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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

나의 두 번째 데뷔작 혹은 진정한 첫 번째 영화

[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


자전적인 영화로 잘 알려진 <8과 1/2>(1963)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귀도는 결국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데 실패한다. 영화 속 비평가 도미에의 말을 빌자면, 그는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영화를 만들려하는데 그를 괴롭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기억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 꽉 막힌 교통정체 속에서 폐쇄공포에 시달리던 귀도는 차문을 열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지만 그의 발목은 땅에 묶여 있고 결국 귀도는 밑으로 추락한다. 그가 날아올랐던 곳이 자신의 영화 세트인 우주선 발사대가 설치된 바닷가임을 상기해본다면, 귀도가 자신을 괴롭히며 출몰하는 과거의 시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올린 모든 환상들은 결국 그가 창조하려는 영화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가 만든 판타지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가 창조한 영화 속 캐릭터는 자신이 과거에 만났던 창녀 사라지나이거나 매혹에 빠졌던 클라우디아이며, 죽은 어머니이거나 자신을 학교로부터 파문시켰던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다. 이들은 귀도의 영화의 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종반부에 귀도가 어린 시절 집을 클라우디아와 함께 찾았을 때, 자신이 이제부터 만들 영화에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침윤되어 추락하고 있는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이제 새롭게 지켜내겠다는, 다시 말해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끊어내고 싶다는 펠리니 자신의 선언처럼 들린다. 이것은 펠리니가 전작 <카비리아의 밤>에서 수미쌍괄 구조를 취함으로써 줄리에타 마시나를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밀어 넣었던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순환의 양상과는 다른 것이다. 귀도의 영화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이들은 이제 그의 영화 출발점에 모인다. 과거와 현실의 인물들은 서커스를 하듯 환상의 옷을 입고 뒤섞여 있고, 여기에 어린 귀도(와 광대들)가 이들을 이끌 듯 음악을 연주한다. 펠리니는 ‘서커스가 단순한 쇼가 아니라 인생을 체험하고, 자신의 인생을 여행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제 인물들은 각자의 인생을 여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핏 폐쇄적인 순환 구조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원형이 끊어져 있는 열린 구조임을 주목하자. 그리고 이들은 어린 귀도의 음악에 따라 그곳을 빠져나간다. 이제 귀도는 아니 펠리니는 과거에 시달리지 않는 아이처럼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영화 세계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펠리니는 이 영화를 “나의 두 번째 데뷔작 혹은 진정한 첫 번째 영화”라고 말했다. (우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