판단에 맡겼다. 심리구조의 깊이까진 생각 못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 연극배우는 있지만, 영화출연 경험자는 김유미 씨를 제외하곤 거의 전무하다. 나는 집중력과 편안함을 주면 모두 다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자기와 비슷한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체험밖에 없다. 2부의 해녀와 여중생의 경우 두 팀으로 나눠서 캐스팅을 했었다. 연기 경험자를 오디션해보니 감정이 깊고 좋았으나, 제주도 사람 같은 사실감의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비경험자의 진짜 제주도 느낌이 나오는 덜 가공된 느낌으로 가기로 한 거다. 캐스팅은 일종의 용병술로, 영화 영화마다 다르다.

 

삶의 한 때를 되돌아보는 정서적 느낌 주고파!

 

관객3: 2부에서 엄마가 수원에 있다가 제주도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하다.

배창호: 엄마 캐릭터는 내가 비금도라는 섬에서 민박을 했을 때, 실제 그 민박집의 집나간 며느리의 사연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와 접목한 것이다. 섬이란 곳은 외부인들에게는 들어와서 아늑한 곳이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지로 나가더라도, 귀소 본능이라는 것이 있고, 삶이라는 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여자의 삶을 그렸다.

 

관객4: 감독님을 다시 뵙게 될 날을 2년간 기다렸는데, 다시 이렇게 영화로 만나 뵙게 되어서 감동적이다. 김유미 씨는 너무 아름다웠다. 3부에서 김유미 씨가 ‘긴 머리 소녀’ 노래를 부를 때 타원형의 거울을 본다. 이때 그것이 거울이 아니라 사진을 포착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학창시절 사진으로 넘어간다. 앞선 에피소드에서도 사진이나 메모를 하는 것들이 중요한 매개체로서 서로 회복시키고, 관계를 개선시키고, 추억하는 역할로 나오던데, 그런 장면을 넣은 의도가 있으신지. 개인적으로 사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현재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반영하는 매개물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감독님이 오래오래 사셔서 오늘 이 영화처럼 우리를 항상 회복시키고 치유해주는 영화들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배창호: 고맙다. 나도 그 사진장면을 좋아한다. 영화에서 본질적으로 하려고 한 이야기를 잘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까 누구든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삶의 모든 것이 다 영화화 될 수 있다. 이번에는 사진 자체의 느낌들이 영화의 성격에 맞는다고 느껴서 의도적으로 넣었고, 3부의 여주인공 사진은 삶의 한 때 모습을 되돌아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삶을 드라마틱하게 인위적으로 구성하지 않더라도, 일상에 있는 것을 잘 선택하여 배열하면 우리에게 정서적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김성욱: 오늘 객석에는 여러 감독 분들이 관객으로 와 계신다. 봉준호 감독도 오셨는데 한마디 하신다면.

봉준호: 영화 너무 잘 봤다. 여중생 연기한 학생의 얼굴이 인상적이고 좋았다. 물론 학생이니까 비직업 배우겠지만, 학생 극단 같은 것도 아닌 평범한 여중생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배창호: 여중생 지은 양은 제주도 연기학원에 몇 년간 다닌 친구다. 연기 경험은 처음이었고, 극중 할머니는 모노드라마를 하는 민속극 배우셨다. 연출부에게서 지은 양이 두세 시까지 대본연습을 하고 잘 때도 시나리오를 배에다 올려두고 잤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정도로 열의가 있었던 것 같다.

 

허물을 벗고, 인물 그대로 소박하게 그리려 했다!


 

김성욱: 나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이름이 없다면 대사나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 학생이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거 같았다. 예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색다른 ‘젊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작업하신 소회를 말씀해 달라.

배창호: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나의 연출적인 면을 많이 뒤돌아 봤다. 연출자적인 것을 좀 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이런 소재를 만나서, 내가 보는 시선보다는 그냥 인물이 느끼는 대로 소박하고 겸손하게 가려고 했다. <황진이> 이후의 작업들이 사실 화려하고 멋있게 연출해보고 싶은 욕심을 버려오는 과정이었는데, 이번에는 허물을 벗듯이 확 벗어버리려 했다. 사실 내가 동시대의 영화, 동시대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열등감, 어둡고, 비겁한 면들을 냉소적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유행처럼 많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같이 일한 사람들을 통해 아직 우리 영화계가 건강한 구석이 남아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것이 남아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서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고집을 많이 버렸다. 많이 열어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들으니, 소박하고 보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나는 언젠가는 밋밋하지만 생수 같은 영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은 양념을 많이 치고 자극성이 강한 영화들이 많은데, 결국 탈이 나면 찾는 것은 물이고, 물맛은 밋밋하지 않은가. 이 영화가 제주도의 삼다수와 같은 영화가 되길 바랐고,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영화를 좋아하셨다면, 앞으로 이런 분들의 숫자가 더 많아져서, 자극적이지 않고 밋밋하지만 우리 몸에 좋고 시원한, 물리지 않는 생수 같은, 물 같은 깨끗한 영화가 더 나오기를 바란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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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언제나 육지에 사는 이들의 철저한 편견과 대상화의 공간이었다. 바다 너머에 있는, 말도 풍습도 다른 신비로운 곳, 제주. 그곳을 배경으로 한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에서 그려지는 제주 역시 그렇게 ‘여행지’로서의 공간이다. 하지만 <여행>이 단순히 육지인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서의 피상적인 제주를 그리거나, 그저 표피적인 낭만적 도피로서의 여행을 그리는 건 아니다. 옴니버스 구성을 취하고 있는 <여행>의 세 에피소드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한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은 마음의 풍경 뒤를 받쳐줄 뿐이다.

흔히 여행을 ‘너른 세상과의 대면’이라 한다. 뒤집어보면 그 말은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타자의 위치에 놓는 경험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친근하고 낯익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다른 맥락에 속한 자신의 위치를 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또 다른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는 것.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사람이란, 결국 타자로서의 자신을 보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배창호 감독의 <여행>이 보여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행>의 세 에피소드 모두 제주에서의 여행을 통해 새로이 발견하는 마음의 풍경을 그린다. 심지어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마저 그렇다. 다만 다른 두 개의 에피소드가 밖에서 제주로 들어온 이들의 여행을 다룬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제주 안에서 또 다른 제주를 여행하는 일종의 ‘내면의 여행’을 그린다.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당연히 에피소드마다 분위기도 다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서툴게 머뭇거리는 이십대 초반 청춘들의 이야기는 풋풋하고 싱그럽다. 십여 년 만에 엄마를 찾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는 좀 더 짠하지만 따뜻하다. 얼결에 가출했다가 작정하고 제주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주부의 작은 일탈(!) 이야기는 귀엽고도 유쾌하며 여유롭다. 이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삶에 대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와 따뜻한 시선이다. 세 에피소드들이 외부의 이 시선과 서로 맞물리면서, <여행>은 삶에 대한 찬가이자 제주 찬가가 된다. 제주가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어서? 글쎄, 오히려 어깨 위의 무거운 삶의 고난을 내려놓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그 고난을 기꺼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배창호 감독이 90년대 말부터 만들어온 ‘작은’ 영화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번뜩이고 깊이 있는 통찰 사이로 유머와 해학을 드러내면서 일종의 ‘구도’적인 특징들을 드러내왔다. <여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유쾌한 작은 섬 같은 작품이다. 인생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그 자체를 들여다보며 잠시 쉬어가는 듯, 말하자면 이 영화 자체가 ‘여행’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반응을 하게 될 듯하다. <여행>에서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장면들을 불현듯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짓게 되는 것 말이다. (김숙현: 프레시안무비 기자)


 >> 상영일정
1월 23일 토요일 6시 30분 <여행> 상영후 관객과의 대화
장소: 서울아트시네마(시네마테크 전용관)


 

배창호, 한국영화의 길을 묻다

[핫피플] 신작 <여행> 완성한 배창호 감독


1980년대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라 불리며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배창호 감독은, 전설의 명감독으로 잊혀지길 거부하며 끈질기게 지금껏 현장에 남아있는 몇안되는 인물에 속한다. 실제로 배창호급 감독은 현재 충무로에 남아있지 않다. 그의 위급으로 유일하게 임권택 감독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계가 자신에게 공룡 화석이 되라며 자꾸만 등을 떠밀어도 악착같이 원 안에 남아 영화를 만들어 왔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때껏 자신이 만들어 왔던 상업영화 방식을 버리고 새 길을 선택했다. 1998년부터 지금껏 그는 네편의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러브 스토리>와 <정> 그리고 <흑수선>과 <길> 등이 그것이다. <흑수선> 때 잠시 상업영화권으로 외도를 했다가 다시 독립영화의 길로 컴백한 배창호는 최근 또 다른 비상업, 저예산영화 한편을 완성했다. 새영화는 다소 고답적이고 옛스러워서 고색창연한 느낌이 드는데, 바로 <여행>이란 제목이기 때문이다. 총 150분짜리로 상업영화권이라면 깜짝 놀라게도 '단 돈' 1억6천만 원으로 찍었다. 기획은 아리랑TV와 제작사 디앤디미디어가 했다.

- 언제부턴가 당신은 고집스러운 저예산주의자로 읽힌다.
"그렇지 않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 자본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졌을 뿐이다. 큰 영화라면 <흑수선>이 있었지 않나. 물론 앞으로 상업영화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영화 풍토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돈,돈한다.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감독의 창작정신, 예술적 영혼을 자본에 종속시키게 만든다. 인간을 깊이있게 느낄 수 있는 정서와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는 환경이다. 그렇다면 독립영화 방식의 영화만들기가 지금의 내게는 맞다고 본다."
- 이번 영화는 어떤 작품인지 독자들을 위해 직접 설명해 달라.
"제주도에 대한 영화다. 제주도 홍보영화가 아니고 제주도가 배경인 영화. 원래 제작비는 문화관광부의 관광진흥기금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돈을 댄 사람(정부)은 공간에 대한 영화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영화의 목적성은 사실 그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작품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1억6천만원에 불과했지만 전혀 창작의 제한이나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냥 제주도를 로케 장소로만 사용해 달라고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제주도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었다. 공간은 뒤로 가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앞에 나왔다. 자본의 당초 목적이 무엇이었든 보통 우리가 해왔듯 극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근데 그게 오히려 더 좋았던 모양이다."
- 더 좋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
"<로마의 휴일>같은 영화를 생각해 보면 된다. 맞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 <로마의 휴일>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 속에서 로마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자신의 예술적 고향인 것처럼 생각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지로 로마를 꼽았을 것이다. 이번 영화 <여행>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 공간는 뒤로 가고 스토리가 앞으로 나왔다고 했는데 그 내용은?
"이 영화는 사실 3부 옴니버스다. 50분씩 세편. 1부는 젊은 연인이 제주를 여행하며 사랑의 교감을 하는 내용이고 2부는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심리를 담았다. 마지막 장은 홀로 제주를 찾은 중년 여인의 외출을 다뤘다."
- 사실 세편 모두 미리 봤다. 마지막 장에서 여주인공이 홀로 벤치에 앉아 읽는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싯구 중에,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정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시의 전문 가까이를 주인공의 독백으로 낭송하게 했다. 의외로 좋지 않던가.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돌이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우리는 서러워하지 않으며/뒤에 남아서 굳세리라 등등. 어때? 좋지 않은가?"
- 문어적인데도 좋다. 사람들은 종종 문어적으로, 문예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의 영화는 일깨워준다. 당신의 영화의 실체는 그래서, '퓨어리즘(Purism)'이다.
"(웃음)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돌이켜 보면 그런 게 좋은 것이다. 그런 게 오래 남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들고 오래 남는 영화를 봐야 한다."
- 그거 아시는가?
"뭘?"
- 이번 영화에서 매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이 모두 길로 끝난다.
"아 그랬던가? 몰랐는데 난?"
- 모른 척 하시는 걸로 믿겠다.
"(웃음)"
- 아직 배감독이 걸어야 할 영화의 길은 끝나지 않았는가?
"길은 끝나지 않는 법이다. 난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도 영화를 찍고 싶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 젊은 감독들, 젊은이들과 흉허물없이 지내시는게 보기 좋다는 사람이 많다.
"작가연, 거장인 양하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일 뿐이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젊은 사람들과 지내 보면 여러 아이디어가 솟아 나온다. 난 그걸 즐긴다."
- 다음 행보는 무엇이신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늘 열려있다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이 이런 영화를 할 수 있을까 혹은 저런 영화를 할 수 있을까,하는 식의 생각들을 갖지 않도록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코미디도 하고 싶다. 예전에 내가 출연했던 <개그맨>같은 영화. 요즘 세대들이 즐길 수 있는 코미디 한편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 인터뷰는 프레시안의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에서 부분 인용했습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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