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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우리들의 극장, 우리들의 시네마테크

 

 


나는 이번 2010년 친구들 영화제의 상영작 목록이 업데이트되는 것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엄청난 쾌재를 불렀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푀이야드의 <뱀파이어>가 상영목록에 들어있었는데, 사실 작년에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포함한 푀이야드의 영화들을 보아오며 ‘<뱀파이어>연작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군’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어느 국가를 여행할 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던 푀이야드의 이 영화가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올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트시네마에서 <뱀파이어>를 상영한대!’ 서울의 각지에 퍼져있는 친구들에게 (심지어 아트시네마를 모르는 친구들에게까지) 이 기념비적인 상영의 소식을 알렸다. <뱀파이어>이외에 평소 호감을 가졌던 영화들의 극장상영도 행복한 일이었지만, 이번 친구들영화제에서 <뱀파이어>만 챙겨보아도 만족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뱀파이어>에 대한 들뜬 마음을 뒤로 하고 2010년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개막작은 <뱀파이어>의 1부와 2부의 상영이었고, 나는 앞으로 세 번 정도 더 예정되어있는 ‘뱀파이어 데이’의 서막을 행복하게 바라봤다. 사실 영화를 보고 배창호 감독님의 축사를 듣고 온전히 집에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게스트들 중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 자리에 영화를 보러 온 건지 영화의 친구들을 보러 온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던 그 분의 말이 순식간에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식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뱀파이어>를 집에서 혼자 숨죽이며 맛있는 음식을 냠냠 먹는 심정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나의 환상이 스크린에 걸쳐 현실로 거듭나려는 순간인데, 저 분은 왜 저 단상에 서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야유를 보냈지만 나는 들리지 않을만큼 먼 거리에 앉아있었다. '저 자리에서 <뱀파이어>가 상영된단 말이야!' 속이 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도 느꼈다. 그가 말하는 '영화'와 '영화의 친구들'. 그러니까 '진짜' 영화를 보러 온, 극장에 영화를 나누고 싶어서 모여든 우리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이야기다.

 

애당초 <뱀파이어>만 온전히 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뱀파이어 데이', 그리고 기왕이면 정성일 선생님의 강연이 있는 '뱀파이어 데이'를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은 1월 말 즈음 화약이 폭발하듯 빠르게 번져가기 시작했고, 1월 말에서 2월 초로 넘어오는 그 사이 시간동안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으로 장면장면들이 쏘아질때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행복하기는 했지만, 그게 끝나고나면 텁텁한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관람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오면 어김없이 로비에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가 되어주세요'를 외치는 관객친구들이 있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한 푼 두 푼의 기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관객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시네마테크 사태. 그러니까 '진짜로' 위험해진 시네마테크 사태의 (개인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지난 월요일의 상영이었던 <사냥꾼의 밤>이후부터 였다. '뱀파이어 데이'를 맞기 바로 전 날 오후에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 영화가 원래 이렇게 달디 단 것이었지'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 달디 단 영화는 원래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나에게, 우리에게 불어닥친 그 빌어먹을 상황들이 우리를 그 달고 아름다운 향연에서 물러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내 앞에 놓인 스크린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퍼뜩 이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헤어날 수 없을만큼 골이 깊어지고 있는 분노 비슷한 감정이 조금 더 단단하고 영리하게 영글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코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관객모금부스에서 노트북을 끄적거리며 '펠리니 전작전을 꼭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볼 수 있었으면'이라는 혼잣말 비스무레한 걸 쏟아냈을 때, 옆에서 같이 일하던 관객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펠리니의 전작전을 하게 되면 넌 누구보다도 기뻐할 사람일텐데."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는 단어, '친구'. 친구들영화제의 개막식날 누군가는 '이곳에 친구들을 보러 온게 아니냐'는 말을 늘어놓으며 조롱섞인 말을 건넸다. 만일 그가 말했던 친구라는 개념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건네주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가 개막식날 위와 같은 연설을 했던 그 분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 영화를 보러오기도 하지만, 그 영화가 나에게 영화를 벗어난 무언가로 발전 혹은 전환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펠리니가 너무 좋아' '<뱀파이어>가 너무 기다려져'라는 말을 했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해줄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과 함께 '우리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만일 개막식의 그 분이 내켜하지 않던 것이 바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는 관객 각자의 친구들이었다면, 나는 손에 손을 잡고 우리만이 시네마테크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친구'라는 단어를 소진해가며 보여주고 싶다. 때문에 요즘은 아직도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을 받지만(그리고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치유될 수 있는게 아니란 것을 알지만) 극장에 나갈 때마다 이제는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시네마테크에서 보내는 친구들, 전단지를 나눠주는 친구들, 그걸 읽고 작은 모금통에 돈을 넣어주는 친구들, 그리고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며 다시 영화를 보러들어가는 불특정다수의 친구들을 보러 시네마테크로 향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 정말 철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만 말이다. (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