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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100편의 시네마오디세이2-친밀한 삶

[Cinetalk] 더 이상 사랑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다

- 필립 가렐에 대한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강연 지상중계

 

지난 3월 29일,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1991)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외에도 필립 가렐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렐과 고다르와의 관련성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필립 가렐은 1948년생이고, 프랑스에서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장 으슈타슈, 필립 가렐 등이 이 세대에 해당한다. 가렐은 6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가렐의 <내부의 상처>(1972)를 사영했는데, 랑글루아가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전해진다. 가렐은 랑글루아의 총애를 받았던 시네마테크의 아이였다. 가렐의 영화는 남녀의 연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로메르의 유사해보이지만, 영화의 형식에서 보자면 고다르와의 연관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가렐의 영화를 굵직하게 나눠서 보면, 60년대부터 79년까지의 작업들을 초기로 분류할 수 있다. <내부의 상처>에서 처럼 실험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때 같이 작업한 사람이 니코라는 독일 출신의 가수다. 가렐은 79년까지 같이 작업에 참여했던 니코에 대한 기억을 다룬 영화를 이후에 만들었는데, 그 첫번째 영화가 <비밀의 아이>(1982)라는 작품이고, <야성적 순수>(2001)같은 작품들이 있다. 오늘 보신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1991)까지 포함하자면, 세 편의 영화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세 편의 영화중 니코의 기억을 가장 추상적인, 보편적인 차원에서 다룬 영화가 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마리안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리안느의 죽음이 니코의 죽음과 연결된다. 사망의 경위가 동일하다. 그 전까지는 마리안느라는 여자가 니코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에 '니코에게 바친다'는 자막에서 둘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제라르는 영화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가렐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마리안느도 가수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그런 점에서 가렐과 니코의 관계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비교하면 <비밀의 아이>와 <야성적 순수>는 정확하게 영화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1979년 이후부터의 가렐의 영화는 좀더 내러티브가 뚜렷한 편인데, 주로 그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들, 혹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로 커플들, 연인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랑의 추구, 이별,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가렐의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가렐의 영화에는 반복적인 테마가 있다. <야성적 순수>가 개봉했을 때 일각에서는 '이번에도 똑같은 얘기'라고 좀 싫어하는 반응도 많았던 것 같다. 자기 얘기를 계속 영화로 만드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 보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 나이 때의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호감이 가는 구석도 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가렐은 40대 중반을 넘겼던 나이였고, 영화 속 주인공도 다 그 무렵의 나이대로 그려진다. 니코와의 추억을 제거하고 보면,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40대 남자들의 시니컬한 사랑이야기이다. 중간에 영화에서 나온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마지막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더 이상 아무도 사랑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사랑을 얘기하는 이야기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도 가렐은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을 이미 91년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렐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네 명의 커플,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합하자면 대략 여섯 명의 인물만이 나오고, 롱샷이 많지 않다. 거의 인물 중심으로 촬영이 되었는데 공간적으로도 변화가 많은 건 아니다. 80년대 초반 영화들은 더 심하다. <비밀의 아이>에서는 물리적 제약이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다. 영화를 만드는 취약함들, 가령 낡은 필름, 노화된 카메라, 녹음 장비의 열악함 때문에 스크린에 인물의 형상이 뚜렷하게 담겨지지 못한다. 그런 제약성과 불가능성에서 연인들의 이별, 인물의 사라짐, 떠남, 사랑의 실패가 영화의 테마와 연결된다. 자신이 잊혀지고 희미해지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련된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는 꽤나 심플하다.

몇 가지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드릴까 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 시퀀스에서 화가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왜 자신을 그리지 않냐고 따지는 여자에게 화가는 ‘너는 너무 리얼해서 그리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들의 대사는 남녀의 사랑의 관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가렐 자신이 겪었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모호성을 또한 이 대화에서 반추할 수 있다. 니코와 자신의 과거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리얼한 것이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건 개인의 이야기가 다른 일들보다 더 리얼해서가 아니라 화가의 말을 빌자면 너무 근접해있기 때문이다. 삶을 근거로 픽션을 만들어갈 때, 현실에 너무 밀착된 삶을 영화로 만들어갈 때 예술가가 겪는 혼란, 모호함을 반추하게 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남자는 계단에서 내려가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공 남자가 화가에게 ‘넌 너무 학구적이다. 너는 책에 있는 얘기만 인용한다. 삶은 그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화가는 ‘사랑은 책에서 시작하는 거고, 책이 사라지게 되면 사랑도 끝나버린다. 아마도 우리는 사랑에 관해 얘기하는 마지막 세대일거다’라고 대답한다. 이 시퀀스는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동시에 누군가의 그림을 그려 나갈 때 겪게 되는 곤란함을 보여준다. 이건 1979년 이래로 가렐의 최신작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작가와 모델, 영화감과 배우, 예술가와 모델, 이들의 필연적인 관계가 겪는 문제점이 두 남자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가렐의 영화가 고다르의 영화와 비슷한 것도 이런 점들에서다.

이 영화는 시간, 공간의 연결성이 믿지 못할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어떠한 시간적 추이나 변화가 있는지가 짐작이 안 된다. 가렐의 영화에는 그런 순간들이 굉장히 많다. <야성적 순수>에서 감독과 배우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서도 시간적 추이와 공간적 변화를 가늠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현실적 시간과 공간을 현재의 상태에서 미래적으로 연결해간다기보다는, 현재의 시점 안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독특한 시제에서의 연속성으로 볼 필요가 있다. 가령 10년 전의 과거를 지금의 관점에서 연결한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시공간적 연결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이 장면을 볼 때에 사건은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를 향한 시간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에서 회상되는 과거의 연속성의 관점에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실제 시공간의 연결과는 다른 느낌과 감각의 연속성이 여기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언가 비워진 지대, 블랙홀 같은 공백의 지대들이다. 고다르는 ‘남자가 여자를 천천히 쳐다보는 순간이란 그녀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떠난다고, 싫어한다고 말하는 순간"이라 말했는데, 이는 진실에 가깝다. 그 때서야 비로서 그녀에게 무슨일이,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녀의 얼굴에 관심을 보이고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보려 시도한다. 고다르가 안나 카리나와 <비브르 사 비>(1962) 등의 초기작들을 찍고 있을 때 그의 심정이 그러했다. 이 때 고다르는 안나 카리나와 불화관계에 있었다. 고다르의 클로즈업의 표현성이란 그녀가 나로부터 떠나가 있는 상태에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포착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인다. 폭탄선언을 한 이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돌아보면서 내가 뭘 했는지를 떠올리는 것과도 같다. 그때 우리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식의 공백지대 같은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뒤에 생각해보면 뭔가 결여되고 방치된 그런 시간들이 있는거다. 방치한 시간, 방치시켰던 사람들을 화면으로 포착해 나가는 방식이다.

가렐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그래서 남녀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인데, 그 때 여자의 마음은 어쩐지 이미 떠나있는것처럼 보인다. 지금 보시는 장면에서 화면은 두 남녀의 시선의 엇갈림에 의해 구축되어 있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있고, 남자는 측면으로 앉아 있다. 나중엔 둘 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이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가렐의 영화를 보면 이런 순간들이 많다. 거의 대부분 여자가 정중앙에 있고, 남자는 측면에서 위치하거나 여자 주변을 배회한다. 남자가 정면을 쳐다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의 시선은 엇갈린다. 이런 식의 화면구성은 여자가 중심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시선을 두지 않았던 그 때의 시간을 되찾는 화면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로 되돌아갔을 때 방치되거나 의식하지 못했던 시간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배려하지 못한 시간 안에서의 배치가 이런 식의 엇갈림으로 표현된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두 남자가 대화를 하는데, ‘여자들은 어느 순간 떠나는 것 같지만 사실 떠나기 전에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네가 간파하지 못했을 뿐이다’라는 식의 대사가 나온다. 가렐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방치되거나 배려되지 못한 순간들을 영화로 포착해 나간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 안에서 되찾아야 할 지대의 진정한 시간이나 지대인 것이다. 가렐의 영화에서 빛나는 순간들이란 그래서 배려하지 않았던 공백의 지대로, 그런 시간으로 영화를 통해 되돌아가는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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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에서 마리안느가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때, 그 장면의 요점은 여자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그 말의 의미나 말하는 순간에 관심이 없는, 되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의 장면을 찍고 있다는 거다. 이것은 어긋난 시선이다. 어긋나 있는 시선이 여자를 따라 화면에 담아질 땐, 현재의 시간 안에 그걸 보고 있는 혹은 만들고 있는 사람의 시선과 새롭게  만난다. 과거에 방치되거나 배려되지 못했던 사람, 그들의 시선과 얼굴과 새롭게 마주하는 것, 그것이 가렐의 시간이다.

이것은 재현이라기보다는 시간적 중첩들을 화면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가렐은 삶에 근접한 영화를 만들어 가려한다. 하지만 이건 영화 처음에 나온 것처럼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 게다가 영화는 너무 쉽게 삶을 다른 세계로 대치해버린다. 고다르의 <경멸>(1963) 첫 부분에 나오는 바쟁의 말을 빌자면,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스크린을 대체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삶을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힘겹다. 삶과 예술적 작품의 구성은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치광이 삐에로>(1965)에서 안나 키라나가 장 폴 벨몽도에게 ‘왜 삶은 소설처럼 완전하지 않은가?’라고, 삶이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 너무 싫다고 말한다. 삶은 대단히 분산적이고 삶을 전체적으로 묶어주는 통일성의 단위를 찾기가 어렵다. 가렐의 영화는 삶과 영화의 관계가 초래하는 이런 어려움과 직면한다.  그런 가운데 가렐의 영화는 방치된 개인, 배려받지 못한 시간, 인지되지 못한 인식의 공백지대로 얼굴과 시선을 되돌려주려 한다. 이것이 가렐이 개인적 삶에 근거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근본적 입장이고, 삶과 영화라는 걸 근접시켜 나가는 그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정리: 송은경 관객에디터 | 사진: 최용혁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