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 - 김홍준 감독이 말하는 <바보들의 행진>

2013. 4. 14. 13:47특별전/한국영화특별전-영원한 젊음, 화천시대

시네토크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 김홍준 감독이 말하는 <바보들의 행진>



지난 4월 7일,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상영 후 김홍준 감독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날 시네토크 시간에는 특별히 김홍준 감독의 비디오 에세이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2003)도 함께 상영됐다. 검열로 인해 잘려나간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길종 감독과 <바보들의 행진>이 시도했던 저항의 몸짓들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김홍준(영화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먼저 <바보들의 행진>(1975)와 관련해서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1955년생으로, 영화가 나왔던 1975년에 대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유신정권이 긴급조치를 내려지면서 3월 초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그 바람에 거의 한 학기동안 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봤던 영화가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타겟 관객층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없어진 국도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 느낌은 좀 이상했다. 분명 나와 같은 대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대학생들의 모습이 기분이 나쁠 정도로 희화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영화의 원작자였던 최인호 작가의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당시 최인호 작가가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감수성인 반면, 하길종 감독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최인호 작가의 원래 생각과 영화를 만든 하길종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불균질하게 섞여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며, 두 가지 모두 한 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엔 틀림없는 것 같다. 그 당시에 나는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봤고, 앞으로 영화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 없는 대학생 중 한 명 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하게 됐고, 살아오는 과정에서 몇 번인가 이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굉장히 뜻 깊게 부딪혔던 기억이 있다.


지금 보여드릴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는 2003년에 만든 비디오 에세이다. 다큐멘터리라고도, 극영화라고도, 부를 수 없어서 비디오 에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비디오 에세이 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다. 그 때 나는 <장미빛 인생>(1994), <정글 스토리>(1996)의 두 편의 장편 상업영화를 만들어 충무로 감독이 되었지만 그 후 이런저런 이유로 세 번째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제, 학교 등 바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영화라는 것이 꼭 35mm 필름으로 장편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서 개봉을 해야만 영화가 아니라, 이제 누구라도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고 편집해서 틀면 그것이 영화 아니겠느냐, 글을 쓰듯이 무엇이든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정작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문득 나부터 실천에 옮겨보자는 생각으로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것,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들었던 것이 <My 충무로>(2002)인데, 유년시절의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비디오 에세이를 짤막하게 만들었다. 굉장히 재밌었다. 그 때 장난삼아서 그때 ‘에피소드 1’이라 붙였는데, 2002년에서 2006년 사이에 에피소드 9까지 찍고 일단 멈췄다. 지금 보실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는두 번째 에피소드다.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기억,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그 당시 한국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것이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기록의 의미와 기록에 대한 정서·감정, 이런 것들이 버무려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봐주셨으면 한다.


이 영화는 ‘복원판’이라고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형편이 좀 복잡하다. 하길종 감독은 1941년생으로 4·19세대에 속하는 분이다. 그 전 세대는 사실 일본어가 거의 모국어였고 해방 후에 오히려 한국어를 배우느라 고생했던 세대였다. 그에 반해 4·19세대는 해방기에 유년기를 시작해서 우리말로 교육을 받고 우리말로 생각하고 글을 쓴 첫 번째 세대였다. 근현대에 들어서 한국어로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기 위한 최초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오셨는데, 학교 다닐 때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이 문학평론가 김현, 소설가 김승옥, 시인 김지하 같은 분들이었다. 하길종 감독은 학교 다닐 때는 영화가 아니라 문학을 지향했었기 때문에 자비로 시집을 냈었다. 이후 프랑스를 거쳐서 미국으로 가서 최종적으로는 UCLA MFA과정에 등록한 유학생이 되었다. 아마도 한국 출신으로 미국에 가서 대학원 최종과정인 MFA과정에서 영화 실기로 학위를 딴 최초의 사례였던 걸로 안다. 외국 유학해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분이 귀국한다고 하니까, 한국 영화계와 언론에선 막 띄웠는데 그것이 하길종 감독에게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분이 교분을 나눴던 김지하 시인은 긴급조치 하에서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하길종 감독도 중앙정보부의 사찰 대상이 되었고,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것 자체로 굉장히 경계를 요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하길종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이 <화분>(1971)이었다.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의 표절이 아니냐는 얘기부터 미국 실험영화 느낌이 너무 많이 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하길종 감독은 이때부터 굉장히 속된 말로 찍히기 시작했다. <화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전혀 없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악당 부르주아의 집이 ‘푸른 집’이었다.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설정을 했는지 모르겠지만(웃음),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가 있었는데 이 영화가 나오고 나니 중앙정보부의 담당관은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두 번째로 <수절>(1973)은 고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었는데, 이 영화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하길종 감독은 영화 뿐 아니라 「뿌리 깊은 나무」같은 잡지에 영화평을 기고하기도 했었다. 반골 기질이 굉장히 강한 분이었다. 당시는 한국영화가 하이틴 영화나 호스티스 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였다. 예외적으로 대학생들이 어디 가서 그 영화 봤다고 해도 창피하지 않을 만한 영화들을 만드는 얼마 되지 않은 회사 중의 한 곳이 바로 화천공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평을 썼는데 굉장히 위태위태한 발언들을 많이 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인권상황들을 빗대어서 외국 영화를 소개하곤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점에서 눈 밖에 난 상태였고, 게다가 두 편의 영화를 실패했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절박한 상황에 몰려있었다. 그러던 때에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최인호 작가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별들의 고향』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것이 화천공사에서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그 당시까지의 모든 흥행 기록을 깼다. 최인호 작가는 그렇게 일약 스타가 되어 작가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을 하면서 전방위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츠 신문에 연재했던 에피소드 중심의 콩트 연재물『바보들의 행진』의 판권을 구입한 화천공사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하길종 감독에게 맡기게 된다. 처음에는 하길종 감독이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들었다. 자신은 좀 더 진지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하고 싶은데, ‘애들 영화’를 찍으라고 하니까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영화를 찍기로 하고, 그때부터 대학가를 다니면서 말하자면 필드워크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청바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주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퍼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통기타 클럽들에서 많은 대학생들을 접하면서 하길종 감독의 생각이 달라졌다. <바보들의 행진>과 통하는 외국 영화가 있다면 <이지라이더>(1969) 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청년들의 기류와 문화를 기존의 영화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재로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당시 청년들의 감수성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하길종 감독은 원작자인 최인호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토대로 실제 대학생들의 공간을 섭외해서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검열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가 문제가 되었다. 우선 두 시퀀스가 통째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이 필름에서는 두 시퀀스가 완전히 빠져있다. 검열에서 삭제 명령이 떨어지자 네가티브 필름에서 잘라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남아있는 네가티브가 만신창이다. 잘려나간 시퀀스 중 하나는 영철이 통행금지에 걸려 유치장에 들어가고, 여자들이 담배를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환기통을 통해 영철이 여자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여자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한 시퀀스에선 영철과 병태가 갑자기 부산에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굴들에 상처가 나있다. 당시 스탭들의 증언에 의하면, 병태와 영철이 부산의 술집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단체로 기생관광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고 의협심으로 덤벼들다가 엄청 맞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정권이 묵인했던 사업 중의 하나가 소위 기생관광 이었다. 그런 국가 시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그 장면도 잘라냈다는 것이다. 이 두 시퀀스는 네가티브가 없다.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실 부산 장면 바로 전에, ‘한국적 스트리킹’이라는 말을 하는 장면도 문제가 되었을 장면이었다. 당시 유신 정권이 독재를 하면서 내세웠던 슬로건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적 스트리킹’이라는 말을 들은 그 당시 관객들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당시 검열에서 잘라 낸 네가티브들은 중앙정보부가 가져가 보관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거란 희망도 있다. 반면 나머지 잘린 장면들, 김상배의 <날이 갈수록>이 흐르면서 이어지는 몽타주 시퀀스에서의 커트들은 영화사에서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서, 1980년에는 하길종 감독의 1주기가 되자 압수당하지 않고 영화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커트들을 다시 붙여 필름으로 떠서 복원판이 상영되었다. 당시 극장에서 검열판으로 보았을 때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복원판에는, 당시 긴급조치로 인한 휴교령과 관련된 부분들이 들어 있다. 당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향락적인 대중문화로서의 청년문화라는 것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서 짓눌려 있는 것들이 트라우마로 있었다. 1980년에 이 영화의 복원판을 처음 봤을 때, 그 시대를 겪어봤던 한 사람으로서, 영화 속 “들립니까, 들립니까”라는 표현에서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들의 행진을 위하여>를 만들게 되었다.



1980년에 상영된 복원판을 보면 영화 중간에 무지 화면들이 들어있다. 당시엔 오리지날 네가티브를 가지고 직접 편집했기 때문에 커트들을 양쪽에 두 프레임씩 놓고 이어붙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잘라버리면 두 프레임이 날아가게 되고 다시 붙이더라도 중간에 자꾸 무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운드 네가티브는 잘라내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길이가 보전되어 있다. 검열 때 어디가 잘렸는지 남아있는 네가티브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완전판은 남아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복원한 것만 남아있다. 자르고 다시 붙이는 장면에서 앞뒤로 몇 프레임씩 달아났기 때문에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복원판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최인호 작가의 시나리오 선집을 통해 바보들의 행진의 원래 시나리오를 접했다. 풍속도적인 측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거의 그대로이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시나리오와 차이가 좀 있다. 후반부는 완전히 하길종 감독의 새로운 창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영화 중에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나의 청춘의 일부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금지곡이 된 <고래사냥>, 당시 학생이었던 김상배를 픽업해 송창식 씨가 부른 버전으로 들어있는 <날이 갈수록>, 장발 단속에 걸리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왜 불러>같은 노래들이 있다. <왜 불러>는 이미 발표되었던 곡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기존의 음악을 가져다 전혀 다른 맥락에 쓰면서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식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충격이 컸다. 그리고 <새는>이라는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영화에서 영철과 병태가 뛰어가다가 노래가 고조되면 줌 아웃 하면서 굉장히 넓은 공간이 나온다. 지금은 공원이 된 여의도인데, 당시에는 5·16 광장이었다. 5·16 광장은 국군의 날 퍼레이드나 선거 유세 때 주로 쓰였던 곳이다. 그런 5·16 광장을 두 장발 청년이 뛰어오는 장면에서 <새는>이라는 노래가 흐르는 것은,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촌스럽게 보이겠지만, 70년대의 검열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당시 체제에 대해서 저항하는, 상업영화에서의 몸짓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고, 그다지 큰 사회의식이 있지 않았던 나에게도 뭔가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었다. 



정리ㅣ 관객에디터 장지혜 

사진ㅣ 곽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