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5. 19:31ㆍ특별전/엘리아 카잔 특별전
[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
<에덴의 동쪽>(1955)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영화에서도 등장인물인 보안관 샘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카인은 아벨을 죽인 뒤 여호와를 떠나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으로 갔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을 통해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이 사리나스와 몬터레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담 트라스크(레이먼드 매시)의 농장은 에덴이고 아담을 떠난 케이트(조 반 플리트)가 바를 운영하면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몬터레이는 놋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착한 아론(리처드 다바로스)은 아벨, 비뚤어진 칼(제임스 딘)은 카인이라고 봐도 될까? 아마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는 케이트와 아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좀 더 상세하게 다뤄진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아론과 칼 형제의 성장 이후가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 까닭으로 영화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케이트의 자신의 손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
<이유없는 반항>에서도 그랬다고 생각되는데 제임스 딘은 불량하고 반항적인 소년이지만 진심으로 비뚤어진 인물이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내면에서는 순수하고 선함을 간직하고 있는데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임스 딘이 연기하는 인물이 일관되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자신은 불량하고 나쁜 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알고 보면 우등생에다 발명가인 자기 형제보다 더 창의적이고 더 똑똑하며 수완도 있고 배짱도 좋으며 ‘입에 발린 소리에 속지 않을’ 그런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아버지도 언젠가 진정한 자식이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 지금까지 보아온 저 인물의 모든 것은 사실은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게 된다. 인내할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현명함과 미숙함에서 나오는 내면적인 고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은 영화에서 케이트와 아론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마치 영화로부터 버려진 것처럼 여겨진다. 케이트는 등을 떠밀린 아론이 자신의 몸 위로 넘어질 때 그의 곁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영화에서 퇴장하며 아론은 창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깨버리는 극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현명하고 잘난 사랑받는 아들에서 우둔하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인물로 추락한 채 전장으로 떠난다. 영화는 두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그들의 목소리,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는 칼의 행동 하나로 거의 살해당하다시피 한 희생자처럼 그려놓는다. 그런데 그들의 극적인 추락은 칼의 고양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칼이 아버지와 화해하고 숭고해지기 위해서 두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것 같은 그런 기분까지 든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과연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갈등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칼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담도 그러했는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한가? 모르겠다. 이 부분만은 앞으로도 질문으로 남을 것 같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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