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간 중에는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 작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두 차례의 영화사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첫 번째 강좌로 지난 10월 30일 <무셰트> 상영 후에는 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정의진 교수가 강사로 나서 ‘브레송 영화와 프랑스 문학’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그 현장을 여기에 전한다.


정의진(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오늘은 문학과 영화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브레송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다. 브레송 영화를 보고 처음부터 감동 받았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를 절망시킨 감독이 둘 있었는데, 타르코프스키와 브레송이었다. <노스텔지아>와 <당나귀 발타자르>를 보고 많이 졸기도 했다. 지금은 둘 다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
영화사적으로 보자면 브레송은 조금 미묘한 위치에 있다. 1901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었다.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 이 분이 98세를 살았다는 게 큰 위로를 줄 때가 있다. 영화적 가능성의 한계까지 가며 주제에 있어서도 매우 강한 윤리의식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오래 사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브레송의 캐리어는 다소 특이한데, 최초의 장편영화인 <죄악의 천사들>이 1943년에 나왔다. 데뷔한 해가 42살이 된다. 브레송 영화의 전성기는 50대에 시작된다. 사실 브레송 미학이 완성된 시기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사형수 탈출하다>가 나온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과 영화라는 관점에서 브레송이 특이한 점을 누벨바그 감독들의 평가를 빗대서도 알 수 있다. 누벨바그 감독들이 처음에 평론가로 활동하며 프랑스 영화를 비판할 때 주된 이유가 프랑스 영화가 지나치게 문학적이라는 거였다.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문학적 내러티브에 너무 많이 기댄다는 것과 지나친 품격을 지향한다는 거다. 문학 작품의 선택 기준도 주로 문학사의 고전들을 선택하곤 했다. 발자크나 위고 등. 누벨바그 감독들은 차라리 미국의 B급 영화들이 보다 영화적이며 이미지의 감각적인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영화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벨바그 감독들은 브레송을 '거장들의 거장'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브레송은 프랑스 문예영화의 시기를 종결하면서 누벨바그가 도래하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브레송의 전성기는 누벨바그의 전성기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브레송을 영화사의 어떤 경향으로도 편입시킬 수 없는 특이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도 브레송의 저서인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 이 책이 세계영화사에 직간접적으로 남긴 족적은 어마어마하다. 가령 배우들의 무표정한 연기라는 측면에서,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브레송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브레송은 시네마가 아니라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브레송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시네마는 영화적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다. 반면 시네마토그래프는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생생함과 신선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어떻게 생생하게 볼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 선명한 명암과 미세한 떨림 같은 것. 즉 카메라의 눈을 활용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담아내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는 일종의 글쓰기다. 운동하는 이미지와 소리로 쓴 글이다"라고 비유한다. 글쓰기는 단순히 내용 전달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언어를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다.



브레송은 배우를 '모델'이라고 부른다. 모델이라는 개념을 채택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배우의 연기를 거부하기 위해서다. 브레송은 배우들의 연기를 두고 일정하게 구성된 감정이나 정서나 내용 등을 일정한 연극적 내지는 문학적 규약에 의해 연기하는 것이라 본다. 브레송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금지한다. 미리 계산된 감정을 넣지 않는다는 거다. 영화를 처음 발명했을 때 나뭇잎을 봤을 때의 놀라움을 보존하려면 그 이미지에 선험적인 관점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 방식 중의 하나가 이미지를 중립적으로 놔두는 거다. 음악을 많이 쓰지 않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배우들의 연기는 중립적으로 통제된 채 그 상황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뽑아낼 것을 요구받는다. 통제된다는 것은 무감정이 아니라 계산되지 않는다는 거다. 예컨대 무셰트가 우는 장면은 미리 계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우는 장면과 다르다. 정말 운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고통이 굉장히 일상적이라서 이를 견뎌야만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감정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평소에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울게 된다. 무셰트의 울음은 바로 그렇게 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브레송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효과음이다. 대사가 적은 대신, 아주 작은 소리까지 생생하게 잡혀있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시간은 거의 없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기도 없고 대사도 적으니까, 남는 것은 이미지와 소리만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브레송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문체다. 즉 영화로 보면 스타일이다. 문체는 보편적인 것을 벗어나는 작가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영화 일반의 것으로 규정화 한다. 브레송에게 스타일은 테크닉이 아닌 모든 것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자신이 『시네마토그래프의 노트』에서 했던 말을 영화에서 그대로 시행한다. 아포리즘으로 아주 짧게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영화관에서 나오는 일종의 일반 문법을 추출해 낸다. 많은 감독들이 여기에서 큰 영감을 얻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 내곤 한다. 가령 카우리스마키는 브레송적인 딱딱한 연기방식을 채택하면서도 거기에 블랙유머들을 집어넣어 변용한다.

브레송 영화에서는 모든 심리 묘사가 제거돼 있다. 감정이 갑자기 격해지는 게 아니라 영화를 따라서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쌓이게 된다. 신기한 경험이다. 무셰트가 쳐한 상황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크게 슬프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끝 즈음에 오게 되면 마음의 동요들이 일어나게 된다. 무셰트가 겪는 감정들을 같이 겪게 되는 느낌이 있다. 마음을 열고 감각을 열고 이미지와 소리를 느끼는 거다. 어떤 감각이나 감정이나 판단이 생겨나는 방식은 이러하다. 예를 들어 여러 장면들이 있는데 그 각각의 장면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들은 다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자연 상태 그대로, 최대한 인위가 배제된 상태로. 인물들을 봐도 그렇다. 모든 등장인물이 독자적인 자기 모습을 잃는 일이 없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비중이 많든 적든 간에 말이다. 누가 누구를 위해 연기하거나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몽타주의 방식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용이 드러나는 방식은 더욱 간접적이고 은밀해진다. 가령 무셰트는 악센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그 이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게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영화를 감각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영화 전체적으로 차근차근 쌓여오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레송의 방식에서 다른 감독들이 배우는 점이 많을 것이다. 문학적인 서사와 인과관계가 아니라, 어떻게 이미지에 입각해서 이미지로 시작해 이미지로 종결시키는가, 소리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합하는가와 같은 문제들. 그리고 어떤 장면을 어디에 넣을 것인가의 문제.

마지막으로 브레송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사형수 탈출하다>를 보면 정말 특이한 영화다. 영화 내내 화면은 어둡고 계속 감시 카메라가 돈다. 새카만 곳에서 죄수들이 몰래 이동하는 것이 장시간 보여진다. 그리고 교도소 내부를 감시하는 조명이 있다. 어두운 장면이 10분 이상 지속되다 보니까, 나중에는 감시하는 조명등이 비춰질 때 감각적으로는 해방감을 준다. 빛 때문에 어떤 시원함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그 빛이 비춰지면 죄수들은 사형을 당하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 빛이 구원처럼 느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무셰트>의 경우도 그런 역설이 있다. 무셰트는 세 번째 굴렀을 때 물에 풍덩 빠진다. 그 물소리의 여파가 남고 바로 찬양하는 음악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 죽음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구원이기도 하다. 브레송에게서 구원의 계기 같은 것들은 철저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물과 이미지 안에 내재한다. 예컨대 극단적으로는 감시소의 조명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베르나노스의 소설과 브레송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원작의 내용과 주제를 그대로 다 끌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브레송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있다. 문예영화의 전통 하에 있으면서도 그 이후의 누벨바그 세대로의 전환점에 있는 미묘한 브레송의 위치를 이런 점에서 볼 수 있다. 문학과 영화라는 관계를 연구할 때, 원작과의 유비관계를 보는 것이 허무해져버리는 영화들이 바로 브레송의 영화인 것 같다. 영화가 문학을 차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철저하게 영화적으로 차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브레송을 통해 볼 수 있다.

정리: 박영석(관객에디터) 사진: 이호규(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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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에 이어 베르나노스의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면서 브레송은 시네마에 대한 고유한 해찰에 이른다. <무셰트>는 종래의 영화들에서 거의 강박화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목적성도 찾아낼 수 없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중시되는 것은 사건이나 스토리 전개가 아니라 작중인물의 내면의식이다. 스토리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의식에 의해서 스토리와 관계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창출되는 것이다.

불행한 고아도,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요정도 아닌 소녀 무셰트는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시름시름 앓는 어머니와 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로 존재를 부정하는 그녀는 결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되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그녀에게 찾아온 충일한 순간(축제에서 한 남자와의 짧은 교감)마저 아버지에 의해 좌초당한다. 무셰트가 세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식은 침묵이다. 그녀의 반사회성은 곳곳에서 표출된다. 합창 시간에 노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우들 앞에서 멸시당한 무셰트는 비탈에 숨어 아이들에게 흙을 던지고, 진흙 묻힌 신발로 회당을 더럽혀 신을 능멸한다. 올가미에 걸린 산짐승처럼 사냥꾼에게 능욕당한 그녀는 어머니가 죽자 완전히 버려진다.


<무셰트>에서 브레송의 미니멀한 스타일은 절정에 달한다. 감각적으로 황량하고 신랄한 이미지의 잔혹함이 시종 시선을 압도한다. 단순하고 절제된 카메라워크는 심리 진술 이상을 겨냥하고 있다. 브레송의 전매특허처럼 알려진 파편화된 신체의 이미지는 <무셰트>에서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스크린을 둥둥 떠다니는 머리 없고 손 잘린 이미지들은 파쇄된 영혼의 시각적 구현이라 할만하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프레이밍에 의해 절단된 몸의 분절은 삶을 위한 투쟁, 갈가리 찢긴 세계와 자아의 분리, 운명에의 굴복을 묘사하고 있다.

<무셰트>는 우리들 누구라도 삶의 비의를 느끼는 무셰트와 진배없는 영혼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럴듯한 의미맥락을 꾸며내는 것은 영화의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브레송의 작의를 완전히 드러내기에 어떤 설명도 미진함이 남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삶을 옥죄어 오는 악마들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소녀의 자살은 그래서 끝끝내 응답을 거절하는 미해결의 인상을 남긴다. 브레송의 혁신성은 바로 여기, 끈질기게 다가가려는 우리를 따돌리고 어떤 감정과 심리묘사도 제거한 이미지의 냉혹함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있다.

글/ 장병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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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죄인이다. 그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매우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러나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에서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의 메타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브레송의 엄격한 얀세니즘은 신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된 운명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영화로 갈수록 그는 촘촘한 사회의 계약 관계와 그 사이의 그물망으로 인해 물질화되어 버린 세계에서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단 하나의 끈인 구원과 은총의 부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다분히 묵시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은 망설이고 있으며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갖가지 종류의 물신에 도전하고 저항해야만 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금욕적인 정신 상태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과 싸워가는 동안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욕주의는 점점 확장되어 마침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본이 처음 감옥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지나 욕망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의 희생자이자 마치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듯한 일종의 속죄양의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죄인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이는 죽고 아내는 떠나버린 채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진정한(?) 죄인이 된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한 소년이 만든 위조지폐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그 소년들은 부모들이 소유한 돈의 힘 덕택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결국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돈의 힘이며 돈은 이 영화에서 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브레송이 그려내는 얀세니즘적 세계에서 죄는 실제 죄를 짓는 행위보다는 거꾸로 결과적인 처벌에서부터 비롯된다. 늙은 여인은 운명적으로 이미 죄인이며 그녀 앞에 놓인 모든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후 완전히 변해버린 이본의 모습은 마치 사드(sade)적인 영웅과도 같다. 사드적인 의미에서 영웅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신보다 앞질러 스스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앞당겨 실행한다. 이는 신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본은 부조리한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 신에 대항해 스스로 죄를 짓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신의 뜻을 앞질러 이행한다. 이는 신의 부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정면 도전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브레송은 이본의 선택에 어떤 가치 부여도 하지 않는다. 이본은 반드시 사형당할 것이지만 또한 브레송은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더 이상 <잔다르크의 재판>(1962)과 <무셰트>(1967)에서와 같은 성스러운 죽음을 통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진실로 인간 세계의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을 긍정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을 배반하는 물신의 이름, 그것은 바로 ‘돈’이다. 그것은 브레송의 가장 참혹한 결론이기도 하다.

글/최은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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