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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리뷰] 구라하라 고레요시 <치사한 놈>

태양족 전통의 계승과 극복

 

 

 

<치사한 놈>의 감독인 구라하라 고레요시는 한국에는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지만 1957년에 감독으로 데뷔한 후 90년대까지 3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오랜 기간에 걸쳐 일본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1927년생으로 같은 세대의 감독 중에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으며 쇼치쿠에 입사했으나 1954년에 닛카츠로 소속을 옮겨 1967년까지 닛카츠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태양족 영화’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린 나카히라 코우 감독의 <미친 과실>(1956)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그 후로는 젊은 감수성의 톡톡 튀는 영화에서 블록버스터까지 연출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특히 1983년에 만든 <남극 이야기>는 다음 해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가 개봉하기 전까지 일본최고흥행 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치사한 놈>은 구라하라 고레요시가 닛카츠에서 한창 활발하게 활동을 펼친 시기에 만든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가 영화를 통해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잘 나타난 영화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젊어 보이는 세련된 스타일이다. 주인공인 다이사쿠와 노리코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과 그 매니저답게 세련된 최신 의상을 입고 다니며, 다이사쿠가 자주 찾는 클럽이나 그의 일터인 방송국 무대 역시 화려함을 자랑한다. 여기에 경쾌한 재즈음악과 광각렌즈까지 동원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 예고 없이 휙휙 넘어가는 편집까지 더하면 이 감독의 장기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을 동반한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 스타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당시 젊은 세대를 위해 만든 오락 영화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면이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태양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번에 상영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청춘 영화에도 잘 드러나지만 당시 일본의 전전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파시즘과 전쟁을 통과한 기성세대들의 눈에 전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부를 바탕으로 놀기만 하는 못마땅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은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국에서 수혈 받은 신식문화를 바탕으로 <이유 없는 반항> 속 제임스 딘처럼 스피드를 즐겼으며 전자 음악과 록에 맞춰 춤을 췄다. 그리고 이때 때맞춰 나와 젊은이들의 큰 지지를 받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 『태양의 계절』의 제목을 따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태양족’이란 이름을 얻었다. 또한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친 과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닛카츠를 필두로 ‘태양족 영화’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당시에 만들어진 태양족 영화들은 저마다 다양한 특징이 있었지만 그 핵심에 자리 잡은 것은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자신들을 속박하는 장애물로 여겼다. 이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반항이었지만 그 반항은 기성질서를 전복하는 것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태양족 영화 속 젊은이들은 순간의 젊음을 만끽했으며, 기성세대에 무조건적인 증오를 보였으며,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젊은 육체를 스크린 가득 뽐내면서도 자주 비극적인 결말을 맞곤 했다.

 

그런 맥락에서 <치사한 놈>의 주인공들은 50년대의 태양족 젊은이들이 몸만 성장한 채 사회에 정착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다이사쿠는 화려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빡빡한 일상에 지쳐 피곤해하고 어떤 일에도 쉽게 흥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다이사쿠와 노리코 커플은 737일이나 만났지만 섹스도 하지 않고 키스도 하지 않는다. 그 둘 중 하나라도 선을 넘을 경우 자신들의 ‘순수한 사랑’이 변질되고 말 것이란 걱정 때문이다. 명분은 거창하지만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스스로의 젊음에 족쇄를 채우고 거세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대신 강박적으로 자신들이 함께 한 날짜를 기록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반복적인 하루를 보낼 뿐이다. 60년대의 태양족 청년들은 이렇게 최소한의 저항마저 잊은 채 외양의 화려함만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명백히 당시 세대에 대한 감독의 논평으로 읽힌다. <미친 과실>의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젊은 세대의 억눌린 욕망을 파괴적으로 분출시켰던 장본인 중 한 명이 다시 영화를 통해 어떤 목표도 없이 그저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는 태양족 세대를 비판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다이사쿠는 순간의 충동을 좇아 낡은 지프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노리코 역시 그를 붙잡기 위해 최신식 재규어를 타고 그의 뒤를 좇는다. 그리고 이 사고 많은 긴 여행 끝에 놓인 것은 묻어뒀던 자신들의 욕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스스로 채운 족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이 뒤에 유의미한 삶의 목표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처음으로 생기를 찾은 눈동자를 보여주며 방송국의 카메라를 뒤로한 채 하늘의 태양을 바라본다. 이 결말은 너무나 직접적인 감독의 메시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메시지가 가진 무게는 어느 영화보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젊음은 그대로 간직한 채, 이번에는 제대로 박차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글/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