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후의 사나이> 상영 후 허지웅 평론가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8월 4일, 무더위의 한 가운데 <지상 최후의 사나이> 상영이 끝나고 허지웅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장르 영화에 대한 애착과 사유는 물론이고, 토크만으로 유혈이 낭자하던 즐거운 시네토크 현장을 전한다.

 

 

허지웅(영화평론가): 좀비 이야기는 타자, 혹은 이방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결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다른 것들을 죽이고 없앨 것이냐, 혹은 융합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것이냐 하는 두 가지 태도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또한 타자를 없앤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과연 그것들에 비해 무엇이 나은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보신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최초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매드슨의 단편들은 굉장히 기발한 설정을 통해 소름 끼치는 결말을 이끌어 내는, 짧은 이야기의 미덕을 가진 작품들이다. 반면 <나는 전설이다>는 중편으로, 기존의 매드슨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54년 작, 이 영화는 64년 작이다. 이후 80년대에 찰톤 헤스턴을 주인공으로 한 <오메가 맨>으로 다시 영화화되었는데, 우리나라 공중파 TV에서도 자주 보여준 작품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 2007년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작품까지 총 세 번 영화화되었다. 그나마 원작 소설의 내용을 많이 훼손하지 않고 영화화한 사례가 역시 <지상 최후의 사나이>인데, 매드슨이 이 영화의 각본을 직접 썼다. 그러나 오프닝 크레딧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완성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이름을 뺄 것을 요구했고 대신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 영화를 마냥 싫어했던 것은 아니고, 이 영화가 실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지점을 지적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타당한 것 같다. 먼저, 주인공 빈센트 프라이스의 캐스팅이다. 프라이스는 B급 호러물의 영웅이자 아이콘인 위대한 배우였고, 많은 비뚤어진 감독들의 유년기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다만 워낙 유명한 스타다보니 약간 ‘꼰대스럽게’ 구는 부분이 있었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시체들이 널린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펼쳐지며 모건이 트렁크에 시체를 싣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더미를 쓰면 더 많은 시체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프라이스가 극의 완성도와 사실감을 위해 굳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써야 한다고 우겼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 배우들을 쓰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프라이스가 극장에서 시체를 옮길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 한다. 시체가 널린 도로를 차로 달리는 부분에서도 굉장히 서행한다. (웃음)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부분이 있었고, 결정적인 문제는 당대의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빈센트 프라이스는 목소리 자체가 브랜드화 되었던 사람이다. 당시 ‘페이머스 고스트 스토리즈 Famous Ghost Stories’라는 TV 쇼의 진행을 맡고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할 대상을 찾기 쉽지 않은데, 굳이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이 끝날 때 ‘이 이야기는 전남 순천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시어머니가…’ 같은 내레이션을 하는 목소리 같은 것이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는 초반 내레이션이 굉장히 많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심각하게 몰입하기는커녕 키득키득 웃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드슨은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했고, 제작진을 많이 꾸짖었다고 한다.

 

 

영화의 진행은 좀 루즈한 편이다. 당시에 표현할 수 있었던 기술적 한계도 있었고, 연출력의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제작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는 해머 영화사에서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이태리 합작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 어쨌든 64년, 즉 6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해주셨으면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건 엄밀히 좀비가 아니고,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좀비가 아니다. 하지만 좀비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괴물에 대한 이미지는 명확한데, 제임스 웨일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속편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의 첫 장면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괴물이 마을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풍차에 몸을 숨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괴물은 우리와 다른 존재고, 아름답지 않은 외양을 가지고 있으며 소외 받는 존재다. 또한 우리가 기억할만한 유명한 괴물은 당시의 시대성을 담고 있다. 드라큐라나 미이라 같은 근대의 괴물들은 중세 이전의 세계관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반영하고, 그 이후에는 환경오염이나 핵으로부터 비롯한 괴물들이 등장했다. 이런 소재성 외에 개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괴물은 독자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1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좀비가 등장하며 괴물이 다수, 군중, 집단의 모습을 하게 된다. 개체적 공포보다 집단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더 유효해진 것이다. 또한 그 좀비라는 유행은 68년도에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대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여전히 개별화된 연쇄살인범보다는 무리와 집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매드슨의 소설과 이 영화는 뱀파이어들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의 방식과는 굉장히 다르다. 신비주의적인 경로로 탄생하는 뱀파이어가 아닌 병균에 의해 전염되는 일종의 질병의 감염자들이다. 또한 이들이 마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마늘이 함유한 특정 성분 때문이고,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토록 숭배하며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신의 존재가 자신들을 내팽개친 것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과 공포 때문이라는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무리를 지은, 군중에 가까운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매드슨의 원작이 최초였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은 후의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지 로메로 역시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로부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이미지를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자크 투르뇌르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를 비롯해 좀비가 등장하는 과거의 영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부두교의 주술에 의해 만들어진 신비주의적 좀비였고, 대부분은 인종차별과 연관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좀비의 컨셉과 원형, 즉 물면 전염이 되고, 느리게 걸어 다니며 사람을 먹는 좀비를 만들어 낸 것은 68년에 조지 로메로가 만든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좀비 텍스트를 창조한 결정적인 동력이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 영화 <지상 최후의 사나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정수는 괴물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즉 타자에 대해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명확히 꿰뚫는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역시 그렇게 뛰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괴물,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언제 어디서든 뒤집힐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인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닐 때 무엇이 정상이 되는 것인가. 저들이 절대적인 다수고, 내가 말 그대로 ‘지상 최후의 일인’이라면 내가 괴물이 되는 것이다. 로메로의 비전 역시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꾸준히 이어지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같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좀비의 존재 자체보다는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이야기의 정수가 있다. 특히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흑은 벤이 민병대에 의해 좀비로 오인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부분이 중요하다. 당시 사회에서 흑인은 여전히 이방인이며 타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좀비와 다를 것이 없다. 어찌 보면 굉장히 블랙코미디 같은 설정이다.

이번 시네바캉스에서도 90년에 톰 새비니가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상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왔고, 로메로가 상당부분을 함께 만들었으니 보시면 좋겠다. 이 리메이크판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에 좀비 영화들이 굉장히 각광받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영웅 같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 스튜어트 고든, 샘 레이미, 피터 잭슨, 잭 스나이더 같은 감독들은, 어찌 보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 없이는 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반지의 제왕>을 못 봤을 수도 있다는 건 약간 무시무시한 일이다. (웃음)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불우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감독들에게 이 텍스트들이 좋은 학습효과를 주었다는 점, 그래서 좀비 영화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보는 안보든, 싫어하든 좋아하든 영향을 끼쳐 왔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또한 좀비 영화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지속적으로 걸출한 작품들이 나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 대니 보일의 <28일 후>도 꼽을 수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좀비들이 뛰어다닌다. 아,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원래 인터뷰도 잘 안 하는 로메로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비추고 말았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대체 왜 좀비가 뛰는지 알 수가 없다, 좀비는 이미 죽은 시체라 뛰면 당연히 관절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오타쿠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웃음) 아무튼 이렇게 좀비 영화의 계보 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 실험적이고 멋진 영화들은 좀비 영화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들, 즉 괴물과 타자에 대한 태도라는 문제를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는 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영화를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들 수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이웃집 좀비>의 후반부 에피소드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다가 마침내 개발된 백신으로 정상화 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과거에 좀비였던 사람들도 백신을 맞고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얼굴이 약간 썩어있다거나 비뚤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전에 국회의원이고 변호사였던 사람도 일용직 노동자가 되고, 그마저도 고용인이 그가 좀비였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그대로 해고된다. 왜냐하면 좀비였으니까, 괴물이었으니까. 이는 노골적으로 우리가 이주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1: 오늘 강연의 주제가 ‘좀비의 정치학’인데, 인터넷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좌빨 좀비’ 등의 좀비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허지웅: 집단은 분명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목소리만 강성하게 들려오는 경우 좀비 영화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분명히 있다. 그걸 좌빨 좀비, 수구 좀비, 뭐라고 부르든 아예 맥락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커다란 광풍이 몰아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타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하나는 선의를 투영할 수 있는 우상으로서의 구루와 같은 아이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공포와 부조리를 덮어씌울 수 있는 괴물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이 이번 정권 들어 여러 가지 상황이나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2: 괴물이나 타자를 대하는 선택지에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우르려는 쪽을 선택하는 영화들도 있는지 궁금하다.

허지웅: 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이웃집 좀비>처럼 영화 속에서 좀비가 취급되는 방식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취급하는 방식과 명백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저들이 괴물이냐, 아니면 저들을 괴물로 다루는 우리가 괴물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영화들이 있다. 또는 아예 직접적으로 이야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는 좀비가 된 친구를 쇠사슬로 감아 같이 살지 않나. 또 한국에 <리빙 데드3>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브라이언 유즈나의 영화가 아마 방금 질문하신 의도와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한다. 좀비가 되어가는 여자와 그의 연인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피해 함께 도망 다니다 끝내 용광로에 함께 몸을 던지는 내용이다. 좋은 영화니 꼭 보셨으면 좋겠다.

 

정리: 박예하(관객 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