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 비평가들에 의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문화적 생산물인 서부극이 타자에 의해 도용되는 현상을 비아냥거린 것이자 그로부터 자신들의 순수한 생산품을 구별 짓기 위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런 비아냥 속에서도 스파게티 웨스턴은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테렌스 힐, 버드 스펜서의 버디 무비이자 스파게티 웨스턴무비인 <내 이름은 튜니티>는 큰 인기를 끌어 2탄인 <튜니티라 불러다오>, 3탄인 <튜니티는 아직도 내 이름>까지 나오게 된다.


<내 이름은 튜니티>는 레오네의 영화와 비슷한 궤적을 지녔지만, 동일한 노선의 영화는 아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창시자인 세르지오 레오네는 ‘장르의 화형화’를 주장했다. 이런 영화의 특징은 신화적 형상들이 앞서고, 형식이 내용의 구성 요소가 아닌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의 폭력이 중심이고 법이다. 그러나 스파게티를 어슷썰기 한 영화는 레오네의 영화적 정서와는 다르다. 훨씬 난잡한 스파게티 소스에 오락적인 양념을 아낌없이 썼기 때문이다. 그런 <튜니티>의 옆엔 <장고>라는 영화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테렌스 힐이 주연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인기 있던 서부영화 <장고>의 주인공 ‘프랑코 네로’ 와 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던 탓이다.

<튜니티>의 보안관 ‘밤비노’는 보안관 행세를 하는 서부의 무법자다. 후에 나오는 진짜 보안관은 장애인이다. 보안관 행세를 하는 형제는 항상 폭력을 쓸 때 자신들의 보안관 배지를 감춘다. 그들이 폭력을 가할 때는 대개 불합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하는 폭력이 대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배지를 감춘다는 것은 자신들이 진짜 보안관이 아니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벌하는 것이거나, 보안관이더라도 폭력은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양심에서 누가 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예의로 보인다.


보안관을 죽이고 보안관인척 하고 있는 밤비노와 산적들과 결탁하는 소령의 모습들을 보면 영화는 선과 악이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 전복성은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세계관을 창조한다. 그런 과정에서 이항대립의 구도는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그 흔적은 권력층과 농민의 대립관계다. 소령일당과 몰몬교도들은 2000에이커의 땅을 두고 다툰다. 이 땅은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물질적인 가치의 싸움만이 아니라 서로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소령일당이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몰몬교도들은 비폭력으로 평화를 이루고 이 땅 위에 마을을 세우는 믿음을 지녔다. 그리고 싸움의 승자는 전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몰몬교도들이다. 그들은 그곳에 남아 계속 개간을 하게 된다. 싸움에 패한 소령은 네브라스카로 가고 결혼하고 정착하겠다던 튜니티는 다시 방랑을 시작한다. 그렇게 멋진 신세계, 유토피아가 탄생한다. 서부와 같은 환상이 다른 모습으로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의 폭력과 간섭이 없는 세계다. 씨를 뿌리고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는 세상인 것이다. (정태형)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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