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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말론 릭스의 '풀어헤쳐진 말들'


 [리뷰] <풀어헤쳐진 말들>이 여전히 새로운 이유

 

 

 

 


<풀어헤쳐진 말들>이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이 영화가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흑인 남성들의 모습이 나오는가 싶더니 그와 동시에 “Brother to Brother to Brother…” 라는 말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온다. 그런데 이 말은 느리게 이어지다가 갈수록 빨라지고, 급기야는 다른 목소리들과 겹쳐지면서 아예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말이 원래의 의미를 잃고 음악적 리듬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얻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 “말이 풀어헤쳐지고”, “묶인 혀들이 풀리는” 것을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그 뒤로도 영화는 일반적인 나레이션 대신 쉬지 않고 흐르는 음악과 같은 대사들을 통해 다양한 말이 영화를 가득 채우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말이 풀어헤쳐져야 하고, 묶인 혀들이 풀려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9년, 말론 릭스 감독이 만든 <풀어헤쳐진 말들>은 흑인 게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개봉 당시 영화의 포스터에 적힌 홍보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흑인 남자를 사랑하는 흑인 남자 Black Men Loving Black Men.” 미국 내 동성 결혼에 대한 문제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1980-90년대 당시 미국의 동성애자 문제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나빴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동성애자도 아니고 ‘흑인’ 동성애자다. 백인 경찰이 과속 운전을 한 흑인 청년을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했다가 무죄를 선고받자 이에 분노한 흑인들이 LA에서 ‘폭동’을 일으킨 게 1992년이었다.


 

즉 이 영화는 당시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정면으로 끌고 들어왔으며, 당연히 대중과 언론들은 이 영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비난도 물론 있었다. 특히 공화당의 정치인인 팻 뷰캐넌이 <풀어헤쳐진 말들>을 ‘포르노’란 단어를 써가며 비난하고, 당시 정부의 예술 지원 정책을 비난하며(이 영화는 미국 내 다양한 예술 기금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정치적으로까지 문제를 삼은 것은 이 영화에 얽힌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걷어내고 보면 <풀어헤쳐진 말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내용을 다루는 영화이다. 영화에 출연한 흑인들은 당시 그들이 받고 있었던 차별을 이야기했으며, 동시에 게이로서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흑인으로서 당당히 버스를 탈 권리를 이야기했고, 처음 남자와 키스를 했을 때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이바에서 백인들의 눈치를 받지 않고 놀 권리와 아무 이유 없이 구타를 당했던 자신들의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영화에 쏟아진 비판에 대해서도 말론 릭스 감독은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공동체의 기준에 대한 진부한 레토릭 속에 내포된 것은 오직 하나의 ‘중심’ 공동체(가부장적이고, 이성애적이고, 주로 백인들로 이루어진)가 내린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기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흑인이자 게이였던 말론 릭스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은 채 영화를 통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던 언론과 대중은 결국 자신들의 경직성만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지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솔직한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 영화를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보다 이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앞서 얘기했듯 영화 속 인물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는데, 이 ‘풀어헤쳐진 말’들은 ‘중심 공동체’의 일상 언어, 즉 주류 언어로 전달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랩과, 아프리카 민속음악의 리듬, 소울 또는 가스펠 음악, 스트리트 댄스 등 흑인 공동체가 만들어낸 고유한 문화적 양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달한 단순한 메시지에는 결과적으로 강력한 정서적 힘이 실린다. 거친 화질에 거친 편집이지만 이런 만듦새가 영화에 몰입하는 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가득 불어넣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논란을 일으켰던 것은 단순히 영화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형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진부한 레토릭’의 형식에 익숙해진 당시 사회는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자신들의 기존 질서와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두 흑인 남성이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며 원색적인 비난을 했을 것이고, 손가락을 튕기며 리드미컬하게 대사를 날리는 낯선 감성에 불편함을 표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생명력을 자랑하며 이 사회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개봉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어헤쳐진 말들>을 보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풀어헤쳐진 말들> 상영 

1/28(화) 17:00

2/9(일)   13:00 


풀어헤쳐진 말들 Tongues Untied
1989│55min│미국│Color│Digibeta│12세 관람가
연출│말론 릭스 Marlon Riggs
출연│말론 릭스, 마이클 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