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영화를 파괴하고자 했다 -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2013. 4. 12. 15:40특별전/한국영화특별전-영원한 젊음, 화천시대

시네토크 

"영화를 파괴하고자 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지난 4월 6일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3) 상영 후 이장호 감독과의 시네 토크가 이어졌다. 이장호 감독은 군사정권 아래서 저항과 반항 의식으로 영화를 망치고자 했던 시도들이 오히려 영화의 독특함을 만들어냈다고 회고한다.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한국영화특별전 - 영원한 젊음, 화천시대”는 영화사 ‘화천공사’의 작품들을 회고하고 기억하는 프로그램이다. 감독님은 <바보선언>(1983) 이전에 화천공사에서 데뷔를 하셨다. 먼저 화천공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이장호(영화감독): 화천공사는 하길종 감독과 사돈인 사람이 경영하던 회사였다. 하길종 감독의 동생이고,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하명중 감독의 부인이 화천공사 사장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워낙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소설『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여러 영화사에서 영화화를 제의했었다. 그러다 하길종 감독의 추천으로 화천공사 사장을 만나 이야기 하게 됐다. 얘기를 나누면서 이상하게 친근감이 생겼고, 동세대적 감각을 느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화천공사에서 여러 작품을 하게 되었다.



조영각: <별들의 고향>(1974)을 만드셨을 때가 29살이셨고, 국도극장에서 단관으로 개봉해 47만 명 관객을 동원했다. 한 관에서 그 정도의 관객 동원은 엄청난 기록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이장호: 다 옛날 얘기다.(웃음) <별들의 고향>은 나에게 행운이었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큰 히트를 치고 나니까 오만 같은 잘못된 것이 형성되어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정지를 받았다. 나는 오히려 <별들의 고향>의 행운보다 불행한 얼굴로 온 대마초 사건이 내 인생의 진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일을 계기로 고난과 역경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됐다. 감독 활동을 못하는 동안 동료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면서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5·16 쿠데타 이후에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영화에서 사회지도층의 비리를 그리지 못하게 했고, 가난을 묘사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이전의 멜로영화나 문예물로 도피하게 되었다. 한국영화가 그리는 현실이 따로 있고, 실제 현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한국영화가 리얼리즘을 잃어버렸다고 느꼈고 언젠가 다시 활동을 하게 되면 리얼리즘을 회복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전까지는 영화를 만든다는 의식 없이 감각적으로만 영화를 만들었는데, 쉬는 동안에 차츰 우리 사회나 근대사에 대해 관심 갖고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은 나중에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을 때 제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눈을 갖게 했다.


조영각: 영화의 원래 제목은 ‘바보선언’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장호: <어둠의 자식들>(1981)을 만들면서 원작이 워낙 방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3부작으로 계약 했었다. 당시는 문화공보부에서 시나리오를 사전검열 할 때였는데, 2부의 시나리오가 자꾸 반려되었다. 일단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고, 심지어 원작자 황석영의 이름도 쓸 수 없었다. 그 당시 한국영화를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일 년에 한 편씩 영화를 만들도록 강제했는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너무 답답했다. 그 때 환멸을 느꼈다.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겠다,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엉터리 시나리오를 하나 만든 뒤, 여러 개의 제목을 만들어서 문화공보부에 가져갔다. 우리가 제목을 못 정하겠으니 차라리 제목을 골라달라고 했고, 그 중 검열관이 고른 제목이 ‘바보선언’이었다. 이 전에 하길종 감독이 <바보들의 행진>(1975)이라는 좋은 작품으로 흥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사 입장에서도 그 제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조영각: <바보선언>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파격적이다.

이장호: 영화를 망치려고 했다. 내가 영화를 포기하는 마당에, 모든 조건이 악조건이니 어떻게든 망치자는 생각이었다. 가령 파티 장면을 찍을 때 조감독들이 장소를 어디로 할지 물어오면 깊이 생각안하고 목욕탕에서 하자고 했다. 문득 인물들을 노출시키고 싶다는 게 있었고 그래서 문득 목욕탕을 떠올렸다. 시나리오 없이 매번 현장에서 즉흥 연출을 했다. 그러다가 당시 편집을 하시던 김희수 선생이 아주 독특한 영화가 되고 있으니, 영화를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만들어오라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영화를 완성하게 되었다.


조영각: 영화가 개봉을 하고나선 흥행이 되었다.

이장호: 완성된 뒤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1년 후에 개봉이 됐다. 조감독들이 대학에서 시사회를 여러 번 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는데 개봉은 하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서 어떤 외국영화의 개봉이 취소되어 대신 이 영화를 걸게 되었다. 그때 대학생들이 많이 봤다.

조영각: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어린이의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뭉클해지기도 한다.

이장호: 시나리오 없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다보니 대사나 스토리가 없었다. 내레이션 하는 아이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 아들이었다. 처음엔 내레이션을 넣을 의도는 없었다. 이제 막 한글을 익히던 때였는데, 변성기가 일찍 와서 악을 쓰고 한글을 읽는 걸 보고 영화의 앞뒤로 내레이션을 넣게 되었다. 검열이 심하니까 일부러 아리송하게 만든 거다. 지금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학생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모두 침울하게 머리를 숙이고 나오고 그랬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완성되고서 검열도 무사통과가 되고, 놀랍게도 국가 홍보용 영화가 됐다. 그땐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 검열하는 입장에선 이 영화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태극기가 나오고 ‘우리나라는 행복합니다’라고 하니, 애국적 메시지로 본 것 같다.(웃음)




관객1: 영화가 생각보다 무겁고, 스타일리쉬 해서 놀랐다. 당시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다.

이장호: 나조차도 영화의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고 만들었는데, 나중에 대학생들에게 평가를 받으면서 슬그머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졌다. 그래서 기자들이나 영화평론가들에게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니라 당시 정권이 만든 영화라고 말했다. 저항이나 반항 의식, 그 에너지는 당시 정권이 준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솔직히 밝혔다. 그래서 내가 머리로 의식할 필요 없이 무조건 내가 만들던 것과 역행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영화가 망쳐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독특한 영화가 나왔다. 그 전까지의 영화들이 일종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였는데 그 사회적 리얼리즘이 막힌 것에 대한 분노가 영화에 풍자로 잘 녹아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관객2: 영화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예전 고전 영화들을 오마주 하거나 패러디하신 부분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장호: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영화 검열관이셨다. 그래서 내가 아직 영화에 대한 것을 모를 때 아버지 무릎에서 수많은 흑백영화들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본 수많은 흑백영상들 중에 내 뇌리에 박혀 기억되는 것이 채플린의 움직임이었다. 영화공부를 하고 청년시절에는 채플린을 못 보다가, 신상옥 감독님의 조감독이 되어 홍콩에 6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에 채플린 영화들을 다시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 때 문득 채플린은 영화의 에센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무의식 중에 채플린이나 유명한 코미디언들의 제스쳐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조영각: 이 영화에서 정서는 좀 다르지만 인물이 다리 절거나 과장된 제스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장호: 그 모든 것들이 어떤 고급스런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 영화를 망치려고 했던 것이었다.

조영각: 사운드의 면에서 전자오락실의 소리가 등장하는가 하면,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이 겹치는 등의 사운드의 충돌은 이 영화 이후에도 계속 나타난다.

이장호: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것들이었다. 불경 읽는 소리에 ‘할렐루야’를 겹쳐놓거나, 자동차 소음을 장난감 소리 같은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희화화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영화에 어떤 통일성을 만들어 준 것 같다.

관객3: 이 영화 이후 <천재선언>(1995)이라는 작품을 만드셨지만 평가는 좋지 않았는데, 그 작품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이장호: <바보선언>은 그야말로 내가 영화를 포기하는 모든 에너지가 진지하게 나타났는데, <천재선언>은 그렇지 못했다. <외인구단>(1986) 이후 도태가 되어서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어느 젊은 제작자가 <바보선언> 속편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럼 이번엔 제목을 <천재선언>으로 해보자고 얘기했고, 시나리오를 노골적으로 정치에 두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총구를 정치인에게 돌렸지만 분노가 생기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대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가장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이었다. 심각하게 문제를 느끼고 그 총구를 나에게 돌리다보니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 타겟이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바보선언>을 만들 때의 진지했던 저항의식이 나 스스로에게서 생기질 않았다. 그런 참담한 경험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천재선언>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관객4: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영화를 만들다보니 촬영감독도 힘들었을 것 같다. 촬영감독과 갈등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이장호: 서정민 촬영감독은 과거에 이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뤄서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었다. 이만희 감독 영화의 특징이 움직임이 강한 촬영이었는데, 서정민 촬영감독은 그런 움직임에 관한 것을 아주 잘 표현하는 분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서정민 촬영감독을 찾았고, 이 분과 손발이 잘 맞아서 여러 편 작업을 함께 하게 됐다. 하지만 <바보선언>을 하면서는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해나가는 것 자체가 이 분에게는 굉장한 불만이었다. 드라마가 없는 상황 속에서 뭘 찍는다고 하니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정상적인 액션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여태껏 그런 촬영이 없었기 때문에 촬영감독은 매번 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당시 자의로 영화를 포기한 상태였지만, 이 분에겐 이러다간 타의에 의해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커리어가 끝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었다.

조영각: 마지막으로 지금 준비하고 계신 <시선>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으면 한다.

이장호: <천재선언> 이후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는데, 오랜 시간 묵상하는 동안에 ‘God’s eye view’라는 말에 집중하게 됐다. 영화의 앵글에서 앙각은 ‘worm’s eye view‘, 부감은 ‘bird’s eye view‘, 이런 식으로 저 마다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God’s eye view‘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동안 영화를 찍을 때 감독이 앵글을 만들고 감독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착각했었다. 감독은 어느 누구나 수없이 바뀌는 많은 앵글들을 기계적으로 찍게 되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누구일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선>이라는 제목으로 크리스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를 준비 중이다. 


정리ㅣ 관객에디터 장지혜 

사진ㅣ 김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