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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Jiff in Seoul: 미클로슈 얀초 특별전

억압된 유토피아를 내밀하게 관찰하는 시네아스트

미클로슈 얀초의 세계 [1]


미클로슈 얀초는 1921년 헝가리 버크 지방에서 태어나 법률과 민족학 공부를 거쳐 부다페스트 영화연극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그가 아카데미를 통해 영화를 처음 만나고 만들게 만든 계기가 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고, 얀초는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다양한 단편들을 만들어냈다. 1950년대 초, 얀초는 조국을 여행하면서 헝가리라는 국가와 헝가리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곧 1958년 얀초의 첫 장편영화인 <종은 로마에 갔다>라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종은 로마에 갔다>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까지 얀초는 기록영화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적인 단편영화들을 제작해왔던 얀초에게 전쟁 후에 만난 아카데미 시스템은 자국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얀초는 헝가리에 관한 억압과 혁명의 역사를 개인의 경험, 즉 자신의 삶에 기반을 두어 지속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얀초의 영화들은 주로 전쟁 전과 후로 대비되어지는 상황들의 변화와 이에 버금가는 사회적 개혁, 혹은 혁명이 일어났던 시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흔히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 중요시되어지는 역동성과 긴박함의 미장센이 존재하지 않는다. 얀초는 타인으로부터 억압된 채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물들의 행보를 이와 대비되는 넓고 광활한 평원에 설정해놓고, 네모난 프레임을 통해 영화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내밀하게 관찰한다. 러시아 공산주의 50주년을 기념하면서 러시아와 헝가리가 공동 제작했던 얀초의 1967년작 <적과 백>은 그를 헝가리의 거장, 더 나아가 동유럽 영화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네아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적과 백>은 공산주의에 기반한 작품이지만, 영화는 전쟁 직후의 아이러니를 참혹하게 다루고 있다. 얀초가 <적과 백>에서 속박되고 구속되어진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앞서 말한 역동적 움직임과 보편의 전쟁영화와는 거리가 먼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얀초는 영화를 통해 전쟁에 대한 사실 혹은 권력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이를 철학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로 변환시켜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때문에 얀초의 <적과 백>을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것만 같은 학살과 투쟁에 대한 연극, 혹은 군무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얀초의 카메라로 인해 재구성된 러시아 혁명사는 영화를 보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의 영화에서 역설된 '전쟁'이라는 단어는 아주 깊고 느리게 영화 밖에 놓인 사람들을 자극시키고 비극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적과 백> 직후에 만들어진 얀초의 <침묵과 외침>은 <적과 백>에서 보여줬던 전시가 종결된 이후 투쟁에서 살아남거나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경계인들이 모여 있는 한 마을로 전환된다. <침묵과 외침>은 <적과 백>의 연장선상에 존재하지만 전쟁 중과 전쟁 후의 상황을 명확하게 가르게 만드는 역사적 간극을 놓치지 않고 이미지로 옮겨낸다. 얀초의 ‘혁명 연작’ 중 하나인 <적과 백>과 <침묵과 외침>은 빠르고 변화하는 사회와 그곳에 남겨진 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체감해야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괘를 같이 하는 두 영화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의 텍스트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얀초의 이러한 방법은 그의 영화를 전쟁의 참혹성이라는 거대한 범주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미클로슈 얀초의 영화 속에 위치한 인물들은 타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존재는 그들이 나누는 아주 작은 대화나 식사기도와 같은 음성들이 전부일 뿐이며 그 이상의 어떤 감정도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와 평원을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 즉 내러티브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는 주어진 이름도 특정한 주인공도 설정되어있지 않다. 한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놓여있으면서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롱테이크를 통해 집단과 부락의 모습을 집요하게 담아내는 그의 카메라는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한 뿌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불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얀초의 영화들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특정 역사를 통해 도태된 유토피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절제된 프레임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