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2012 베니스 인 서울

[리뷰] 마르코 벨로키오의 <잠자는 미녀>

각기 저마다의 진심들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마르코 벨로키오의 최신작 <잠자는 미녀>는 17년째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여성과 그녀의 안락사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과 선택을 그린다. 감독은 여기서 어떤 특정 입장에 서는 대신 이 문제에 얽힌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겪는지 찬찬히 보여주며 우리 삶의 보편적인 고민과 슬픔을 묵직하게 담아낸다.

먼저 주목할 것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다양한 등장인물들이다. 이 영화에는 ‘안락사 법’의 통과를 두고 고민하는 정치인이 있고, 매일 거리에서 안락사 반대 집회에 참석하는 젊은 여성이 있다. 또한 안락사 관련 뉴스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의사가 있고 자살을 시도하다 병원으로 실려 온 젊은 여성이 있다. 한편 식물인간 상태의 딸을 집에서 돌보는 중년의 여성과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의 아들,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동생 때문에 크고작은 사고에 얽히는 청년도 있다. 이들은 영화 안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극적인 드라마들을 만들어낸다.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 때문에 혼란을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코 벨로키오는 이 흩어진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정리해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전체 이야기를 한 눈에 보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서사를 파편화시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관습적인 서사 전개에 기대어 미리 가치를 판단하고 쉬운 결론에 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매 순간 새롭게 판단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와 깨어나지 않는 딸 때문에 가슴을 졸이는 엄마의 입장은 이 복잡한 서사 속에서 각자 똑같은 무게로 그려질 수 있다. 이는 <잠자는 미녀>의 큰 미덕 중 하나이다.

나아가 감독은 안락사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등장인물을 향한 작은 위로와 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에 방점을 찍는다. 이 영화를 보며 안락사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대신 서로 다른 처지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감동적인 순간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긴 갈등 끝에 나누는 아버지와 딸의 포옹,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녀의 사랑, 환자를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의사들의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글/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