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스즈키 세이준은 결코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나 시노다 마사히로 같은 동세대 일본 감독들이 이른바 '쇼치쿠 누벨바그'라는 이름으로 영화사의 한 장을 채워가고 있을 때, 그는 동시상영용 B급 영화를 만드는 그렇고 그런 액션 감독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오랜 세월,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이름은 스튜디오에서 퇴출당한 비운의 감독이라는 꼬리표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희귀한 스타일로 영화광들의 전설로 전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2001년, 마치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처럼 그는 8년만의 신작 <피스톨 오페라>를 들고 베니스 영화제에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열렸던 두 차례의 회고전에는 젊은 관객들이 몰려들어 환호성을 울려댔다. 한때 미국 독립영화의 정신이었던 짐 자무쉬 역시 <고스트 독>에서 동양의 노장 감독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2002년 2월, 한국에서도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스즈키 세이준과 조우했다.

그렇다면 1967년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이후 영화계에서 멀어졌던 그에게 쏟아지는 이 때 아닌 관심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의 관객들에게 제 영화가 소개된다니 너무 얼떨떨해서 마치 어둠 속에서 볼을 꼬집힌 기분입니다”라는 다소 황망한 감독의 말처럼 이는 혹시 시대착오적인 유행에 편승한 일회성 해프닝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영화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30년이라는 간극과 국경을 단숨에 뛰어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왕가위와 오우삼과 짐 자무쉬,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열렬한 숭배를 바치고 인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감독 스즈키 세이준, 이제 그의 수상한 영화세계를 직접 만나보도록 하자. 분명한 점은 이 모든 것이 결코 너무 늦은 만남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동시상영용 B급 감독의 비극과 영광

60년을 기점으로 정점을 이룬 일본영화계에는 독특한 장르의 영화가 존재했다. 일류감독과 스타들이 만든 일급 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프로그램 픽처, 즉 동시상영용 B급 영화가 그것이었다. 당시 한 해 500편이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작편수 중 99%를 채웠던 이 동시상영 영화들은 스튜디오에서 정해주는 시나리오와 스타, 제한된 제작비로 1달에 한편씩 후다닥 찍어내야 했던 맞춤 생산영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들은 도제 제도에서 오랜 수련기간을 거쳐야 했던 젊은 감독들에게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들은 상대적으로 스튜디오의 간섭이 적었던 이 영화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들을 감행할 수 있었다.

스즈키 세이준 역시 대표적인 동시상영용 영화 감독이었다. 1923년 동경에서 출생한 그는 48년 쇼치쿠 영화사의 계열 스튜디오에 입사한 것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54년, 오랜 침묵 끝에 새롭게 출격한 닛카츠로 적을 옮기게 된다. 감독 자신은 '단지 닛카츠가 월급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대답을 하고 있지만 여하튼 그는 닛카츠로 옮긴 2년 만에 입봉하게 된다. 쇼치쿠나 도호 같은 다른 스튜디오에 비해 인력이 모자랐던 닛카츠는 신인 감독과 배우를 발굴하는 것으로 당시의 가공할 제작편수를 채우려 했으며 스즈키 세이준 역시 그 수혜자가 됐던 셈이다. 이후 비운의 67년까지 근 10년 동안 40편의 영화들을 말 그대로 마구마구 쏟아냈으니, 아무리 스튜디오 소속의 맞춤 생산용 장인감독이라 해도 만드는 이가 먼저 지루해질 만도 하다. 이런 현실에서 스즈키 세이준이 선택한 승부수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영화지만 어느 순간 졸던 관객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바라볼 만한 순간들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떤 영화든 반드시 한, 두 장면은 놀랄만한 명장면을 선사한다는 그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서구 관객과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 <간토 방랑자>의 무너지는 하얀 벽과 순간 온통 붉게 물드는 배경, 뜬금없이 허공으로 총을 던지며 악당을 일망타진하는 <동경방랑자>의 라스트 신, ‘넘버1은 나다!’를 외치다 결국 총에 맞아 링 밖으로 떨어져 죽는 <살인의 낙인>의 넘버3 킬러 하네다의 모습, 손가락에 공력을 실어 총알처럼 콩알을 날려대는 <겐카 엘레지>의 놀라운 장면 등 어느 순간 가공할 에너지가 폭발하듯 배어 나오고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들이 넘실댄다. 여느 영화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그의 영화에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던 60년대 일본의 젊은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그는 점점 자신만의 색채를 더하고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해 갔다. 하지만 닛카츠 측에서는 주어진 시나리오를 슬쩍슬쩍 고쳐가며 시키는 대로는 절대 하지 않는 이 골치 덩어리 감독을 곱게 봤을 리 만무했다. 1967년 ‘넘버 3’ 킬러 하네다와 ‘넘버 1’ 킬러간의 이상한 순위쟁탈전을 다룬 <살인의 낙인>이 완성되자 스튜디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며 드디어 그를 해고하게 된다. 조직과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방랑하는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후 TV 연기와 CF 연출로 영화 밖 세상을 유랑하는 동안 정작 그의 분신들은 영화광들의 열렬한 숭배 목록에 올라 있었으니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어떤 점이 영화광들의 마음을 그토록 울렁거리게 하고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유효하게 하는 것일까?

 

충돌과 유희, 그 놀라운 쾌감

스즈키 세이준은 쇼치쿠 누벨바그 같은 동세대 문제적 감독들처럼 영화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부조리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철학적 성찰 같은 것을 담지도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꽉 짜인 플롯이나 세상사에 달관한 것 같은 거창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사람 목숨쯤은 파리처럼 여기는 냉혈 킬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통에 얼굴을 비벼대며 황홀경에 젖는 영화에서(살인의 낙인), 거실 창을 열면 갑자기 노란 흙먼지가 몰아치는 황망한 들판이 펼쳐지는 영화에서(야수의 청춘), 결전을 앞둔 야쿠자가 하얀 눈발이 날리는 촌스런 세트에서 ‘나는 고독한 방랑자…’ 어쩌구 저쩌구하는 엔카풍의 노래를 불러대는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동경방랑자), 도대체 그 누가 철학을 논하고 논리를 따지겠는가(심지어 스즈키 세이준은 <동경방랑자>의 마지막 장면에 초록색 달까지 등장시키려 했단다. 물론 하얗게 질린 스튜디오측은 '도대체 초록색 달이 말이 되냐'며 소리를 질렀고 이 장면은 그저 감독의 상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그의 매력은 전통과 장르, 영화와 연극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유의 양식화된 살인 장면과 현란한 색채 감각으로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이름을 주목받게 한 <야수의 청춘>(1963)이나 <간토 방랑자>(1963) <문신일대>(1965) 등에서 마치 연극의 라이트처럼 인물을 쫓아가는 조명, 연극조로 무뚝뚝하게 읊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그의 영화는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인 매체들이 서로 충돌하며 존재한다. 여기에 전통극인 ‘가부키’를 야쿠자 영화라는 장르 안으로 끌어온 싸움 장면 등은 그의 영화에 특별한 힘을 실어주었다. 스스로를 ‘예술가’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불렀으며 ‘영화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말처럼 그의 영화들은 그 자체가 영화적 유희였으며 순수한 영화적 경험이었던 것이다.

1966년 작인 <동경방랑자>와 <겐카 엘레지>, 그리고 <살인의 낙인>(1967)에 이르면 그의 영화적 유희와 과잉, 그리고 충돌은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로서는 드물게 파시즘에 대한 풍자를 전면에 내세운 <겐카 엘레지>는 제목 그대로 '싸움의 엘레지, 폭력의 엘레지'라 할 만다. 전쟁 발발 직전의 3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소년들은 공부대신 패싸움에 열중한다. 청순한 옆집 소녀에 대한 연정으로 가득 차 있는 주인공 소년은 주체할 수 없는 혈기를 잠재우기 위해 구국의 염을 다지고 내공으로 촛불을 끄는 수련에 힘쓰기도 하며 상대파 소년들과 잔악무도한 자작무기를 휘두르며 막가파식 싸움에 빠져든다. 이러한 설정은 사실 최고가 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일본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학원 안으로 가져온 것에 다름 아니다. <겐카 엘레지>는 이러한 장르간의 충돌을 이미 60년대에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의 영화들이 신선한 충격, 영화적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감독들이 사랑한 감독, 스즈키 세이준

영화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감독들의 명단을 살펴보노라면 평론가나 관객이 좋아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유독 같은 감독들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는 감독들이 있다. 스즈키 세이준 역시 그를 발굴하고 아낌없는 헌사를 바쳤던 이들은 평론가보다는 젊은 영화광, 특히 영화광 출신의 젊은 감독들이 많았다. 하수구로 총을 발사하는 <살인의 낙인>의 기상천외한 살인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온 짐 자무쉬의 <고스트 독>은 물론, 고독한 두 남자가 마주한 채, 마취도 없이 상대의 팔에서 총알을 빼는 <동경방랑자>의 장면은 반영웅의 표상 주윤발과 이수현이 함께 하던 오우삼의 <첩혈쌍웅>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시시껄렁한 폼으로 일렬로 걸어오는 야쿠자들의 모습에서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승리에의 염원이 적힌 일장기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패잔병에게서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떠올리는 창녀, 문득 패잔병과 군복을 입은 오빠의 모습이 겹쳐지는 <육체의 문>의 장면들을 보는 순간 피터 그리너웨이가 <필로우 북>에서 시도했던 파격적인 영상 실험들은 돌연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B급 액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자랑해온 박찬욱 감독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신봉자이다(왜 아니겠는가!).

67년 이후 사실상 영화계를 떠났던 스즈키 세이준은 10년도 더 지난 80년에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찍었으며 81년에는 <아지랑이좌>를, 그리고 10년 후인 91년에는 <유메지>를 제작함으로써 이른바 '다이쇼 3부작'을 완성했다. 사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영화밖에 있었던 감독이 신작을 찍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영화를 발굴하고 전파했던 수많은 영화광들과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미적인 미학과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다이쇼 3부작'을 만나는 것은 과거 닛카츠 시대의 스즈키 세이준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일견 당황스런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과거, 치고받는 폭력과 넘나드는 장르의 충돌이 우아하게 정제되고 완성된 것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그의 영화는 과잉된 이미지들로 충만하며 영화 자체에 대한 유희정신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작 <피스톨 오페라>를 통해 자신의 최고작이자 오랜 세월 영화계에서 퇴출시킨 장본인 <살인의 낙인>을 재창조하고 있는 스즈키 세이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의 영화를 통해 순수한 영화적 유희정신이 꿈틀대는 그 흔적들을 직접 감지하고 즐기는 것뿐이리라.

 

글/모은영(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프로그래머)

 

*이 글은 2002년 '키노'에 실렸던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일부 수정해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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