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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상그레> - 포장 없이 현실을 파고드는 힘


김영진 평론가의 선택 - 상그레 Sangre


2005│90min│멕시코, 프랑스│Color│35mm│청소년 관람불가

연출│아마트 에스칼란테 Amat Escalante

출연│시릴로 레시오 다빌라, 케니 존스턴, 클라우디아 오로스코

상영일정ㅣ 1/29 20:00, 2/6 17:30, 2/15 13:30

“<상그레>는 원인을 제시하지 않은 채 관객들로 하여금 끝까지 궁금증을 품게 만들면서 사건을 쭉 응시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이런 시도가 현대 영화에서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순전히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서 관객을 새로운 오감의 영역으로 데려다놓고 체험시키려 하는 야심찬 작품이다.”


포장 없이 현실을 파고드는 힘


명색이 영화평론가이고 영화제 프로그래머 일도 하고 있는데 가끔 내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에 놀란다. 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마트 에스칼렌테 감독의 이름을 몰랐다. 몇 달 전 장병원 평론가와 김희정 감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아마트 에스칼렌테 감독의 영화 얘기가 나왔다. 김희정 감독은 자신이 한국에선 아마트 에스칼렌테의 존재감을 처음 알아본 사람일 것이라며 자랑했다. 장병원 평론가는 겸손을 가장한 채 그 역시 아마트 에스칼렌테의 영화가 왜 주목해야 할 영화인지를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거론된 영화가 <상그레>였다. 두 사람은 그 영화가 2000년대에 나온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일 것이라고 동의했다. 알고 보니 이 감독은 최근 <헬리>(2013)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헬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한국 시장에서 조용히 개봉하고 어떤 비평적 반향도 얻지 못한 채 묻혀 버렸다.


<헬리>와 <상그레> 모두 이곳의 영화 문화 지형에서 환영받을 만한 작품들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로 이끌어간다. 결말이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관습을 과격하게 이탈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감독에 대해 말하자면 <상그레>에서 보여준 이상한 괴력, 또는 마력이 그 자신의 영화세계에서 온전히 진화한 것 같지는 않다. <헬리>는 충격을 주는 영화였지만 과도한 물리적 묘사가 피할 수 없는 함정도 같이 품고 있었다. 그 영화에서의 끔찍한 고문 장면 묘사는 현실을 모방한 것인지 모방을 넘어 극단적인 인위로 창조된 것인지 모르는 지점에서 관객을 습격한다. 구체적인 현실을 보여주다가 결말부에선 어떤 숭고함마저 자아내는 이미지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그레>에는 겉치레로 보일 그런 장치가 없다. 딸의 시체를 검은 비닐로 포장해서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은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비상한 긴장을 자아내면서 우리가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잔인하게 파고든다. 그 파고듦이 어떤 극적 폭발을 예고하거나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진행형으로 파고들어져 있을 뿐이다. 종래의 어떤 이야기 문법도 떠올리게 하지 않는 희한한 스토리이면서 그걸 극적 수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사운드의 긴장으로 온전히 버티며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돌파력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 영화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틀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