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는 단순하게 말해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다. 아들(하나오카 세이슈)과 며느리(카에), 그리고 시어머니(오츠기)의 관계를 통해 그러한 삶을 보여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시네마스코프를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통해 세 사람의 관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적 심리를 묘사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개가 되는 만다라게꽃은 여성의 삶의 고통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는 오츠기에 대해 카에가 품었던 존경심이 애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나오카 세이슈가 외과수술에 필요한 마취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이 마취제의 실험대상이 되려고 경쟁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에서 아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삼각관계가 첨예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아내인 카에가 시어머니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츠기의 삶을 흠모하고 존경하여 그녀의 삶을 따라 배우려 했던 것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얻기 위해 남편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은 표면에 불과했다. 오츠기가 만다라꽃밭에서 물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와 같은 삶을 꿈꿨던 카에는 결국 눈이 먼 가운데 남편의 성공을 확인하고는 만다라꽃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자의 일생’은 만다라게꽃이 만발한 모습에서 시작해서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을 거쳐 다시 만다라꽃밭에서 마감된다.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마스무라 야스조는 그의 다른 영화에 달리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과감한 편집을 통해 속도감 있게 영화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내공간을 보여줄 때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화면과 같은 절제나 담담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와 카메라의 특이한 앵글의 결합으로 인해 공간은 미스테리하고 꽉 찬 밀실처럼 변모한다. 인물들의 감정은 다소 자제된 채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이 옥죄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간결한 디테일 속에서 인물들이 시네마스코프화면에 배치되는 방식 및 카메라의 독특한 시선과 위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도가 시간적인 느낌을 준다면, 카메라의 연출법은 시스템의 숨막히는 억압감을 강조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모른 채 이용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붉은 천사>에서와 비슷한 내적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꽉 찬 화면의 특이한 공간감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처럼 광각렌즈가 만들어내는 원근법적인 깊이감과도 다르다. 그 깊이감과 인물들의 특이한 배치는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폐쇄된 밀실에서 역적모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인물들의 역적모의를 숨어서 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들의 관계나 심리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편, 이 영화는 한 화면 내에서 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과 그것을 엿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카에의 집에서 조부와 장차 시아버지가 될 세이슈의 대화가 한 켠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것을 엿보는 카에의 모습이 그러하고,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 장면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여자들은 엿보면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거나 각자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만든다. 여기서의 엿봄은 연극에서의 ‘방백’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엿보고 있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녀들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켜보고 관찰하던 사람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오카의 제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속상해 하면서 오츠기가 울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화면의 중심에 주로 배치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모른 채한다. 지켜보고 관찰한 자들만이 결국 시스템의 비밀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엿보고 있는 그녀들은 시스템 속에 있는 또 다른 관객과 같은 위치다.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몇 마디의 말들을 내뱉는 순간들이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관객과 화면 속 인물에 동시에 향한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에서 교차되면서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며 밀실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관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만다라게꽃 역시 여성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만다라게꽃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의 고통을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장치다. 영화에서 여성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말에 의해 드러난다. 카에와 오츠기의 삶을 지켜봤던 시누이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 당대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고통을 감추고 경쟁하듯 하나오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들의 삶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며느리로도 시어머니로도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카에의 삶(과 시어머니의 삶)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의 삶은 만다라게꽃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꽃의 기능은 적절한 양으로 환부를 치유하는 데 있고, 그 꽃을 사용할 때는 정신을 잃게 되며 과다한 사용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결혼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러한 자신의 삶을 감지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만다라게는 집 밖의 약초밭에 활짝 피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또한 오츠기와 카에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다. 고통없이 수술하기 위해 쓰이는 만다라게꽃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마취제로 쓰여서 정신을 잃게 만들듯이 그녀들은 남자의 사랑과 성공의 매개물이 되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카에는 마취제의 과다사용으로 결국 눈이 멀게 된다. 만다라게꽃의 독이 그녀의 삶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애증의 감정으로 인해 시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카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눈이 멀고 나서야 그녀는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어머니를 닮은 아들을 낳는다. 영화에서 하나오카 세이슈는 화면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취약을 개발하고 실제로 성공했던 당대 시스템의 핵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주변적인 여성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그녀들의 삶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그녀들의 고통스런 삶은 당대의 사회구조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가운데, 다른 여성의 삶을 모방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마치 만다라게꽃처럼. 세 번 정도 등장하는 활짝 핀 만다라게의 아름다움과 그 만다라게가 집안의 성공을 위해 마취약이 되는 모습이 밀실같은 집안을 표현한 미장센과 대비된다. 마지막에 카에가 만다라게 꽃밭에서 죽는 장면은 오츠기의 삶을 반복한 후에 밀실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카에의 운명을 아프게 보여준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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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닌 2010.04.22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5.asp?lessonidx=off_snHong03 여기서 평론가 홍성남 선생님이 미조구치 겐지 강의를 하시네요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훔친 욕정>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에는 상호작용과 교환을 위한 탐닉과 섹스가 난무한다. 그의 영화들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욕망에 젖어드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 혹은 인물 주변의 상황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때문인데, 이는 곧 타인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광기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설정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인 섹스장면들은 절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스조 영화의 주인공들은 전쟁, 사회, 혹은 자본 등을 통해 본능이 도태된 집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평범했던 주인공이 특정 사건이나 또 다른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자의식은 온전히 동물적인 감정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탐닉은 곧 인간의 신체에 대한 지독한 페티시로 이어지며,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결여되고 금지된 감정과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야스조의 영화에서 표출되는 인물들의 욕망은 단순한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섹스를 통해 봉인하고 금기되었던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꺼내 보여주며, 이러한 섹스 행위는 소외된 인간들이 마치 물물교환을 하듯 자신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방어기제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야스조의 많은 영화들이 쾌락과 억압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있다고 가정할 때 외도와 불륜을 소재로 하는 <훔친 욕정>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훔친 욕정>은 유부남인 아사이의 동거녀로 지내다가 부인을 쫓아내고 아사이의 사랑을 독차지한 마스코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마스코의 조카 시게코의 출연으로 인해 마스코와 재혼한 아사이는 시게코를 탐하기 시작하고 마스코는 아사이와 시게코의 중간에 놓인 채 아사이의 전처로부터 빼앗아 온 자신의 ‘욕정’을 탓하기 시작한다. 아사이의 전처는 배신과 증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데, 마스코는 전처의 죽음 때문에 시게코와 아사이의 외도를 직접 목격하고도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과 조카와의 관계를 부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의 집착을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훔친 욕정>의 주인공인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손에 넣고야마는 욕망의 결정체인 셈이지만 조카에게 빼앗겨버린 아사이에 대한 집착이 결국 마스코 스스로 벌하고 치유하게 만드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마스코는 완벽한 배신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 더 농밀하고 파격적으로 배신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제어해버린 것이다.

 

마스코라는 여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의외의 소극적 태도는 마스코의 몸과 행동을 대신해 각개 장면들로 분출되고 조립되는데, 영화 속에서 그녀의 광기어린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물이다. 영화는 특정 계절을 확고히 명시하지 않으나 마스코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마스코의 주변인들이 계속해서 들이키는 물로 인해 마스코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갈증의 정서가 녹아있다는 것을 은밀하게 비춰준다. 잔이 흘러넘치도록 담아내는 물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타인에게 지독히도 숨기고 싶은 욕정과 욕망들을 단숨에 들이켜 봉인시키려 노력하는 인간의 은밀한 추태가 연상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억제하고 스스로를 벌하려는 마스코의 애증이 결국 그녀의 내면에서 돌이킬 수 없게 찢겨져버린다는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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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중계] 홍성남 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 강연

지난 11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첫 프로그램으로 열리고 있는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작품 중 <붉은 천사> 상영 후 일본영화 전문가인 홍성남 영화평론가의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 뉴웨이브에 전조가 되었다고 뒤늦게 재평가된 마스무라 야스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강연 일부를 옮긴다.


홍성남(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한국에서 스크린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2005년이었고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눈 먼 짐승>이다. <눈 먼 짐승>이나 <붉은 천사> 등은 너무 센세이션해서 간혹 그의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색깔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칫 잘못 이해하면 어떤 엽기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닌가 착각할 수 도 있는데, 그 엽기적인 측면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야스조만의 상상이 담긴 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시스템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영화를 만들었다. 총 58편의 영화를 만든 야스조의 영화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미국에서 마스무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평론가 조너던 로젠봄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거인과 완구>, <검정 테스트카>, 반전영화는 <붉은 천사>와 <세이사쿠의 아내>, <야쿠자 군대>, 변태적인 섹스영화는 <만지>, <붉은 사랑>, <눈 먼 짐승> 등이고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내는 고백한다>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문신> 등이 있다고 분류했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예전에 마스무라를 높게 평가하며 ‘마스무라 야스조는 대표작이 없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비평가로도 활동한 야스조는 아키라의 이미지와 구도, 그리고 편집능력을 호평하며 아키라를 지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의 편집방식이 빠르고 리드미컬하지 않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야스조는 편집리듬이 강렬하고 빠르며 이것에 플러스해서 사회를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지성을 가진 감독을 원했고 당시 이런 마스무라의 이야기가 앞으로 그가 영화를 만들며 추구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탁월한 시각적 능력을 스크린에 구사할 줄 아는 감독이었고 냉철한 분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로 간 야스조는 그곳에서 유명한 영화학교를 다녔고 이탈리아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글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잡지 등에 일본영화에 대한 평도 썼는데 항상 마지막에 ‘왜 서구는 일본의 한 측면, 특히 정련되고 오밀조밀하고 서구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미학에만 열광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오즈의 영화에 반하는 것으로 굉장히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일본 다이에이사에 들어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처음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을 지냈는데 야스조의 영화는 어떤 면으로는 이찌가와 곤과 맞닿아있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 사회 상층에 있는 집단보다 아래, 주변인들에 대해 공감했다는 측면이 그렇다.


마스무라 감독은 시스템에 대한 반대, 특히 인간을 억누르고 질식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가 자주 보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붉은 천사>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듯 욕망이 이상 분출된다. 하지만 선정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것을 비판적시선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마스무라는 가지고 있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되 그것을 현실적 욕망, 일상에서 보는 욕망보다 과도하게 표출하고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미친 사람들’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마스무라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고 자체가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리얼 재팬’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강인하고 늠름하고 그 이전의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던, 예전에는 일본에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사라져버린 새로운 일본인상의 모색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론 마스무라는 일본 뉴웨이브 그룹에게 감화를 주고 호의를 받고 작업할 바탕을 마련해준 뉴웨이브 이전의 뉴웨이브-‘프리 뉴웨이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뉴웨이브와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었으며 모더니즘적 태도의 미세한 위치에 놓였던 감독이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분류들이 마스무라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주기 어려우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매혹을 주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는 역할을 했던 그는 계속해서 탐구할 가치를 생성시켜주는 자원이 풍부한 시네아스트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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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붉은 천사>

<붉은 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 중에 하나는 영화가 사진들(정지 화면)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상당한 군인들 혹은 널 부러진 시체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제공하고, 전쟁의 분위기는 총소리와 대포소리로 청각화 한다. 일종의 역사적 상흔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붉은 천사>가 전쟁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사건의 시작과 끝에 대해 파헤치기 보다는, 참전자들의 참혹한 모습, 즉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모순적인 거대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전쟁이 인간을 억압하는 지를 드러낸다.

또한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되어 한 인물의 주관적인 회상과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영화가 끝나고 나면 화자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회상의 영화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다 싶은 정도로 카메라와 인물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시점 숏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객관성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 가려진 여주인공의 심리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처럼 <붉은 천사>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 사이로 사쿠라라는 회상 주체의 내레이션이 개입하면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대변한다. 즉 일어나는 사건사고에는 객관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물의 감정적 상태가 부연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가령, 후반부에서 동료 간호사가 참호 바깥으로 나갔을 때 '이로써 나는 세 명을 죽였다'라는 말을 한다. 이 대사는 죽었던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간호사로서 사람들 살리긴 커녕 오히려 죽게 했다는 점에 대해 자책하는 사쿠라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사람을 살리는 직업으로서의 간호사와 의사, 사람을 죽이는 직업으로서의 군인이 대립하고 충돌하지만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서는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붉은 천사>는 (이미지로만 드러나는) 외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억압이 발생한다. 부상으로 인해 잘린 다리와 팔 등이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숏들도 있으며, 심지어 절단하는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정상적인 육체가 절단되고 잘려서 이 숏, 저 숏에서 던져진다. <붉은 천사>라는 제목과 다르게 붉은색의 피는 등장하지 않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비록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육체가 파편화되는 것도 있지만, 영화가 갖고 있는 프레임이라는 경계에서 인물들의 육체가 잘려나가는 상황도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내적으로 인물들은 심리적인 억압을 당한다. 예컨대 사쿠라와 와카베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만 꽃피울 수 있었지만, 결국 그 한계 속에서 죽음으로 좌절된다(이렇게 심리적인 억압은 육체적인 억압과 함께 얼개를 이룬다). 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클로즈업 장면에서, 그들을 둘러싼 침대 망이 마치 그들을 가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붉은 천사>는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고 좌절시키는지, 다시 말해 생에 대한 인간의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욕망과 그것을 좌절시키는 전쟁(과 그로 인한 질병)이라는 억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와카베가 죽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쟁터를 보여주는 엔딩 씬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것이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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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섹스 체크>

 

방탕하게 살아가던 왕년의 천재 육상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반항적이며 재능 있는 한 여공을 스프린터로 키워내 올림픽에 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데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이 짤막한 시놉시스만 보면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섹스 체크>는 정말 괴악한 영화다. 이 영화의 뼈대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녀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명 코치를 만나고 정상에 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인데, 영화 중반에 스포츠 영화의 틀을 깨는 양성인간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며, 양성인간의 성별을 바꾸기 위한 섹스 행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괴이한 소재와 전개는 영화의 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섹스 체크>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 안에 있되 그 어떤 스포츠물과 다르다. 특히 엽색 행각을 일삼는 최악의 인간 말종 미야지 코치의 존재는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 눈에 띤다.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들, 특히 <세이사쿠의 아내>, <아내는 고백한다> 등은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과 사회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어떤 특별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있고 사회는 그 욕망을 용납하지 않기에 필연적이고도 격렬한 대립이 발생한다. 그런데 영화 <섹스 체크>는 마스무라의 그런 자장 안에 있는 듯하지만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미야지 코치라는 인물을 통해 변주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미야지의 꿈이 좌절된 것은 중일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하느라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그는 전쟁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메달을 획득하고 일장기를 올린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가치와 대립되지 않는다. 미야지는 친구의 아내를 강간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지만 또한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 즉 사회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가치란 이 영화에서는 국가주의적 가치와 동일한 것이다. <섹스 체크>는 그렇게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사유화, 도구화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영화에서 미야지가 자신의 친구 미네, 그리고 미네의 부인과 함께 부르는 올림픽 노래의 가사에는 “너의 팔과 너의 다리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팔과 다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개인의 팔과 다리는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야지 역시 자신이 조련하는 히로코의 신체를 철저히 미야지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킨다. 미야지가 미네 앞에서 히로코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육상 선수로서 타고난 신체라고 싱글벙글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장면은 미야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장기를 휘날려야 한다는 국가적 소명을 실현하는 자이며 히로코의 신체와 인격은 그 소명 앞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는 미야지의 내면적 가치이다. 이 장면에서 미야지는 마치 기수가 훌륭한 경주마를 보듯 히로코를 본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욕망은 미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기록 갱신이라든지)과 혼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영화의 현실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그러나 미야지는 그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히로코를 여자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끝내 무너지는 순간, 그리고 나중에 미쳐버린 미네의 부인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찾아온다. <섹스 체크>는 국가주의적 가치에 순응하는 개인의 좌절을 통해 국가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이는 당시 일본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데, 특히 미야지가 중일 전쟁에 참전해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고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은 현재 일본에서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이고 냉정하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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