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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제주도의 물 ‘삼다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1월 작가를 만나다 -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

올해 첫 ‘작가를 만나다’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 가운데 좀 특별한 시간으로 마련되었다. 주로 고전영화를 틀고 즐기는 이곳에서 배창호 감독의 신작 <여행>의 프리미어 상영이 있었던 것. 올해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열정적인 축사로 관객들을 감동에 빠지게 만들었던 배창호 감독이기에 이 시간은 더 각별했다. 배창호 감독은 “2008년에 특별전을 하면서 다음 작품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첫 시사를 했으면 했는데, 원한바대로 여기서 상영하게 되어 기쁘고 첫 데뷔처럼 가슴이 설렌다”며,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작고 소박한 이야기가 담긴 제주도로의 즐거운 여행을 같이 떠나자”고 말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펼쳐진 배창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 짧아 아쉬웠으나 진실한 감동으로 교감했던 그 만남의 순간들을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를 보면서 세 편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했다. 한편으로 보면 제주도가 삼다도라 돌, 여자, 바람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구성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면서 어떤 점에 착안하셨는지, 그리고 영화를 만든 배경도 간략히 밝혀주신다면.

배창호(영화감독): 우선 좋은 기획을 해준 오동진 대표, 회사 분들, 무엇보다도 내 짜증을 묵묵히 받아준 스텝들의 노고가 아주 컸다. 지난 3월에 영화사 대표로부터 한국의 자연이 소개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원래 나는 자연을 넣는 것을 좋아해서 흔쾌히 받아들였고, 두 사람의 상의 끝에 제주도로 의견이 모아졌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자연 중에서 가장 독특하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다. 곧 여행이라는 제목과 가장 보편성 있게 제주도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첨엔 세 편을 다 여행이야기로 구성할까도 했다. 세대를 달리하여 20대의 여행, 신혼부부의 여행, 중년여성의 여행으로. 그러나 1부를 찍고 나서, 세 편 다 여행이면 모두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2부는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부는 같이 각본을 썼던 제자들의 체험이 바탕이다. 제목처럼 큰 욕심 없이 산뜻한 제주도의 경관을 보면서 추억도 남기고, 티격태격 싸움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는 과정을 만들자는 거였다. 2부는 아침 촬영 전 산책을 하다가 한 해녀가 물질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여기 사람들을 찍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2부 여중생의 대사는 딸의 상상력을 통해 썼고, 3부는 나의 아내 김유미 씨랑 같이 썼다.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다!

김성욱: 시간이 짧게 준비돼 있으니, 곧바로 영화를 보신 관객 분들의 이야기와 질문을 받아보도록 하겠다.

관객1: 영화 너무 잘 봤다. 1부에 스쿠터 여인이 나온다.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여인이 나타나서, 그녀가 3부에서 김유미 씨가 연기한 여인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맥거핀 효과를 노린 것인가.

배창호: 맥거핀적인 효과를 주려고 한 것에 대해서라면 반은 맞다. 남녀 둘만 가면 밋밋한 구조니까 궁금증을 주려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가 있는 여자는 아니지만, 그런 여자의 삶을 우리가 가까이 들여다보면 3부의 여인 같은 삶처럼 될 것이다. 만약 프리프로덕션을 1년 정도 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했더라면 그렇게 출연이 겹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2부와 3부는 은희가 빵집에서 울고 있는 여중생을 만나는 장면을 통해 연결하려 했는데, 너무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될 것 같아 뺐다. 우리가 여행 중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느끼면 그러한 삶이 있고, 우리가 수수께끼로 여기는 여자의 삶도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쓴 거다.

 

관객2: 와 닿는 대사가 많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자는 디카를, 여자는 필카를 가지고 사진을 찍는데, 그렇게 나눈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여자가 디카, 남자가 필카의 감성이 더 잘 어울린다 생각 했는데. 그리고 한 가지 영화 속 인물들이 전부 전문 배우들 같지는 않은데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제주도 현지 사람 얘기라 제주도 출신 비전문 배우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떻게 캐스팅을 한 건지.

배창호: 디카와 필카의 문제는 많은 회의 끝에, 젊은 스텝들의 판단에 맡겼다. 심리구조의 깊이까진 생각 못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 연극배우는 있지만, 영화출연 경험자는 김유미 씨를 제외하곤 거의 전무하다. 나는 집중력과 편안함을 주면 모두 다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자기와 비슷한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체험밖에 없다. 2부의 해녀와 여중생의 경우 두 팀으로 나눠서 캐스팅을 했었다. 연기 경험자를 오디션해보니 감정이 깊고 좋았으나, 제주도 사람 같은 사실감의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비경험자의 진짜 제주도 느낌이 나오는 덜 가공된 느낌으로 가기로 한 거다. 캐스팅은 일종의 용병술로, 영화 영화마다 다르다.

 

삶의 한 때를 되돌아보는 정서적 느낌 주고파!

 

관객3: 2부에서 엄마가 수원에 있다가 제주도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하다.

배창호: 엄마 캐릭터는 내가 비금도라는 섬에서 민박을 했을 때, 실제 그 민박집의 집나간 며느리의 사연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와 접목한 것이다. 섬이란 곳은 외부인들에게는 들어와서 아늑한 곳이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지로 나가더라도, 귀소 본능이라는 것이 있고, 삶이라는 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여자의 삶을 그렸다.

 

관객4: 감독님을 다시 뵙게 될 날을 2년간 기다렸는데, 다시 이렇게 영화로 만나 뵙게 되어서 감동적이다. 김유미 씨는 너무 아름다웠다. 3부에서 김유미 씨가 ‘긴 머리 소녀’ 노래를 부를 때 타원형의 거울을 본다. 이때 그것이 거울이 아니라 사진을 포착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학창시절 사진으로 넘어간다. 앞선 에피소드에서도 사진이나 메모를 하는 것들이 중요한 매개체로서 서로 회복시키고, 관계를 개선시키고, 추억하는 역할로 나오던데, 그런 장면을 넣은 의도가 있으신지. 개인적으로 사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현재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반영하는 매개물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감독님이 오래오래 사셔서 오늘 이 영화처럼 우리를 항상 회복시키고 치유해주는 영화들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배창호: 고맙다. 나도 그 사진장면을 좋아한다. 영화에서 본질적으로 하려고 한 이야기를 잘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까 누구든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삶의 모든 것이 다 영화화 될 수 있다. 이번에는 사진 자체의 느낌들이 영화의 성격에 맞는다고 느껴서 의도적으로 넣었고, 3부의 여주인공 사진은 삶의 한 때 모습을 되돌아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삶을 드라마틱하게 인위적으로 구성하지 않더라도, 일상에 있는 것을 잘 선택하여 배열하면 우리에게 정서적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김성욱: 오늘 객석에는 여러 감독 분들이 관객으로 와 계신다. 봉준호 감독도 오셨는데 한마디 하신다면.

봉준호: 영화 너무 잘 봤다. 여중생 연기한 학생의 얼굴이 인상적이고 좋았다. 물론 학생이니까 비직업 배우겠지만, 학생 극단 같은 것도 아닌 평범한 여중생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배창호: 여중생 지은 양은 제주도 연기학원에 몇 년간 다닌 친구다. 연기 경험은 처음이었고, 극중 할머니는 모노드라마를 하는 민속극 배우셨다. 연출부에게서 지은 양이 두세 시까지 대본연습을 하고 잘 때도 시나리오를 배에다 올려두고 잤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정도로 열의가 있었던 것 같다.

 

허물을 벗고, 인물 그대로 소박하게 그리려 했다!


 

김성욱: 나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이름이 없다면 대사나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 학생이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거 같았다. 예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색다른 ‘젊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작업하신 소회를 말씀해 달라.

배창호: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나의 연출적인 면을 많이 뒤돌아 봤다. 연출자적인 것을 좀 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이런 소재를 만나서, 내가 보는 시선보다는 그냥 인물이 느끼는 대로 소박하고 겸손하게 가려고 했다. <황진이> 이후의 작업들이 사실 화려하고 멋있게 연출해보고 싶은 욕심을 버려오는 과정이었는데, 이번에는 허물을 벗듯이 확 벗어버리려 했다. 사실 내가 동시대의 영화, 동시대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열등감, 어둡고, 비겁한 면들을 냉소적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유행처럼 많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같이 일한 사람들을 통해 아직 우리 영화계가 건강한 구석이 남아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것이 남아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서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고집을 많이 버렸다. 많이 열어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들으니, 소박하고 보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나는 언젠가는 밋밋하지만 생수 같은 영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은 양념을 많이 치고 자극성이 강한 영화들이 많은데, 결국 탈이 나면 찾는 것은 물이고, 물맛은 밋밋하지 않은가. 이 영화가 제주도의 삼다수와 같은 영화가 되길 바랐고,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영화를 좋아하셨다면, 앞으로 이런 분들의 숫자가 더 많아져서, 자극적이지 않고 밋밋하지만 우리 몸에 좋고 시원한, 물리지 않는 생수 같은, 물 같은 깨끗한 영화가 더 나오기를 바란다. (정리: 박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