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화사의 가장 이례적인 재앙 중 하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 Zabriskie Point>(1970)를 두고 <롤링스톤>지가 한 말이다. 700만 달러의 제작비에 90만 달러의 수입. 완벽한 실패였다. 그러나 안토니오니의 이 유일한 미국영화는 계속해서 스크린에서 되살아났다. 영화를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작품 속 배경인 데스밸리(Death Valley), 죽음의 사막이었다. 이방인이 본 북미대륙의 스펙터클한 풍광이 관객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실로 ‘공간’은 볼거리를 넘어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다. 감독은 가장 미국적이라고 할 법한 두 공간, 즉, 마천루와 광고판들이 즐비한 대도시와 줄곧 서부영화들의 배경을 담당해 온 사막을 스크린에 담았다.

70년대, 도시의 젊은이들은 히피문화와 반전운동, 혁명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 투쟁 중에 요주의 인물로 경찰에 지목된 마크(마크 프레쳇)는 경비행기를 훔쳐 사막으로 달아난다. 창밖으로 성조기가 나부끼는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마지못해 비서 일을 하고 있는 여자, 다리아(다리아 할프린)는 원치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 명상을 하러 사막으로 달아난다. 도시를 탈출한 두 남녀가 우연히 다다른 곳은 바로 데스벨리의 자브리스키 포인트다. 한 때 강이고 호수였으나 지금은 말라붙은 계곡. 그 가장 밑바닥에 다다랐을 때, 둘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삶이 빚은 모든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죽음의 가장 깊은 곳. 진공상태의 황무지에서 발생하는 사랑은 완벽히 자유롭고 아름다우며 찰나에 영원함을 품는다. 그레이트풀 데드의 인상적인 사운드트랙과 더불어 대자연과 어우러진 배우들의 육체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사막 곳곳에 꿈처럼 나타난 커플들이 자유롭게 사랑을 나눈다. 이 초현실적인 광경은 히피문화가 추구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랑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 신에 등장하는 건 사진기를 목에 맨 전형적인 미국인 관광객 가족이다. 가장의 대사는 노골적이다. “여기 휴게소 만들면 장사 되겠어.” 어디서든 유용성을 발견해내는 자본의 속성 앞에 사랑과 평화는 속수무책이다. 삶은 죽음의 황무지까지 덮치며 자유를 침범할 것이다.

결국 도시로 돌아간 마크는 죽음을 맞이하고, 이는 히피문화를 일종의 패션으로만 받아들여 왔던 다리아에게 충격을 준다. 그녀의 히피문화란 혁명과 투쟁보다는 마리화나와 명상이었다. 마크가 이상적인 미래를 꿈꿨다면 다리아는 말 그대로의 꿈, 백일몽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본래 목적지였던 피닉스의 멋들어진 주택에 깊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이 때 그녀가 택하는 저항은 명상으로, 생각으로 그 집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폭파하는 것이다. 온갖 세속적인 가치들이 공중에서 산산이 분해된다. 그리고 그녀는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쨌든 더 이상 고층빌딩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다.

1970년에 제작 된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보다시피 혁명의 성패를 섣불리 규정짓지 않는다. 다만 영화 전반에 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도입부의 토론에서 젊은이들은 파시즘을 규탄하면서도 막상 집회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중산층 개인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모순을 보인다. 사랑과 혁명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는 사막 같은 순수한 불모지뿐인데 그곳은 곧 자본의 쾌적함에 점령당할 예정이다. 결정적으로 마크는 죽고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와중에 영화는 몇몇 인상적인 ‘그림’들을 마음에 남긴다. 핑크 플로이드, 그레이트풀 데드 등의 음악에 맞춰, 황량함과 비관을 뒤로 한 청춘의 행위와 백일몽은 그 배경이 어두운 만큼 더 빛나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그것은 모호하지만 그 자체로 황홀한 경험이다.(백희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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