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3. 13:40ㆍ특별전/이스라엘 영화제 - 21세기 주목할 작가 특별전
이스라엘 영화들이 그리는 보통 사람들의 고민
많은 영화들이 이스라엘을 그려왔다. 특히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 이후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을 다룬 영화들을 보며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인상을 쌓아 왔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이스라엘의 단면을 잘 포착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야마카를 쓰고 수염을 땋은 랍비들이나 성지순례 명소의 기록 영상들, 그리고 해외 토픽 뉴스에서 본 군인들의 모습을 빼고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이스라엘 영화제”는 지금까지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이스라엘 영화’ 속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물론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이스라엘 영화들 중 최근 개봉한 7편의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나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군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은행 대출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젤리피쉬>, <밴드 비지트-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
이번 상영작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신의 문제와 최대한 직면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장르의 상상력에 기대지도 않고, 환상이란 영화적 장치를 안이하게 사용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각 영화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돌려 말하지 않고, 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거짓 희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문제를 제기하고 끝날 때까지 여기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이다.
<아버지만의 영광>, <레스터레이션>
앞엣 두 영화가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면 <아버지만의 영광>(2011)과 <레스터레이션>(2011)은 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끄집어내고 파헤친다. 이때 등장인물들은 괴로워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까지 문제를 키워버린다. 그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문제까지 새롭게 드러나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아버지만의 영광>을 보자. 탈무드를 연구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연구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 자신의 평생을 광범위한 기본자료 연구에 바쳐온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에 몰두하는 아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불운이 겹치며 아버지의 연구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고 아들은 어느새 모두에게 인정받는 학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인터뷰를 통해 이 불만을 직설적으로 말해버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연구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들은 엄청난 배신감과 실망을 느낀다. <레스터레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아들은 아버지가 적자만 내는 고가구 복원 가게를 그만 정리했으면 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배신감과 실망을 느낀다. 하지만 아들은 아들 나름대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둘의 갈등은 계속 커져 간다.
<노아의 홍수>
이런 맥락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형을 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노아의 홍수>(2009)는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 속의 아버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쉬고 있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소년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법한데 한 가지 사건이 더 발생한다. 지금까지 보호시설에서 지내던 지적장애인인 큰아들이 시설 측의 사정으로 다시 가족들과 살게 된 것이다. 일상적인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데다 골치 아픈 사고를 치는 이 형은 등장과 동시에 가족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든다. 어머니는 이웃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고 소년은 친구들의 놀림을 참아야 한다.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능력이 더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 앞의 두 영화가 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면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의 그래프가 가장 높아졌을 때 냉정하게 영화를 끝내거나, 연민의 시선과 함께 이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지며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끈질기게 희망을 불어넎을 빈틈을 만들어 낸 다음 결국 봉합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건 변하지 않지만 적어도 오늘이 어제보다 마음이 좀 더 가벼워지기는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말이 전혀 안 통해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형에게 말을 거는 동생의 노력이나 늦은 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컴퓨터 얘기를 꺼내는 아버지의 노력 같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이런 작은 노력이 그 결말에 이르러 따뜻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건 물론이다.
<매치메이커>, <2 나이트>
그리고 중년의 소설가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십대 시절을 추억하는 <매치메이커>(2010)와 최근 이스라엘 독립영화의 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 <2 나이트>(2012)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를 고민한다. 특히 <매치메이커>는 이스라엘 사회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제들을 고민해 왔는지 짐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레바논 등 외국과는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홀로코스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있다. 즉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민이 한꺼번에 섞여 있는 독특한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깔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무작정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한편 <2 나이트>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젊은 남녀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컨셉의 영화이지만 그 안에서도 지금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간접적으로 그린다. 이를테면 콘돔 사용에 대한 의견 대립을 통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새로운 가치관과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가치관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괜히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지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의 젊은 영화들과 비교해 보아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번 “이스라엘 영화제 - 21세기 주목할 작가 특별전"의 7편의 상영작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처음에 얘기했듯이 이 영화들만으로 이스라엘 영화의 커다란 경향이나 현재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들이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높은 주목을 받았다는 것과,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흐름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상영작들이 어떤 식으로든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홀로코스트라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부모 세대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그들이 이루어낸 것에 대한 존경이 있으며, 그와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짜증 섞인 반발심이 섞여 있다. 만약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진 이스라엘 영화들을 본다면 이 문제들은 또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용감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며 옆 사람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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