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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시네토크] 전후 일본 점령기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

<카와치 카르멘> 상영 후 황미요조 프로그래머와의 시네토크 지상중계

 

닛카츠 창립 100주년 기념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한창이던 지난 9월 23일, <카와치 카르멘> 상영 후 황미요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날의 강연은 세이준 영화 중 상대적으로 많이 이야기되지 못했던 <카와치 카르멘>을 일본의 역사와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황미요조(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말씀드릴 많은 부분은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의 사이토 아야코 선생님과의 토론과 <점령과 기억(Occupation and Memory)>이란 글에서 많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카와치 카르멘>은 스즈키 세이준의 육체 3부작 중 한 편이다. 일본에서는 스즈키 세이준의 전후 여성 3부작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 3부작 중 두 편, <육체의 문>(1964)과 <카와치 카르멘>(1966)이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이 되고 나머지 한 작품은 예전에 <위안부 이야기>(1965, 일본어 원제는 <춘부전(春婦傳)>)라는 제목으로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이 세 작품을 가리켜서 스즈키 세이준의 전후 여성 3부작이라고 하고, 여성의 신체를 전면적으로 내세운다는 의미에서 육체 3부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육체 3부작이라고 하면 전후 일본 문화사에서 같이 이해하면 좀 더 좋을 문화적 사조가 있다. 스즈키 세이준의 육체 3부작 중 <카와치 카르멘>을 제외한 나머지 두 작품의 원작자는 다무라 다이지로라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 『육체의 문』과 『춘부전』는 이미 40년대, 5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고 스즈키 세이준이 리메이크를 한 것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은 일본의 전후 점령기, 즉 일본이 패전 이후 미군의 지배 아래 있었던 시기에 나온 소설들이다. 우리가 2012년에 육체 3부작을 본다는 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진 시기와 지금 현재가 매개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전후 점령기라 말하는 시기까지 연결되어 총 세 개의 시대가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스즈키 세이준은 쇼치쿠에서 자신의 감독 경력을 제일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쇼치쿠에서 감독 데뷔를 하지는 못했고 닛카츠에서 감독으로 데뷔한다. 스즈키 세이준이 항상 강조를 하는 것이, 세이준은 자신을 진지한 감독 내지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감독으로 얘기되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비평가들의 입장에선 작가를 사회적 텍스트에 맥락화시키는 걸 어렵게 만들고 있기는 하다. 어쨌든 세이준은 닛카츠의 철저한 고용 감독이었고 그 중에서도 기획은 거의 관여할 수 없었던 2군 감독이었다. 따라서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60년대 중반에 스즈키 세이준이 다시 리메이크한 것에 대해서 제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전후 점령기 일본에서는 이른바 육체 문학 담론이라는 게 있었다. 그 안에서 다무라 다이지로가 가장 유명한 소설가였고 그 당시에 그의 소설들은 히트를 했다. 한편으론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의 점령기 영화를 보면 젠더적으로 매우 재미있고 이후에 흥미로운 변화들이 나타난다. 그 시기의 많은 영화들이 민간과 군으로부터 동시에 검열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영화 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군국주의와 철저히 결별하고 새로운 민주화 프로파간다의 매개체가 됐어야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우리 청춘 후회 없다>(1946)는 사회주의 사상 비슷한 것 같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중 대표적인 프로파간다 영화로, 미군 전개 하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자유주의라는 통제 하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 당시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오소네가의 아침>(1946) 등 굉장히 유명했던 영화들이 많다. 어떻게 보면 이건 철저한 모순인데, 전쟁 전과 후 영화사, 작가, 배우가 다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시기에는 굳건하게 군국주의를 옹호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미군정 검열 하에서는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재밌는 현상이 많겠지만 그중에서 젠더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전쟁 시기 여성의 신체는 국가의 신체이고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이고 통제되는 신체로 보여졌다면, 전후 점령기의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신체가 여성들에게 부여된다. 그건 마치 페미니즘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청춘 후회 없다>에서 하라 세츠코는 활발하고 남자들이랑 같이 담배도 피우고, 남자친구가 반정부 운동하는 걸 이어 받아서 같이 운동도 한다. 그런 활발한 역할들을 여성이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남성들은 그 안에서 이전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 혹은 지위 하락을 겪으면서 남성성이 거세되고 반대로 여성들이 굉장히 발랄하게 묘사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미조구치 겐지와 다나카 기누요의 <여성의 승리>(1946)라는 여성의 참정권과 관련된 영화가 있다.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것도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자유주의로 나가면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주체로 여성이 등장하는 게 미군 점령기에 대거 등장하게 된다. 잡지도 영화도 이런 여성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이러한 ‘해방’이 정치와 관련해서 사상적 자유주의, 민주주의 보다 점차적으로 섹슈얼리티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에로그로(에로틱+그로테스크) 영화들이 대거 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여성의 신체들은 전시가 되고, <육체의 문>처럼 성매매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성매매를 하고 있지만 거세되고 주눅들어있는 남성들보다 훨씬 생명력 있고 당당한 여성들이 점차 섹슈얼리티와 결합되는 방식으로 특히나 영화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다무라 다이지로가 주축이 된 ‘육체의 문학’이라는 사조가 나오게 된다. <육체의 문>은 성매매 공동체의 주요 고객인 미군들, 패전병이 된 일본 남성이라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위안부 이야기>에서 노가와 유미코는 군 위안부로 나오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군인이 부대 안에서 군위안부와 사랑을 하고 도망가는 걸 망설이자 전쟁이 뭐고 나라가 뭐냐며 굉장히 비웃는다. 이렇게 남자가 국가에 얽매여 있는 존재로 나온다면 여성들은 강한 생명력이 있으며 특히 그 생명력이 현시되는 방식은 그녀들의 육체를 전면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다무라 다이지로가 말하길, 이전에 군국주의 시대의 육체가 경건하고 통제받는 육체였다면 자신의 소설에서는 육체 자체가 시대이며 거기서 찢겨지고 더럽혀지고 타락하는 몸을 보여주는 것이 육체 문학이라고 한다. 거기서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가 <육체의 문>과 <새벽의 탈주>(1950년에 『춘부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스즈키 세이준의 <육체의 문>과 <위안부 이야기>는 그 작품들의 리메이크다. 그리고 <카와치 카르멘>은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시기의 육체문학이나 점령기 여성의 신체 재현을 보여주는 많은 부분에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카르멘’이 나오는 영화가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카르멘 시리즈이다. 기노시타 게이스케도 스즈키 세이준처럼 작가성이 매우 뚜렷한 감독이다. 그과 공통점이 있다면 기노시타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1951)와 <카르멘의 순정>(1952)도 기노시타의 작가성과는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카르멘 시리즈가 육체문학, 점령기 이후 여성 재현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카르멘 시리즈에서 여성들이 희화화되는 측면에서 여성 혐오적인 기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점령기 이후에 여성의 신체가 새로운 자유주의(미국화)를 대표하는 주요한 장소가 되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제로 삼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즉 전후 점령기에 일본에서 여성의 재현이 어떻게 되고 있냐고 할 때 중요한 작품이다. 그렇게 스즈키 세이준의 여성 3부작을 볼 때 점령기의 육체문학이라는 담론과 기노시타의 카르멘 시리즈를 이어붙이는 게 정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세이준의 후기작 중에 <피스톨 오페라>(2001)라는 작품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국기를 너무 좋아하는 패션모델이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라는 영화를 본 뒤에는 국기가 악몽이 되어 꿈에 나타난다고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커트되면 다른 사람이 자기 꿈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꿈에서 미시마 유키오 머리가 잘라져 있는데 아무리 목을 실로 기우려고 해도 기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역사에서 군국주의를 철저하게 반성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군국주의적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이 패전 후 어떻게 근대국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죽었다. 그랬을 때 <카와치 카르멘>은 점령기의 남성 주체성과 여성 주체성에 대한 영화이면서 기노시타의 카르멘 시리즈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볼 때 작가가 그걸 의도했는지 확답을 얻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이준이 <피스톨 오페라>를 통해 군국주의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기노시타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를 얘기하는 건 흥미로운 비평적 지점이 되는 것이다.

 

 

<카와치 카르멘>에서 쓰유코의 공포, 트라우마적인 원형은 힘이 없는 아버지라는 게 굉장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엄마와 동네 스님과의 관계를 아버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돈 많은 사장이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옆에서 춘화를 넘겨주던 사람의 얼굴은 쓰유코의 엄마 얼굴이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하는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세이준적인, 연극적이고 인공적인 세트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스즈키 세이준의 스타일을 분석할만한 대표작은 아니다. 오히려 산등성이를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이 세이준치고는 좀 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산등성이를 보여주고 활발하게 자전거를 타는 주인공은 곧 카바레에 가 있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첫 장면은 기노시타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와도 비슷하고 40, 50년대의 사상영화, 미군정 아래 만들어졌던 발랄한 여성들 나오는 영화들과 유사하게 연출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문학에서의 여성성의 전형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카와치 카르멘>에서도 여성 주체의 트라우마적인 원흉은 힘없는 아버지라고 설정이 되어 있지만, 육체문학이나 에로그로 영화들에서 보여주던, 무기력하고 패배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남성들의 상처를 받아주면서 생명력도 있는 여성 주체하고는 딱 떨어져 맞지가 않는다. 권력들 자체가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구성이 되어 있는 편이다. 세이지라는 아방가르드 화가와의 우정, 권력 있는 레즈비언 디자이너가 그렇다. <카와치 카르멘>의 소설 원작에서 세이지라는 사람은 전위 미술화가가 아니라 디자이너로 설정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 전체로 보면 디자이너로 보는 게 훨씬 설득력 있다. 영화에서 세이지와의 우정은 세이지가 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와치 카르멘>은 육체문학이나 점령기에 나타났던 양공주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것 같지만, 이런 면들을 고려하면 여성의 신체를 내세워서 남성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위 하락을 한탄하고 있는 여성 재현과는 좀 다르게 가고 있다.

 

그리고 <카와치 카르멘>에 또 다른 면이 있다고 하면 아버지를 무력화시키는 주체가 외세로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좀 더 향토적, 근본적,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의 종교 주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세이준은 지식인적인 논평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준은 에세이를 꽤 많이 썼다. 세이준은 비평 자체를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엘리트주의적인 비평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자신의 영화중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영화가 <위안부 이야기>나 <카와치 카르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간접적인 방식이나마 50년대에 비판받았던 에로그로 시네마, 육체문학에서 나타나는 과잉을 옹호한 적이 있다. 전후 일본 지식인들은 말 그대로 미시마 유키오의 관점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하는데 그 근저에는 패배감이 깔려 있었다. 그 시기 일본에서 전통 철학과 근대화를 연결시키는 논의도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보단 전쟁과 함께 세계를 만나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서구 국가를 극복하고 1등 근대국가가 될지 고민하다가 나온 생각들이다. 결국 패전을 하고 나서는 그것에 대한 정념과 패배감과 반성, 이런 여러 가지 모순된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 미군 점령기가 시작되고 일본 대 서구/미국, 패전국 대 서구 근대국가 구도로 설정했던 틀이 지식인의 프레임이라면, <카와치 카르멘>에서는 그 프레임이 살짝 변했다. 트라우마의 원형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는 아버지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외세로 가지 않는다. 미국화는 적대와 매혹을 동시에 수반하고 매혹으로 여성 주체를 내세우면서 그 뒤에 지식인은 숨어버린다. 그런 큰 프레임에서 보면 <카와치 카르멘>은 일본 역사 안에서 조금 더 근본적인 고찰로 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측면이 있다. 이 영화 안에서 권력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일원화될 수 없다. 거기서 여성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이준은 지식인적인 논평을 하고 싶지 않아했는데 <피스톨 오페라>를 보면 스타일 면에서 과격한 방식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전후부터 60, 70년대까지 사상을 끊임없이 가져 온다. <피스톨 오페라>는 스스로 전후 일본영화에서의 남성성을 다시 논평하고 재구성하는 영화이고 <카와치 카르멘>에서도 그런 과정을 좀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단순히 작가로서가 아니라 전후 일본영화 안에서의 남성주체, 혹은 영화작가로서의 젠더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카와치 카르멘>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