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클로슈 얀초의 세계 [2]


미클로슈 얀초는 역사적으로 분출되었던 ‘혁명/반혁명, 억압/피억압’의 사회구조를 인간의 폭력성과 권력에의 집착, 그리고 이에 대항한 인간성의 해방과 자유라는 테마를 통해 그려냈다. 그가 이런 테마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했던 영화적인 장치들은 너무나도 독창적이어서, 그 자체로 ‘얀초의 세계’라고 불렸다. 특히 얀초의 스타일을 특징지으며 영화 전체를 구축해내는 것은, 패닝과 트래킹이 수반된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이뤄진 롱테이크와 광활한 자연풍경을 담아내는 하이앵글의 롱숏이라고 할 수 있다.

얀초의 영화는 분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주된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어 6, 70년대에 걸쳐 전개되었던 일련의 경향인 ‘정치적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런 영화들의 주된 특징인 ‘탈드라마화(dedramatisation)’의 경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극적 구성을 의도적으로 억제해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얀초의 탈드라마화 전략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독창성을 띄고 있는데, 이를 보증하는 것이 바로 빠르고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운동적, 물리적 스펙터클인 것이다. 롱테이크를 잘 사용하는 작가들의 대부분이 느릿하게 움직이거나 혹은 정지된 카메라를 통해 시간의 지속을 담아내는 반면, 얀초의 롱테이크는 어디까지나 빠른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훑어 나가는데 주력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데이비드 보드웰은 안토니오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탈드라마화 전략의 작가들을 ‘미니멀리스트’라고 규정하면서, 반대로 탈드라마화의 얀초식 버전은 매우 화려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심지어 얀초를 ‘맥시멀리스트’라고 부른다. 이는 얼핏 듣기에 모순적인 말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스펙터클은 드라마의 힘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영화에서도 극적으로 강렬한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감금된 죄수를 비인간적으로 억압하는 경비원들과 무작위로 죄수를 처형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휘관들의 모습은 관객에게 강력한 심적 동요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초의 영화가 드라마적인 힘을 갖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는 영화가 지속을 수반하여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카메라 운동의 물리적 측면 그 자체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극적 동요의 순간들을 뒤덮고 감정을 단속적으로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감정적 동요가 엄격히 형식화된 카메라의 운동성 내에서 추상화되어 버리기에, 어떠한 감정이 누적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화려한 운동적 스펙터클로 구현되는 탈드라마화라는 모순성이야말로 사실은 얀초적인 스타일의 중요한 특징인 셈이다.

롱테이크로 구성된 하이앵글의 롱숏이 담아내는 것은 주로 광활한 풍경이다. 헝가리의 평원에서 대부분 촬영되었다고 알려진 영화 속 풍경들은 일견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은 감금되었던 인물들이 탈출하여 추적자들을 피해 숨고 표류해 다니는 공간이다. 그러나 영화의 인물들은 결코 그 풍경 속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연이 광활하게 열려있으며, 거기서 인간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은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이앵글의 롱숏으로 프레이밍된 광활해 보이는 풍경은 사실은 인물들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속박처럼 존재하는 하나의 경계점인 것이다. 열려있는 자연공간의 폐쇄성이라는 역설이 가능한 이유다. 이와 같은 원거리 촬영은 인간 집단의 배치 형태(수직, 수평, 원형, 삼각형의 구도)를 보여준다. 가령 <검거>의 경우 원형적 구도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원거리 촬영은 또한 집단의 이동과 충돌, 그 충돌의 변화 양상, 더 나아가 역사의 변혁을 전지적 시점으로 혹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적과 백>에서 원거리 시점은 적군과 백군의 집단적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데, 그럼으로써 전투의 승리와 패배의 교차, 힘의 역학관계의 변환의 과정들이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얀초의 대부분의 영화에는 개인화된 주인공이 없다. 얀초는 개인의 운명보다는 집단 역학 및 역사의 변혁에 관심이 있다. 이는 아마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소비에트 몽타주 영화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를 통한 감정적 파토스로써 혁명의식을 고취하고 역사의 변혁을 표상하는 결과를 얻으려 했다면, 얀초는 롱테이크를 통해 그 변화 과정 자체의 역학에 더 주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얀초는 역사를 사실이나 결과로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역사를 과정과 연속, 그리고 혁명적인 관점에 의해 결정된 사회적 사건의 동시성으로서 인식한다. 고도로 양식화된 얀초 영화의 스타일은, 그의 역사의식과 정확히 조응한다. 즉 카메라 움직임과 롱테이크는 각각 운동과 지속을 머금으며, 이것은 각각 변혁의 역학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결합을 통해 전쟁 중인 역사의 역동적 움직임은 시각적으로 추상화된다. 그 추상화 끝에 남는 것은 일종의 형태를 이루는 움직임 그 자체, 마치 발레와도 같이 유려한 운동적 스펙터클이다. (박영석)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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